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rden Aug 24. 2024

우울의 연대는 가능한가,

도와주지 않을거면 돌도 던지지 말자

동네에 아는 언니가 하나 있다. 태생이 백조같은, 우아한 사람이다. 악기를 전공했고, 뼈대가 가늘고 흰피부를 가진 언니는, 목소리마저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렇다고 힘아리없이 그저 가느다랗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강단이 있어 보이는 짙은 눈썹과 각진 턱이 흰피부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주변에 휘둘리거나 흔들릴 것 같지않고 주관이 뚜렷할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고상’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이 언니가 아닐까 싶은, 나에게 없는걸 가진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같은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만났다. 입주민 카드키가 있어야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데, 카드키 한 번만 부탁드릴 수 있겠냐고 옆사람이 물어왔는데, 그게 언니였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우리는 애주가가 애주가를 알아보듯,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알아보듯,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았다. 언니는 카드키 빌려준 은혜를 부득불 갚겠다며 커피를 샀고, 우리는 끊길 듯 가늘고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 받으며 얼떨결에 안면을 텄다. 그리고는 각자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가까워졌고, 서로 접점이 전혀 없다는 게 접점이 되어 친해졌다. 그러다가 사는 동네가 같다는 것이 실로 비슷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냐는 서로의 바람대로 생각보다 더 많은 교집합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 남편의 업계, 아이들의 터울, 소비패턴 등 대화를 거듭할수록 우리의 다른점만큼이나 같은 점도 계속해서 나왔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더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울증 동지’ 라는 점이었다. 처음 서로를 알아본 그 촉도 아마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더이상의 접점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가까워졌었는데, 또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나는 타인의 우울과 슬픔을 “왜” 라는 말로 자르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 왜냐고 묻는 것만큼 의미없는 질문도 없었다. 그 답은 나도 모르니까. 다만 “어떻게”만 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고, 누구든 빠질 수 있는 늪에 왜 빠졌느냐, 라고 묻기보다 어떻게 나올 것이냐, 혹은 나오게 되었느냐, 라고 물어주길 항상 바랐었다. 언니도 아마 같았을 거다.


남편의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하면서, 언니는 가정에 대한 남편의 무심함에 비례해 많아지는 수입의 액수를 보면서 남편에 대해 체념하기 시작했다. 첫째와 아홉살이나 터울을 두는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 이유도 정처도 없는 우울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아기를 두고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자신을 자책도 하고 다그치기도 했지만, 불현듯 솟아나는 그런 마음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던 언니는 그걸 다룰 줄 몰랐다. 언니가 돈을 들고가도 아무에게나 가방을 주지 않는다는 명품브랜드 에르** 매장에 발을 들이게 된 시점이 그즈음이라고 했다. 누가들으면 마약이나, 유흥쯤 되는 줄 알 표현이지만, 끊을 수 없다는 점만 두고 본다면 ‘발을 들였다’ 는 표현이 그다지 부적절한 건 아니다. 처음에는 돈을 쓰는 재미, 정확하게는 돈을 쓰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즐기는 데 재미를 느꼈으나, 진짜로 그리로 발길이 향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돈을 쓰고 소위 말하는 ‘실적을 쌓으면’ 말상대가 되어주는 셀러가 있다는,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고 언니는 얘기했다. 부족할 것 없는 네가 왜 그런 병에 걸렸냐는질문을 친구로부터, 마음이 약해빠져서 그렇다는 타박을 부모님에게서, 자기연민이라는 충고는 남편이 했을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조언을 반영해 이미 병원도 다니고 있었다. 셀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지적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므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상대에게 내 얘기를 아무렇게나 두서없이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는 기분과 그 때 느낀 상쾌함에 대해 언니는 얘기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지 못하던 언니의 마음은 언젠가부터,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스스로 자체검열을 거치도록 만들었고, 그러다 종내는 입을 닫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종잇장만큼의 두께도 안되는 매장직원과 손님의 관계, 돈을 안쓴다면 성립자체도 되지 않았을 관계라서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이야기하던 언니의 그 조용함과 차분함이 실은 우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타인의 인생과 굴곡, 상처에 대해 내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언니를 보면 나도 모르게 늘 저 사람에게도 인생의 고난이란 게 있었을까, 하고 속단했던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네가 왜?”

“다 마음먹기에 달린거야.”

“그거 자기연민이야.”

