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의 수학학원(다른 과목도 대체로 비슷하지만)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개별진도 학원과 판서식 수업 학원이 그 큰 두 가지다. 대체로 공부를 잘하고 선행학습이 되어있는 아이들은 판서식 학원에서 학년 구분없이 진도별로 모여서 수업을 받고, 진도가 처지거나 수학에 약한 아이들은 본인의 수준에 맞춰 구멍이나 취약점을 찾고 메우면서 공부를 하는 개별진도 학원을 다닌다. 장단점이 있어보이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대치동 아이들은 판서식 학원의 높은 레벨을 받기 위해 개별진도학원을 다니며 과외를 하고 선행학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는 첫째는 아직 판서식 학원을 경험하지 못했다. 않았다, 가 아니라 못했다, 가 포인트. 선행학습이 되어있지 않아 학원의 레벨테스트도 제대로 응시해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내가 아이의 학원을 좀 알아보고 적절한 검색과 준비를 도와줘야하는 시점이 온건가, 싶어서 아이의 수학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해 아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학원을 알아보고 수준을 가늠해보았다.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나도 아이의 수준을 직시하고는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이의 취약점은 세상에나, 딴 게 아니라 고려대상도 아니었던 연산이었다.
많은 고민이 일었다. 더 어려운 수학을 공부하면 연산은 저절로 잡히지 않을까, 진도가 빨라지면 더 많은 계산을 접하니 연산도 나아지지 않을까, 수학이 되는데 산수가 안될리는 없지 않을까, 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극한 훈련을 받는 선수들이 모래주머니를 빼면 평소의 훈련은 껌으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 아이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얻은 나의 답은 구몬수학이었다. 대학민국 어린이들의 가장 최초이자 가장 기초가 되는 수학의 걸음마, 바로 그 구몬 맞다. 그건 첫째의 상태(?)를 보고 조바심을 내고 후회하는 내 모습이 과거의 나, 나 자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가봐도 P 이지만 알고보면 이보다 더 P일 수는 없겠다 싶은 P형 인간이다. 고민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문제도 시한이 다가올 때까지 고르다가 막판에 선택하는 인간이니, 미래의 계획같은게 있을 리 없다. 어떤 걸 미리해놓는 일 따위는 내 사전에 없다. 결정이 늦으니 그 뒤에 따라오는 실행은 필연적으로 늦을 수밖에. 부딪쳐서 겪어볼 수 있는 다양한 난관과 장애를 만나서 후회했고, 그럴 때마다 앞으로는 계획을 세우자고 다짐도 해봤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는 건, 내 머리속에선 미로앞을 헤매는 나 같았다. 거시적으로 세우는 계획은 너무 막연해서 망쳤고, 미시적으로 세우는 계획은 성기고 헐렁한 내 성격탓에 어두운 등잔밑을 자주 놓쳐서 실패했다.
20대에는 장래의 계획이 없는 나에 대해서 자괴감과 자책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을 보면 어학연수를 가겠다, 인턴을 하겠다, 공모전에 응시하겠다, 1년 휴학을 하겠다와같는 목표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은 금융권에 가고 싶다, 마케팅 쪽으로 일을 해보고 싶다, 창업을 하겠다는 결심들이 있었고, 결혼은 몇살쯤 하고 싶고 어디에 살고싶은지 어떤 남편을 만나고 싶은지에 대한 희망사항도 있었다. 그 모든 걸 떠밀리듯 엉겁결에 한 나는 거기서 끝일줄 알았지만, 아이는 언제 낳고 싶은지, 몇을 낳고 싶은지, 육아 휴직은 언제 쓸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그야말로 거대한 계획과 미세한 계획, 계획의 무덤이었다.
나는 늘 뒤처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늘 남을 흉내내며 살아왔다. 표준안에 있고 싶어서 평균의 삶을 위해서 하면서도 뭘 하는지,왜 하는지 알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젊은 나이였으니까, 내 앞은 백지이고 뭔가는 채워져야 하니까, 그냥 꾸역꾸역 했었다. 그랬더니 어떤 건 이미 놓친 것도 있었고 너무 늦게 시작하기도 했다.
아직 살아갈 날도 새털같지만 그래도, 40대 중반이 된 지금 나에게 빠져있던 건 예행이나 선행이 아니라 '복습' 과 '기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들에게 중요한 건, 선행이 아니라 복습이다. 선행학습은 천재들이나 영재들의 영역이었다. 먼저 나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유형인지 알아야 나에 대한 처방도 내놓을 수 있었다. 어제의 나를 되돌아 보고 반성을 해야 내일의 나도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건 맞지만, 그건 반대로 경험칙과 실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번뇌와 선택에 시간이 오래걸려 시작이 늦어지지만 그건 한편으로 시작을 하면 번복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시에 실패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 그렇게 나는 첫째를 낳고 여섯 살의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10kg이상의 체중감량을 인생에서 두 번이나 성공해낸 바 있다.
복습을 하는 이유도 선행을 하는 이유도 결국은 현행을 위해서다. 과거에 메어있기 위해서도 아니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기위해서도 아니라, '지금, 여기, 내앞의' 것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그걸 알려주고 싶다. 내 경험위에서 첫째에게는 타산지석이 되어주고 싶다. 나는 무계획적이었으니까, 첫째에게는 반면교사를 가르쳐주고 싶다.
이제 곧 다가오는 첫째의 겨울 방학, 우리는 선행의 무덤말고 계산의 무덤에 빠져보자, 첫째야. 대치동 학모로서 조급하지 않기란 불가능하지만 우리만의 속도로, 너만의 페이스로 탄탄한 기초를 쌓아 나가보자꾸나. 아무리 위대한 성도 모래위에 지어졌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