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심기
epilogue) 오늘을 살아내는 당신에게,
양파는 모종심기에서 시작한다. 가을에 씨를 뿌려두었다가 발로 잘 밟고, 건조와 비를 피해 멍석을 열흘 정도 덮어두었다가 싹이 나면 걷는다. 싹이 어느정도 자랄 때까지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 심는데 이것이 아주심기다. 더이상 옮겨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이다. 아주심기를 하고난 다음에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 주면 겨울 서릿발에 뿌리가 들떠 말라 죽을 일도 없을 뿐더러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나에게도 아주심기 예고기간이라는 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뿌리째 뽑혀와 옮겨심어진 식물처럼 시들시들하게 말라가지 않았을까, 호된 신고식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까, 겨울을 겪어낸 양파처럼 굳건하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걸까. 내가 원하는 것이 이곳에 있는지 두눈을 똑똑이 뜨고 찾아볼 수 있었을까. 연고도, 추억도, 사연도 없는 외국만큼 낯선 강남으로 이사와서 몇 년, 매섭게 힘들었고 혹독하게 곤란했다. 누군가가 왜, 냐고 묻는다면 예전에는 먼저 그 질문이 싫어서 피했을 것이고, 그다음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머뭇대었고, 그러다가 답할 시간을 놓치고, 그래서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심기가 덜됐던 모양이에요.”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에도 양파의 모종처럼 정확하고 일률적인 처방과 아주심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예행연습도 시행착오도 없이 그냥 양파처럼 서릿발에 들뜨지도 않고, 단단하게 버티기만 해도 성공인건데. 그러나 미래를 모르고, 연습이 없으며, 과거를 돌이킬 수 없는 현재성, 오로지 진행중이기만 한 계속성안에 인생의 묘미 또한 있는 것이겠다. 그게 나를 시험에 들게 할지라도, 힘들게 할지라도, 그래서 때로는 끈을 놓아버리고 싶게 만들지라도 현재는 지켜내야 하고 오늘은 버텨 보아야 한다. 과거는 미화되고, 대과거는 망각의 계곡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이또한 지나가는 것이다. 답도 없고 방향도 없어서 스스로 아주심기의 토대를 만들어내야 하는 나는 오늘도 여기서 하루를 보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에 나의 매일을 버티게 했던 건,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 11시 귀가해서 보는 잠든 첫째의 얼굴과 영단어를 외우며 마시는 맥주 한 캔이었다. 덕분에 나는 시험을 치르고 합격통보를 받기까지 5kg이 넘는 살을 축적했지만, 그 때의 맥주 한 캔이 나를 살게 했다. 술꾼에게 공부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또 내 일주일을 버티게 했던 건, 일요일 아침 몰아자는 늦잠이었다. 안그래도 아침잠이 많은 내가 일찍 일어나서 도서관에 간 뒤, 착석을 하고, 커피 한 잔과 함께 머리에 예열을 하는 일이란 고장난 기계에 기름칠을 해서 기어이 다시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늦잠을 잘 일요일, 그 하루를 기다리며 매일을 보냈고, 나의 한 달을 버티게 한 힘은 매월 말일은 집에서 쉬면서 아이랑 시간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 월말을 보면서 한주, 또 한주 꾸역꾸역 힘을 내었다. 그 시간들은 합격과 동시에 끝인줄 알았건만 실은 그 때 어쩌면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할 교훈을 얻었던 것도 같다.
작은 보상을 기다리며 하기싫은 일들을 해내는 삶. 어른된 후 저마다 어깨를 짖누르는 책임의 무게를 떠받친 나에게 해주는 보상, 그러다보면 가끔씩 찾아오는 행복. 그런것들 속에서 인생은 의미있는 것이 되고 행복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누릴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선택적으로 찾아간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그게 인생인 것 같다. 단짠단짠이 아니라, 짠짠짠짠짠단, 이정도의 비율로 찾아오는 아주 미약하고 가느다란 행복, 그걸 위해 대부분의 불행과 역경을 버티는 삶 말이다. 그렇게 버텨내는 하루하루가 모여 나의 거름과 자양분이 되어 결국에는 이곳에 아주심기되는 내 인생, 그걸 토대로 또 앞으로도 살아내보려 한다.
ps) 난데없고 두서없이 시작했던 연재글이니만큼 마무리역시 느닷없게 해봅니다. 어눌하고 서툰 글, 보아주신 많은 분들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그중에서도 짧게 공감과 격려의 말들을 보태주어주신 분들을 보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별하나를 발견한 것 같은 안도감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 앞으로도 많은 분들 브런치에서 뵙고 싶어요! 모두들 평안하고 무탈한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