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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Jul 09. 2018

패배감

열네 번째 이야기. 바르셀로나(Barcelona)

모두가 한껏 꾸미고 오는 화려한 파티에 노메이크업으로 참석하면 이런 기분일까. 남미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넘어온 바르셀로나에서 난 완전히 무너졌다. 부끄럽고 유치한 이유로.  


바르셀로나에서 용우에게 보인 나의 히스테리를 ‘급격한 환경의 변화’ 탓이라 말하고 싶다. 지난 3개월 간 남미에서 매일 춤을 추고, 내 피부가 어떻게 거칠어지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던 자칭 자유로운 영혼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바르셀로나에 온 순간부터 더 이상 쿨한 척할 수 없었다. 이토록 화려하고 물가 높은 도시에서 돈도, 화장품도, 예쁜 옷도 없는 내가 끝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색의 패딩 점퍼와 레깅스, 꼬질꼬질한 하바이아나스 쪼리와 둔탁한 트래킹화. 남미에서 내가 아끼던 것들이 여기선 벗어던지고 싶은 눈엣가시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우울했던 것이라고 그동안 강변해왔지만 솔직히 다 돈 탓, 외모 탓이었다. 화려한 관광객들이 많은 돈을 쓰러 오는 곳, 여행지보다는 관광지 같은 바르셀로나 센트로에서 내가 우울했던 건 민낯의 김해인이 너무 ‘못생겨 보여서’였고 모든 게 너무 ‘비싸게 느껴져서’였다. 자기 고향을 ‘관광객들에 눈이 멀어 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는’ 도시라고 비난한, 베네수엘라에서 만났던 바르셀로나 출신 친구가 해준 말도 있겠다. 나는 매일 다른 이유로 바르셀로나를 미워했다.  

관광객들로 인해 지역 사회 생태계가 망가지고 주민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내용의 호소문


숙소에 대해선 또 얼마나 불평을 했는지. 호스텔에서 우리에게 배정한 4인실 방은 이상하게도 원래 호스텔 건물이 아닌 바로 옆 건물의 작은 아파트 한 칸이었는데 거기엔 장기 투숙 중인 이란인 모녀가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젊은 배낭여행자가 많은 곳에서 있고 싶은데, 왠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란인 모녀와 일주일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 막막했다. 괜한 편견이 겹쳐 나는 이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이 사람들은 바르셀로나의 싼 도미토리에서 한 달을 지낼까? 어린 여자아이는 하루 종일 엄마와 방에만 있는데, 여긴 도대체 왜 온 거지? 가끔 방에 들려 저녁식사를 하고 가는 정체 모를 이란 남자는 남편의 친구라고 하는데 아이 아빠는 왜 나타나지 않을까? 나타나지 못하는 불쌍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서 그들은 ‘불법체류자로 스페인에서 고생하고 있는 남편/아빠를 방문한 가난한 이란인 모녀’로 입력됐다. 이제 내 인식 속의 이란인 모녀와 우리 커플은 우울한 방구석에 처박힌 ‘바르셀로나가 외면한 아웃사이더들’이 된 것이다.   


용우가 남미 여행 내내 빨래 가루를 들고 다니며 우리 둘 빨래를 참 열심히도 했는데, 바르셀로나에선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용우가 빨래를 할 때마다 자꾸 명품 쇼핑백을 들고 다니던 관광객들이 눈에 아른거려 그냥 바르셀로나에선 돈 주고 맡기면 안 되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엔, 우린 남미에서도 몇 푼 되지 않는 빨래 비를 아끼려 직접 해왔던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바르셀로나에서 돈 주고 빨래를 맡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빨래를 좀 덜하면 될 것이지, 지금 스페인은 겨울이고 우린 며칠 후면 한국에 돌아가는데 용우는 왜 그렇게 빨래에 집착하는 것인지. 왜 난 너의 빨래에 대한 집착 때문에 초라함을 느껴야 하는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자꾸 지배했다. 용우도 참 억울했을 것이다. 그깟 빨래 좀 한다고 불쌍하고 고지식하고 이상한 데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으니 말이다.

2013년 처음 이곳에 왔을때 바르셀로나는 최고의 클럽이자 자유로운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결국 꼬일 대로 꼬인 나는 현재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천박함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히스테리의 절정을 보였다. 정말 찌질하게, 눈물을 찍 흘리면서, 콧물도 흘려주면서. 하지만 바르셀로나 탓만이 아니라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나라는 인간은 왜 이렇게 환경에 취약한 것일까. 내 어리석음이 한없이 크게 느껴지자 나는 더 우울해졌고, 결국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까지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게 남미 여행은 용우에게 내 바닥을 보이며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도 바르셀로나 이야기만 나오면 용우는 한숨을 푹푹 쉰다. 그러면 나는 조심스레 용우에게 바르셀로나에 꼭 다시 가자고 말을 꺼낸다. 다시 가면 가우디의 발자취는 하나도 느낄 수 없는 바르셀로나, 현지인들은 발도 들이지 않는 관광객들로만 가득한 시장과 람블라다 거리는 무조건 피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진짜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에서 그들과 말을 섞어보자고 말한다. 아직 용우는 나와 바르셀로나를 다시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유럽에서 아웃하는 비행기는 밀라노에 있었다. 6개월 간 살았던 밀라노에서 마지막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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