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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Aug 31. 2024

자랑의 미학

자발적 금욕, 내가 명품을 끊은 이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명품매니아였다. 매니아라는 것의 의미를 ‘well’ 로 해석하자면 금전적인 부분을 이유로 매니아라고 하기 힘들어지지만 ‘like’ 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매니아가 맞다. 그간 명품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내 품안에는 항상 위시리스트가 있었고, 도장깨기하듯 그것들을 하나씩 모으면서 위시리스트를 지워갔다. 그렇지만 하나를 지워도 세 개, 네 개 아니 그 이상이 새로이 위시리스트에 추가되었으니, 평생 사재껴도 다 지우지는 못할 양이었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면서 명품을 샀고, 실은 특별하지 않은 날도 명품을 사면 그 날은 특별한 날이 되는 거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가지, ‘시발비용’ 이라는 명목으로 종종 명품을 사들였다. 스트레스받거나 화나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소비로 감정을 다스리면 그렇게 효과가 직방이었다. 이래저래 이유와 명분을 갖다 붙이면서 명품을 사다보니 만족스러운 것도, 실패한 것도 있었고, 그래서 취향이 생겼고, 원칙이 생겼다. 내가 명품을 사면서 고수하는 원칙 중 몇 가지를 얘기해보자면,


1. ‘금’ 은 명품브랜드를 선호하지말자.

브랜드 값이 포함된 금은 실제의 가치에 비해 너무 부풀려진 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실속이 떨어진다. 금은 종로나 동네의 금은방에서 사자.


2. 그 시즌에만 출시되는 상품보다는 매년 나오는 제품이나, 클래식 라인을 위주로 사자.


3. 아울렛 매장을 운영하지 않는 브랜드를 구매하자.

아울렛이 없는 브랜드, 이를테면 샤0, 루이00, 디0, 고야0 같은 브랜드들이 상품의 감가가 덜하므로, 이런 브랜드들을 위주로 사자.


4. 유명템은 이유가 있다.

3초백, 국민명품은 흔해서 별로라는 이들도 많지만, 그것들을 사본 결과, 유명한 건 이유가 있다. 흔한 아이템이 아니라 ‘기본아이템’ 이라고 해두자.


여기까지, 나는 명품을 좋아하고 많이 사보았단 얘기를 길게도 써보았다. 그런데, 이동네로 이사를 오고나서 명품에 대한 내 철학에 미세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평생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물욕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간 물욕이 시들했던 때는 첫째 임신 후 입덧을 했을 때랑, 코로나와 노로바이러스로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했을만큼 몸이 아팠을 때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이사를 왔다는 이유로 물욕이 사라질 리는 없을 터,  곰곰이 생각해보니 명품의 소용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고가의 시계를 차고, 유치원 하원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오면서 돈을 들고가도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다던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마트에서 장본 물건을 그 브랜드의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넣는 이들을 보면서 이동네에서는 명품이 특별한 날이 아니라 일상을 같이하는 물건, 그야말로 ‘물질’ 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내 특별한 날을 빛나게 해주고, 아무일 없는 일상도 기념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었던 물건의 ‘가치’들이 여기서는 그저 물건이었달까. 가방은 소지품을 담는 물건으로, 시계는 시간을 보는 물건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렇게 흔해진 ‘물건’들을 보니 우리엄마가 명품을 살때마다 내게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얼매나 내세울 기 없으모, 물건담는 가방을 자랑하노. 쯧쯧”