여기로 이사온 후, 심한 우울감을 호소하는 나에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내린 처방 3종세트다. 이미 언니도 다 들어보았을 그 얘기들을 나도 이미 들었다. 방구석 전문가들은 겪어보지도 않고 환부는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면서 쉽고 빠르게 처방을 내렸다. 전부 예상가능한 답들이었지만, 예상가능해서 더 상처였다. 그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아픔을 이런식으로 외면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언니의 조용한 고백에 어떤 첨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들어주는 게, 가장 대단한 위로였을거라고, 아직까지는 믿고 있다.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마음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털어놓고서야 내가 ‘관계지향형’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존재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는 사람이었다. 가장 가깝다 믿었던 친구들도, 우리엄마도 모르던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를 이루는 근간, 내 사람들, 소중한 추억, 삶의 질서와 생태계를 모두 전 동네에 두고온 나는 뿌리가 잘린 채 옮겨 심어진 식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갔다. 이사를 오고 얼마뒤 복직한 회사에서 나는 내가 동료들과 함께 발디딜 곳이 없다는 절망을 마주해야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다야? 그게 이유의 전부야? 라고 묻는 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나조차도 정말 그것때문에 이렇게 매일을 젖은 솜처럼 시간에 질질 끌려가는 건지, 몸을 일으켜 씻으러가는 것도 어려워 겨우겨우 출근을 하는건지, 나만 보고있는 아이 둘을 어쩌자고 방치하는건지, 왜 그러느냐고 뭐가 문제냐고 다그치는 남편 앞에서 입을 꾹닫고 아무말도 안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왜’ 냐는 질문이 하등 의미없다고 느낀 것도 이때였다. 왜인지 정말 모르는 나에게 왜인지 묻는 건, 그때로서는 물에게 왜 너는 물인지, 산에게 너는 어쩌다가 산인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의 고통에는 눈감고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는 한없는 인류애를 발휘한다. 어떤 사람은 옆집에 사는 사람의 큰 비극보다, 얼굴도 모르는 타국의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매달 기부를 한다. 자녀의 친구에게는 비밀로 부치는 일타강사와 학원의 정보를 인터넷에서는 지식자랑하듯 전시하기도 한다. 친한 친구에게는 숨기는 피부과 시술 정보를 인스타그램에는 올린다. 그리고 한편, 사람은 그어떤 위로를 건네는 친구보다 같은 불행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위대한 위로를 얻는다.  나도 친한 친구와 믿었던 가족들에게 받지 못했던 나에 대한 해석과 위로를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서 얻었다. 마치 언니가 얼굴만 아는 셀러에게 평생 친구에게도 할 수 없었을 얘기를 쏟아낸 것처럼. 그게 그 사람이 나빠서도 어리석어서도 아니고 인간이 가진 지나친 양면성과 모순 탓이라는 걸 살면서 느낀다. 그런 건, 어떠한 논리나 이론으로 설명되는 감정이 아니다.


그런 공식이나 해석으로 성립하지 않는 게 인간의 마음이니까,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거나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걸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도 맞지 않다. 그 둘은 인과관계가 없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히나도 없으면 그게 전부가 되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싼다, 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실은, 돈은 전부가 아니니까,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을 싸니까 걸리는 병이 우울증이지 싶다. 내 삶에서 내가 조연이 될 수는 없다. 누구나 주연이다. 그건 필연이다. 다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시점에는 일단은 먹고 살아야하니까 거기에 열중했던 거고, 지금의 사람들은 ’먹고사니즘‘ 이라는 1차원적인 문제는 웬만큼 해결이 되었으니 다들 최대의 관심가 자기자신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내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면 어딘가에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던 결핍이나 불안, 미완성같은 것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거나, 물밀듯 밀려오거나, 둑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누구나가 하는 경험이다. 다만, 신장이 나쁜 사람, 허리가 안좋은 사람, 심혈관계 질환자처럼 마음에도 면역이 약한 사람이 있다. 우울증은 여느 질환이 그러하듯 그런 사람을 귀신같이 찾아 숙주로 삼고 뿌리를 내릴 뿐이다. 다채로운 인간의 양면성만큼이나 어떤 논리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니, 돕지 못할 바에야, 왜, 냐는 말로 돌도 던지지 말아주시길. 인간의 다채로움으로 말미암아 우울의 연대는 불가능하겠지만, 또한 그 다채로움으로 인해 우리는 몇가닥의 가느다란 끈으로 살아갈 수 있을테니.

이전 02화 관찰자의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