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사시사철 다양하게 음주를 즐기지만 그래도 계절이 변해가는 시기만큼 술마시기 좋은 때가 또 없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고, 대기가 아주 서서히 식어가는 초여름 저녁, 대중교통에 시달리다가(그 때만 해도 지하철이고 버스고 에어컨은 없어서 무척 더웠다!) 친구들과 만난 뒤 들어간 에어컨 나오는 호프에서 마시던 생맥주의 첫 모금. 천천히 해가 짧아지는 늦여름, 훈기를 머금은 약간은 선선한 공기가 바람으로 살랑- 하고 불어올 때 노점에서 기울이는 청하 한 모금, 빠르게 사위어가던 해가 순식간에 떨어진 초겨울에 곱창에 곁들이는 소주 한 잔,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했다. 계절이 변해가는 모습에 맞춰 주종을 달리하며 음주를 빌미로 다음 계절을 맞을 준비를 했었다. 그 때가 바로 간절기였다.
간절기. 간절기라는 단어의 사용과 쓰임이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나라는 없다고 한다. 한자를 쓰는 한자문화권은 물론 영미권에서도 계절이 바뀌어가는 시기라는 의미가 없을 리 없지만 우리나라처럼 일교차가 크고 사계절이 명확한 곳에서는 계절의 변화만큼 음식, 옷차림, 냉/난방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느끼고 그에 대한 다양한 대비를 한다.
유독 비가 잦고, 그래서 습한 가을이다. 그런 가을에 내리는 비를 요즘에는 가을비라고 하지 않고 가을장마라고 한단다. 가을과 장마라니. 패배한 승리, 소란스러운 침묵, 얌전한 악동처럼 어딘가 어긋나는 조합이다. 온도는 여름에 비해 약간 떨어졌지만 습기를 머금은 대기탓에 끈적하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면 머리는 헷갈린다. 지금은 여름인가, 가을인가, 아니면 간절기인가. 분명 지금쯤이면 맥주보다는 청하나 소주가 땡겨야 하는데 여전히 맥주에 끌리는 이유는 무얼까. 왜 아직도 나는 반팔과 민소매를 입고 있는가. 내 머리는 지금이 아직도 기나긴 여름을 지나는 중은 아닐는지 의심을 한다. 그러나 귀신같이 정직한 내 몸은 피부가 건조해지고, 입술과 발꿈치는 갈라져오기 마련이라 계절에 대한 갈피를 잡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가 알고 있는 가을은 이미 달라지고 있다. 가을은 분명 뜨거운 햇빛과 건조한 공기, 청량하고 맑은 바람과 높은 하늘로 찾아오는 거였다. 나의 전 시절을 거슬러 이미 수없이 많은 시간을 거쳐온 계절과 절기에 대한 관성과 익숙함은 그러나 이제 낯설고 생경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낯선 게 날씨만은 아니다. 얼마전 첫째와 둘째의 체육대회가 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첫째는 중학생이고 둘째는 초등학생이라 나는 학부모의 자격으로 두 번의 운동회에 참석했다.
절기가 뭔지도 몰라서 달력이 아니라 몸으로 계절을 느끼던 시절, 가을은 나에게 '몸을 쓰는' 계절이었다. 그 때의 운동회나 체육대회는 운동능력과 기량을 뽐내는 체육활동이기도 했지만, 동네 잔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8월말 개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는 전교생이 요일을 정해놓고 정규수업이 끝난 뒤 학교에 남아 운동장이나 교실에 모였다. 거대한 마스게임이나 군무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연습종목이 곤봉체조일 적도 있었고, 꼭두각시나 부채춤일 때도 있었는데 학년에 따라 어떤 걸 연습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흐릿하다. 그러나 그 때의 뜨거운 햇빛, 모래먼지가 날리던 운동장, 아이들이 흘린 것임에 틀림없을 반짝이던 동전 몇 알, 말썽꾸러기들을 통솔하던 선생님의 메가폰 소리, 운동회 준비물을 사려는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문방구 앞, 그런 것들에 대한 기억은 마치 어제 일인듯 생생하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높고 새파란 하늘과 북새통을 이루던 학교 운동장, 나의 가을은 그렇다.
