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우리앞에도 낭만이.
1. 대치동에서 학원수업이 끝난 아이를 데리러 간다.
2.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킥보드를 꺼낸다.
3.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준다.
4. 인생네컷을 찍는다.
5. 먹는동안에 네이버웹툰을 보게 해준다.
휴, 아이둘을 데리고 시장에서 떡볶이를 먹기위해 내가 했거나 해야 할 일이다.
우리동네 근처에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하나 있다. 거길 가면 나 어린시절, 일주일에 한두번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엘 갔던 생각이 그렇게나 난다.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G시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그 단지들 사이에 조성된 상업지구에도 막 고층빌딩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던 때에, 그럼에도 남겨졌던 전통시장이었다. 키재기하듯 뻐기며 높아져가만 가는 고층건물들 뒤켠에 알록달록한 파라솔을 맞대고 주르륵 줄지어 늘어선 노점들은 30여년전,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매우 독특한 정취로 다가왔다. 엄마에게는 익숙한 재래시장에 신도시를 얹은 그 느낌이 신선했을테고, 반대로 내게는 익숙한 아파트 사이로 살아남은 외갓집 앞 5일장같은 전통시장이 생경했다.
우리 가족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필수적인, 그러니까 ‘삶’ 을 지탱해주는 많은 것들이 그 시장에서 나왔다. 지금까지도 제철음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엄마는 거기서 쑥이며 냉이, 옥수수며, 꽃게같은 식재료를 정성껏 골랐고 그게 우리가족의 끼니가 되는 걸 봤다. 국민학교 3학년, 내 인생처음으로 가진 빨간 일제 보온도시락이나 타파웨어, 코렐 같은 당시로는 귀했던 수입품을 엄마는 시장에 가면 수입품 상가에서 봐뒀다가, 가끔 들러 하나 둘 씩 모았더랬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창고대개방을 하던 아동복집에서 엄마는 계절이 지나면 입지 못할 원피스나 외투같은 것들을 한사이즈씩 크게 사서 보관했다가 다음해 나와 동생에게 입혀줬다. 나는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말라서 오래도록 그 집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땐 시기적으로 백화점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고급화를 진행하며 소비를 진작할 때라 백화점에서 셔틀버스도 운행했었다. 그래서 엄마랑 셔틀을 타고 백화점도 가끔 갔었는데 나는 확실히 시장쪽을 더 재미있어 했다.
지금 우리동네의 그 시장은 그래서 영영 ‘이사온 사람’ 인 채로 이동네에 이방인으로 머물 것 같은 나에게 과거를 선물하는 곳 같았다. 사람 사는 곳 다 거기서 거기고 부자라고 하루에 다섯끼를 먹는 것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거칠고 맛없는 밥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아서일까. 아니면 내 과거에는 흔적조차 없는 이 동네에서 내 발자취를 어떻게든 남겨 나중을 기하는 거라 표현해야 맞을지, 하여튼 매주 시장엘 갔다. 꼭 아이들과 함께였고 가끔은 남편도 꼈다. 양재천을 산책하고 귀가길에는 그 시장에 들러 꽈배기며, 과일, 전통방식으로 만든 두부같은 것들을 사면, 나도 어쩌면 살림을 잘하는 주부, 알뜰하고 야무진 아내가 된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우리엄마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 아이들에게도 엄마와 다니던 ‘시장가는길’ 에 대한 추억하나쯤은 주머니에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고, 아이들은 일절 협조해주지 않았다. 걷길 싫어하고 대형마트에 익숙한 아이들이 재래시장을 좋아할 리 없었다. 이리저리 설득을 해야하고, 하나를 얻기위해 하나를 주는 거래를 해야하는 나들이는 이미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열개를 얻기위해 하나를 준다해도 어차피 다 내주머니에서 나갈 ‘돈’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얻고자하는 낭만이란 실은, 허울좋은 돈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러면 몽글몽글해지려던 마음도 금세 시멘트 바닥처럼 차게 식었다.
얼마전에는 남편과 양재천 근처의 한 맥주집엘 갔다. 남편이 내가 딱 좋아할 것 같은 분위기라며 같이 가길 원했던 그 곳은 내가 숱한 20대의 밤을 보냈던 홍대앞의 맥주펍과 매우 흡사했다. 비슷한 분위기에 그렇지 않은 가격. 늘 가난한 대학생이던 나는 국산 병맥주를 2,500원에, 기본안주인 마른멸치와 땅콩을 무한으로 먹을 수 있던 그 곳을 사랑했다. 만원을 가지고 가서 값싼 맥주 네 병에 고추장 찍은 멸치를 씹으며 나는 결코 값싸지 않은 꿈을 꿨었다. 그 때의 나와 시간들, 그곳에서 반짝이며 수많은 밤을 보내던 젊거나 어렸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간걸까, 를 이야기하며 13000원짜리 수입 병맥주와 부드럽게 씹히던 한치를 먹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비용으로 남편과 나는 10여 만원의 금액을 지불했다. 물론, 홍대에서의 기억은 15년 전의 일이고, 시간은 흘렀고, 물가는 올랐다. 그마저도, 실은, 맥(脈)커터, 맥브레이커, 남편 덕에 내가 얕게 오르던 술기운으로 비로소 거슬러올라가던 20년 전 홍대 펍 입구쯤에서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칼차단 당했다.
여러모로 방해받고, 돈을 지불해야 누릴 수 있는 낭만이 개운치 않은 뒤맛을 남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의 낭만이 방해받았다고 느낄때마다 내인생이 현실에 쫓기듯 각박하고 벅찬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은 그게 아니어도, 내가 낭만으로 지정한 행위가 방해받을 때마다 내 마음이 그렇게 여유없이 반응한다. 그렇다면, 이대로 나의 낭만따위는 사치로 돌리거나 배제해버린 채 현재에만 매달릴 것인가.
그렇게 행복을 유예하기엔 이 시간은 손쓸 수 없이 흐르고 흘러 금세 과거가 되어버리고 만다. 나처럼 공감각적인 계절의 맛과 멋, 일상의 변화와 흐름앞에 손쓸 수 없이 끌려다니며 감동하는 인간에게 가당치않은 일이다. 시간앞에는 누구나 하릴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이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해서 부러 찾고 살펴서 얻는 낭만은 이미 낭만은 아닐 것이다. 엄마와 시장엘 가던 날도, 홍대 앞 바에서 무한한 우주를 안주삼던 시간도, 그저 사건없는 평범한 하루를 흘려보내는 과정중에 있었던 하루의 조각들이었다.
흘러간 과거가 순진하고 무구하며, 완전무결하게, 자본주의의 논리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은 나에게 없다. 나의 낭만에는 가격이 없는 탓이다. 낭만을 샀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 그건 이미 통속이다. 바람이 시원해질 계절의 커피 한 잔, 노을이 내리는 시간의 저녁산책, 샤워 후에 꺼내마시는 맥주 한 캔, 남편과 주고받는 시덥지 농담이나 아이들의 귀여운 말실수, 이미 내 옆에는 많은 낭만들이 내려앉아 있는지도. 오늘의 일들에게 기꺼운 마음을 보내야겠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강요받은 하루가 아닌, 그저 기억되는 다정했던 낭만이 되진 않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시장블루스는 당분간 연주를 멈추겠지만 나와 아이들, 남편이 누릴 풍류와 낭만의 정처를, 이 동네에서도 쌓여가는 오늘안에서 찾아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