그때는 엄마에게 내가 비싼 가방을 사는 이유는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이라며  반박했었지만 이제와서는 갑자기 내세울 게 없는, 자랑할 게 없어진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사실은 알아봐주는 사람이 누구보다 필요한 게 명품소비였나 보았다. 그러니까, 자랑이, 하고 싶었던 거였다. 생각해보니 자랑을 자존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용해왔던 것 같다. 자식자랑은 돈내고 하라고 했고, 자랑끝에는 불이 붙는다 했다지만 그건 대놓고 ‘나 잘났다’ 고 허세를 일삼는 하수들의 잘난척이다. 나는 그런 하수와는 구별되는 티안나면서 은근하고 그윽한 자랑으로 소비력과 취향을 드러내는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 난 소심한 관종이었던거다. 내가 스스로 꺼내놓고 남들이 알아봐주길 원한다는 점에서, 하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자랑거리가 필요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남이 알아봐주는 타인과 구별되는 나의 자랑거리나 재능이 없다는 얘기였다. 특히,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일 때나 가능한거였다. 나보다 너무 많이 잘난 사람은 경외의 대상이, 나보다 너무 많이 못난 사람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게 인간의 간사한 속성이다. 나와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는 이들에게 하는 자랑이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와 여러모로 수준이 비슷하고 생각도 비슷한 이들 사이에서 적절한 부러움과 사소한 질투를 불러일으켜 잠깐이나마 내가 살짝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는, 그게 바로 자랑의 속성이고 그 수단이 명품이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다가는 영영 스스로 발전이라는 건 해보지도 못하고 우물안에 갇힌 개구리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그깟 명품 몇개 사는걸로는 전혀 주목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나의 아이덴티티와 오리지널리티를 찾을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소비로 휘발되어버리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쌓이는, 발산이 아니라 수렴되는, 그런 무언가가 말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응달과 양달을 겪었고, 삶과 사람들이 내게 한 조롱과 내게 베푸는 호의에도 흔들림이 없다던 불혹의 나만 헛된 자랑의 속성을 알고 있는가, 하면 답은 ‘아니오’ 다. 이제 갓 10대 초반인 첫째도 다르지 않았다. 이사오기 전 동네에서 온갖 자랑을 흩뿌리던 첫째 아이를 보며 인간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자랑이 먹힐 데‘ 를 찾을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사는 시골이나 도시에 사는 수많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많이들 다닌다. 강남이 이땅에서 가지는 의미와 속성에 대해 아이에게 설명해 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랬다. 이전 동네에서 갓 10살이던 첫째에게 학교나 학원에 이사가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괜한 말로 수업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걸 원치 않았고, 또 학원에서는 선생님들이 내 아이가 동네를 뜰 아이라는 걸 아시면 덜 신경을 쓸 수 있겠다는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 이사가 한 달 넘게 남은 시점, 아이가 다니는 태권도 학원 관장님을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그 때 100m 밖에서 특유의 사람좋은 미소로 “어머님, 강남으로 이사가신다면서요!” 라며 환하게 웃던 관장님의 얼굴을 보며 뒷걸음질쳤다. 맙소사, 이미 첫째는 궁금해하는 사람과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 알려야하는 사람과 알릴 필요가 없는 사람, 축하해줄 사람과, 질투할 사람, 그러니까 한마디로 온동네에 쩌렁쩌렁 다 알리고 다녔던 거였다.  


그렇게 숱한 자랑과 함께 이사온 첫째, 그녀는 새롭게 이사한 동네에서 그저 본인은 ‘학생1’ 이며, 본인이 가진 그림이라는 취미와 약간의 재능이 그저 평범하다는 사실에 얼마간 상심했고 적잖이 당황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고학년이 될 수록, 구체화된 꿈을 가지고 내세울만한 취미생활을 가졌다. 여전히 그림을 잘 그리지만 누군가가 호기심이나 부러움을 살 만한ㅁ 특별한 분야는 아니었다. 주변에는 흔하진 않으나 골프나 승마를 하는 친구가 있었고,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아이도 있었다. 오보에나 첼로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넓은 평수에 사는 아이도 있더란다. 모든 영역에 걸쳐 자신이 평범하단 걸 깨달은 아이는, 6학년이 된 요즈음 여느 아이들처럼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자랑을 하기 위한 고민은 아닐테지만, 자랑이란 분명 자존감을 이루는 수많은 조각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도 알아봐주는 이 없는 재능과, 인정받을 곳 없는 재주만큼 공허한 것도 없다.아이도, 나도, 그래서 자라고 있다. 이제서야 내 마음속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자발적 금욕을 택한 나나, 평범함과 특별함 사이에서 저울질을 열심히 하며 그 어딘가에 균형점을 마련할 첫째 모두에게 하여튼 강남이라는 동네는 좋은 동기를 주었다.


나는 그림과 운동을 시작했다. 도 써본다. 언젠가는 해보고싶었지만 항상 소비에 밀려 뒷전인 것들이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한만큼 내가 얼마만큼 받아들여 나를 채울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물질을 좇아 영혼없이 내달리던 내 정신이 나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그린라이트다. 앞으로 좁더라도 깊은 우물이 되어 언제든 길어올릴 수 있을 내 양식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성공이라 믿는다. 내가 그렇듯, 아이가 특별해지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의 자존감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인간이기를, 남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이용해 ‘자랑을 일삼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특별함으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기를 바란다.  


아참, 그러면 이제 명품을 사지 않는가, 명품매니아의 지위를 버렸는가, 아예 욕구를 거세했는가, 하면 그렇진 못하다. 여전히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품위를 유지하느라, 가끔씩 올라오는 극한의 분노를 다스리느라 간간이 명품을 소소하게-정말 소소하다- 사들이는 나를 보며 우리엄마는 말씀하셨다.


“개가 똥을 끊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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