요즘 아이들은 군무를 준비하지 않고, 전교생이 모두 집합하는 일도 없다. 그게 집단주의에 따른 개인성의 침해이자 개성의 말살이기 때문이라는건 뒤늦게 알았다. 게다가 새롭게 지어지는 신도시의 학교라는 건 부지를 놓고 교육청과 지역주민의 갑론을박을 거친 끝에 결정되는 부분이 많아서 대체로 운동장이 놀랍도록 협소하다. 그런 운동장에서 뛰는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계주를 관람하니 내가 가서 대신 뛰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주자는 직선코스에서 속력을 최대한 올린 뒤, 코너를 돌 때는 서서히 속력을 줄이며 곡선주로를 돌아야 하는데 좁은 운동장에서는 가속이 붙을 구간도 짧고, 가파른 코너를 돌게 되니 쉽게 속력을 줄일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넘어지는 아이들이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에너지와 파이팅이 넘치는 아이들의 전력을 담기에 운동장은 턱없이 작았다. 그래서 전 학년이 한 운동장에 모이지도 못했다. 학년별로 시간차를 두고 각각 운동장에 모여 소규모 운동경기를 벌이고는 교실이나 강당으로 이동해서 실내 스포츠를 이어갔다. 직접 여러 종목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그런 마당이라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당 한 명의 보호자만 입장할 수 있도록 당부하는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다. 그 가정통신문에는 운동회 당일 소음이 발생할 예정이니, 조금 시끄럽더라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내용도 같이 적혀 있었다. 먼지 날리는 운동장 그늘에 돋자리를 펴고는 학부모가 아닌 사람들까지 구경와서 김밥이며 과일을 깎아먹던 시절의 운동회를 경험한 나에게는 여러모로 반쪽짜리 운동회였다.
비가 오면 취소될 수 있다던 운동회와 체육대회는 잔뜩 낀 먹구름과 흐린 하늘을 이고서도 다행이 비는 오지않아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흐린 하늘과 가을, 그리고 좁은 운동장에 들어찬 소그룹의 아이들과 운동회. 모든 게 내가 기억하는 가을날과는 이질적인 오늘날의 가을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지나치게 더워지고 길어진 여름을 보내고 기꺼운 마음으로 가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견디기 힘들만큼의 더위가 한 풀 꺾이고, 그저 땀이라도 덜 흘리고 길거리를 자연스럽게 활보할 수 있는 계절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말만 들어도 설레는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간절기. 내 몸과 마음은 이미 테라스에서 청하를 마시며 오래도록 지속되는 늦여름의 노을과 정취를 한껏 들이마실 준비를 마쳤다. 그에 못지않게 새롭게 쇼윈도와 휴대폰 쇼핑앱의 홈화면을 장식하는 가을느낌 충만한 니트와 외투도 몇 벌을 마련했다. 그러나 날씨는 내 오랜 관성과 습성을 비웃듯, 간절기를 만끽하던 나를 조롱하듯 가을장마 끝에 맑은 하늘과 10도를 한참 밑도는 기온을 내려주었다. 요근래 며칠 초겨울의 기온을 방불케하는 때이른 추위가 찾아왔다. 나름대로 가을맞이를 한다고 사둔 옷들을 머쓱하게 정리하며 나는 오늘 아침 주섬주섬 경량패딩을 꺼내 입는다.
일상이 선물이었다는 걸 깨달으려면 그걸 빼앗겨보아야 한다. 어린 시절, 한 달 여에 걸쳐 운동회를 준비하며 뙤약볕에서 건강하게 그을렸던 나는 그 때 분명 덥고 힘들다며 운동회 준비에 잔꾀를 부렸던 것 같다. 연일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모른 채, 매일을 계속되던 햇빛과 잠자리날던 파아란 하늘이 축복인줄 모르고 언제고 계속될 줄만 알았던 것이다. 매년 초가을이면 죽을 치고 밤을 즐기던 테라스 넓던 동네의 술집과 흥에 겨운 우리의 체력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년을 위해서 끝없이 비축되는 줄로만 알았다. 경량패딩의 지퍼를 올리며 나는 이제 나의 가을과 이별한 채 새로운 모양의 가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날이 춥다. 너무 춥다.
안녕, 나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