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량은 절대로 늘지 않습니다. 주량이 늘었다는 건 간은 이미 끝났고, 뇌가 망가지고 있는 겁니다.”
주량을 어떻게 늘리냐는 어떤 알쓰의 질문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한 의사가 내놓은 답변이다.
한때 주당이었던 애주가로서 술에 약하다는 건,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학생이나, 피나게 연습을 거듭해도 뭇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아이돌 연습생과도 같은 위치라고 하면 지나친가.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도 그게 어떤 분야가 되었든 즐기는 천재나 노력하는 천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를 갈망하는 범인들의 숙명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한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평생을 산다는 유전. 그게 음주 분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술을 좋아하게끔 설계된 유전자가 있다. 술을 퍼먹게 만드는 유전자가 있다는 건 이미 입증된 연구 결과다. 비염이나 비만, 고혈압이나 당뇨가 유전인 것처럼 주량이나 음주취향도 유전이다. 그게 유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술은 미성년자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품목이라 나는 태어나서 20여년간 그것을 겪어보지도 못하고,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살았다. 애저녁에 그 분야를 접하고 섭렵하게 되는 음악이나 미술, 운동과 판이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접하게 되자마자, 그걸 겪게 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고 깊이 빠져들었다.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도 그랬다. 그걸 유전 이외의 다른 개념으로 설명할 순 없다. 그러니 사실 술꾼들의 가족들이 술꾼더러 '술을 끊으라' 고 하는 건, 당뇨를 가진 이에게 하루아침에 당뇨를 치료하고 오라거나, 비염환자에게 지금 당장 비염을 없애보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키작은 유전자를 가진 이에게 어서 빨리 키를 키워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건 마술이나 서커스다.
유전을 거스르려면 타인들의 몇 곱절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혈압을 관리하기 위해 저염식과 탄수화물을 제한하는 식단을 유지해야 하기도 하고, 꾸준한 운동도 필요하다. 비염환자들의 케이스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나 더 비관적인 부분도 있다. 계절이 지나가기를, 알러지에 면역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관리의 방법이 없다. 다른 이들과 비슷한 상태의 몸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과 관리란 걸 해야하는 자의 서글픔, 술꾼들에게도 이 서글픔이 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몸을 가져 슬픈, 술을 못마시는 술꾼들에게도 비애가 있다. 한때는 내 주량도 어디가서 딱히 빠지지는 않는 평균을 웃도는 수준은 되었다. 소주 한 병 반 정도는 너끈히 마셨으니까. 그러나 두 번의 출산과 10여년의 세월에 내 체력은 한 풀 꺾였고, 하향곡선을 그리는 체력에 비례해 주량도 수그러들었다. 한 번 줄어든 주량은 인간의 늙음과도 같아서 점차 고속노화의 페달을 밟을 뿐 결코 늘지 않았다.
마시는 속도와 술이 깨는 속도가 얼추 비슷한 싱싱한 간을 가진 이들이 부럽다. 술자리에서는 나대던 심장이, 금세 고요와 평정을 되찾고 정적의 상태로 잠에 들 수 있는 이들이 부럽다. 음주 후 밤새도록 깨지않고 자는 이들이 부럽다. 그래서 다음날 말짱한 정신으로 잠에서 깰 수 있고, 해장국 한 그릇이면 숙취에서 깨어나 그 날 밤 또 다시 달릴 수 있는 이들이 사무치게 부럽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일 바에야 차라리 그누구보다 술을 극혐하고 쳐다도보기 싫어하는 이들이 사실은 제일 부럽다.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10년 동안 관리를 해주면 원래 건강했던 사람과 비슷한 상태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유튜브에서 의사가 한 말이다. 수년 동안 흡연을 하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10년 간 폐를 관리해주면, 원래 폐가 건강했던 사람처럼 살 수 있다고 한다. 혈압이 높은 사람이 10여년 동안 혈압을 관리해주면 혈압이 원래 정상인 사람들과 비슷한 상태로 살 수 있다고 했다. 타고나지 못했다면 노력하는 삶, 노력하는 천재들을 앞설 수는 없다고 해도 2등이라도 가는 인생, 그런 것도 가치있다.
다른 술꾼들보다 술에 약하고, 수면의 질이 낮고, 오래도록 숙취에 시달리는 나는 그래서 운동을 한다. 공복에 운동을 하고, 햇볕을 쬐기위해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운동하는 쪽을 택한다. 또 식단을 관리한다. 맥주를 마시기위해서는 배는 부르지 않으면서 칼로리나 영양면에서 손실이 없는 단백질을 섭취해주는 것이 좋다. 배가 부르면 맥주를 양껏 마실 수 없다. 그렇다고 영양이 부실하면 빨리 취하게 된다. 한편, 숙취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 수면의 질을 높이려 애쓴다. 자기전 반드시 화장실에 가며, 핸드폰을 가능한 한 보지 않고, 잠들기 전 한시간 이상은 소란스럽고 번잡스러운 곳에서 벗어나 혼자 조용히 시간을 가질 것. 수면의 질은 특히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루틴을 만들어놓고 매일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누가 보면 건강전도사처럼 보일 이런 규칙들이 자주, 오래, 많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나 스스로를 독려하는 내 노력이자 관리다. 비만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많이들 먹기위해 다이어트를 한다고 한다. 비상한 머리를 타고나지 못했지만 학업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술생각이 나지 않았을 때는 몸이 죽을만큼 아팠을 때,그리고 임신과 모유수유 기간뿐이었다. 전 생애를 통틀어 그랬다. 그건 역설적으로 술생각이 난다는 것은 내가 적어도 몸상태가 건강했을 때라는 의미가 된다. 오래도록 행복하고 건강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 나이들어서도 술에 지지 않고, 가늘고 길게 음주라이프를 이어가고 싶다. 나는 술을 마시기위해 운동을 한다, 술을 더 마시고 싶어서 식단을 관리한다, 술을 계속 마시려고 잘 자려 한다. 유전자를 바꿀 수 없다면 거기에 도전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그대로 안고 가는 것, 그게 애주가로서의 내 포부이자 미래계획이다.
누군가는 아마 물을 것이다.
"술을 잘 못마시는데 좋아한다면 그 사람도 술꾼이야?"
내 답은 이것이다.
" of course. 당연하지."
very well과 like는 영어에서나 다르다. '잘 마신다' 는 한국말에는 진짜 음주능력과 역량이 뛰어나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주 마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