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것을 정말 원했는지는 가져보면 알게 된다.
드라마 <안나>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곳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곳이었는가는 가 보면 알게될 터였다. 나는 서울 바로옆에 붙어서 서울의 기능을 보조해주는 작은 위성도시 G시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출생은 부산이었지만, 그 곳에 관한 기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겨져 있으니 내 고향은 G시가 맞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서울에 잠깐 살았는데,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첫째를 임신하면서 G시 타령을 하는 나에게 남편은 ‘촌스럽다’ 고 했다. 이북에 두고 온 고향이 있는 것도, 상전벽해해 이제 형체도 없는 옛터에 살았던 것도 아닌데 지하철로 30분인 옛동네에 왜그렇게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여기서 남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진다. 남편은 지금은 쇠락했지만 한때는 항구로 유명했던 지방의 한 바닷가 도시 출신이다. 유년시절을 모두 그곳에서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오는 바람에 거길 벗어났다. 떠난 것도, 헤어진 것도 아니고 ‘벗어났다’고 그는 표현했다. 그는 정말 도시남자인 것이, 곤충이나 개구리알채집도, 밤수확도 한 번 해보지 않았단다. 그 모든 걸 다 해본 서울 및 수도권 사람인 우리는 아랫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시골사람’ 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로 그는 차가운 도시남자다. 그래서일지, 아니면 목표지향적인 성향때문일지 그는 유독 회귀본능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에게 고향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곳이고, 향수병은 현재를 발목잡는 어리석은 감정소비쯤이었다. 앞을 똑바로 보고 달려가는 것, 달려가서 당도한 뒤에는 또 바라볼 앞을 정하는 것이 그가 인생을 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드라마<안나>에서 안나가 얘기하는대로 ‘원하는 것은 다 가지는’ 게 또한 남편의 방식이었다.
그래도 역시 육아란 앞만보고 내달리는 매정한 차도남의 발목마저도 잡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출산과 거의 동시에 G시로 다시 돌아왔고, 그가 이루고픈 목표에 따라 몇차례 이사를 다녔다. 그 작은 규모의 도시에서도 집을 살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방법과, 선택할 수 있는 몇몇가지의 대체재와, 집을 매수할 때 따져봐야 하는 우선순위들이 꽤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결혼후 G시에서 머무는 10여년 동안 첫 집과 두번째 집은 그가 공을 들이고 또 들였던 경매를 통해 입주했었고, 마지막으로는 일반공급을 하는 한 아파트의 청약에 운좋게 당첨이 되었다. 우리는 비로소 대출을 다 갚으며 입주했다. 은행과 나눠가지지 않은 온전한 우리의 첫 집. 그래서 나는 거기가 우리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에 없던 둘째가 태어나 세 돌 쯤 될 무렵, 새로 입주한 신축 아파트 주변의 상가들이 제법 모양을 갖추고 나무도 공원도 이제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풍요로운 동네가 되어갈 무렵, 대뜸, 밑도끝도 없이,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우리 강남으로 이사가자.
-왜?
그의 문장이 한마디였으므로 나의 대답도 한마디였다. 그렇지만, 왜냐는 한마디만 필요했던 이유는 정말 왜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 내 집이 있다. 친정부모님이 계시고, 내 직장은 G시 바로 옆의 S시였으며, 아이들은 여기서 잘 크고 있다. 남편의 직장이 강남이긴했지만,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직장이 강남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촌스럽다는 그의 말대로 교육에 관한 내 지론은 어디서든 할놈은 한다는거였다. 내가 거기 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남편은 다들 돈을 벌면 강남엘 간다고 하고, 돈을 벌기위해서도 강남엘 간다고 하니, 우리도 가보자,고 얘길했다. 대체 거기에 뭐가 있길래 다들 거길 가는지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보자고. 그렇게 얘길 꺼내는 그의 태도가 여행지 고르듯 딱히 대수롭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로서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어서,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남에는 그의 일자리가 있었다. 집값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오른다고 봤을 때, 가장 많이 오를 곳은 당연히 강남이었다. 부동산에 관심많은 그가 이 점을 간과했을 리 없다. 대학동기,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 지인들중 다수가 거기 살고 있었고, 어차피 그에게 고향이 주는 그리움이나 안도감같은 정서가 없을 바에야 어디나 다 타향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가 이사를 구체적으로 추진하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된 것이 친한 대학 동기의 말 한마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아직도 거기 살아?” 라는 그 한마디. 비아냥이랄지, 빈정거림일지 그 둘 다 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한마디가 그의 가슴 속 저 밑바닥에 자리한 잠자던 자존심을 건드린 것만은 확실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사날짜만 남았다. 남편의 특기이자 장점이었다. 살던 집을 매도했고, 추가로 대출을 받았고, 집을 알아봤고, 계약했는데 이 모든 일들이 반쯤 정신줄을 놓은 상태에서 진행됐다. 그 때 나는 사실 수억에서 수십억에 달하는 집을 사거나, 가슴에 늘 품고다니는 사직서를 제출해버리거나 하는 인생을 좌지우지할 큰 결정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살짝 미쳐있을 때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애초의 내 생각대로, 내가 거기에 이사갈 이유란 전혀 없었지만, 남편은 어차피 결심을 한 일이라면 해내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있는 선택권이란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 밖에는 없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준비를 했으며 이제 구체적이고 잡을 수 있는 목표가 되고 보니, 나도 궁금해졌다. 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왜 다들 거길 가고 싶어 하는지, 내가 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남편은 정말 거기를 원했는지 가보면 알게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강남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