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도’ 장소에 담긴 의미를 깨닫다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그때에 사도들이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깝고 안식일에 가도 되는 거리쯤에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그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계속 머물러 온 방이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 필립과 토마스, 바돌로매와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독립당 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도 함께하고 있었다.(새한글성경, 사도행전 1:12-14)


제자들의 기도방식은 당시 유대 전통을 깨뜨렸습니다. 무엇보다 이 기도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기다림의 불안을 극복하는 동력이자, 기다리는 자라는 존재의의를 잊지 않으려는 두려움의 표현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그들이 불안과 두려움에서도 기도를 선택했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그 선택에서 어떤 강인함도 읽었습니다.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다락방이라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비밀스러운 곳으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배어있습니다. 둘째, 기도에 자발적으로 적극성을 띤 것입니다. 즉 예수가 이번에는 ‘기도하라’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셋째, 열두 제자에서 한 명이 빠졌지만, 오히려 그 외연이 확장되었다는 점입니다. 결핍이 새로운 채움으로 전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선생 예수를 따르던 여성과 예수의 가족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장소와 구성원의 변화가 데오빌로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하고 나니 자신이 의아해했던 점이 순조롭게 이해될 것 같았습니다.


데오빌로는 의욕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더는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다락방’에서부터 막혔습니다. 비밀장소이고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다락방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의 전통과 다른 방식으로 기도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기 지식으로는 더 깊이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데오빌로의 경험으로 보면, 가끔 외출할 때, 우연히 한낮, 오후 일정한 시점에 광장에서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이들을 만난 적은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아미드’라는 기도 방법이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은 대체로 일정했습니다. 그들이 뭔가 정해진 법을 잘 ‘지켰다’라는 말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정해진 기도문을 큰 소리로 내뱉으면서도 뭘 했다는 말을 빼놓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해진 말만 했습니다. 지루했고 단조로웠습니다. 암송이라서 누가 하더라도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때도 많았습니다. 그게 자신이 경험한 기도 전통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조금씩 이어가다 보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기도에 관심 있느냐?’라는 듯이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데오빌로는 바로 답하기 전에 먼저 놀란 마음을 감춰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데오빌로 자신이, 자신 같은 혼종 이방인에게 유대 기도문에 대해 궁금하냐고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전통적으로 위정자들의 화려한 복장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옷이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여러 사람이 둘러서 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당황했는지 이 뜻밖의 물음에 데오빌로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던 어떤 사람이 데오빌로에게 뭔가 적힌 파피루스 파편을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이것도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데오빌로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그랬습니다. 사실 데오빌로는 그들의 글을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데오빌로를 어떻게 알고 그 파피루스는 주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데오빌로 주변에는 누가 낭송해주지 않으면 글을 알 수 없는 이들도 꽤 많았습니다. 거절할 틈도 없이 그날 파편 하나를 의아한 마음으로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와서 다시 읽을 만큼 그리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대로 위층 구석방 기호품 보관소에 던져두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자기도 모르게 오늘 지금 그 기억이 났습니다. 찾으러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민이 깊었는지 몸이 좀 나른해지는 것 같아 좀 머뭇거렸습니다. 배가 좀 출출한 걸 보니 점심때인가 싶었습니다. 다시마스가 떠난 지 이제 겨우, 방 두 개 정도 청소할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간 듯싶었습니다. 그 여시종 로데가 문을 노크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무슨 일?”
“아니 다시마스가 떠나면서 가끔 주인님 방을 한번 들여다보라 해서요. 별일 없으신가 하고요”


데오빌로는 속으로 세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가볍게 웃었습니다.


“별일은 없는데, 혹시 이따 한 번 더 들를 생각이면, 위층 저 끝, 구석진 방에서 글 하나 찾아다 주면 좋겠어.”
“네 그러죠. 무슨 책이죠?”
“아, 싯두르 파편. 아나? ”
“그건 기도 모음 책인데요, 우리 유대인 사제들이 주로 쓰는, 근데 주인님이 어떻게 그 기도문을……”

“아, 내가 잘 알거나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지금 뭘 좀 고민하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결이 안 돼서 답답했거든, 근데 그 파편이 생각나서 갑자기 궁금해져서…”

“아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점심은 아직 이르긴 한데, 혹시 출출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얼굴을 뵈니 아침 안 드신 표시가….”


로데는 늘 경쾌합니다. 뒤돌아 나가려는 모습을 보면서 건강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것이 기특했습니다. 무엇보다 내면도 튼실한 아이라는 생각에 괜히 뿌듯했습니다.


“아, 로데. 혹시 다락방에 관한 이야기 들은 적 있어?”

데오빌로는 오래 고민했던 그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내 로데를 불러 세웠습니다. 도대체 그 다락방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데가 들어오자 그 질문이 밖으로 뛰쳐나온 것뿐입니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로데는 나가려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아, 알아요.”


분명 나는 어떤 다락방인지, 누구네 위층인지, 어디인지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로데는 바로 ‘안다.’고 답했습니다.


“안다고?”

“넵.”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다락방을 안다고 하니 궁금한 것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락방이 도대체 어떤 곳이야?”


로데의 말은 이랬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지난번 처형된 예수와 ‘다락방’이 하나의 사건처럼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전설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옛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엊그제 같이 선명하다고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데오빌로도 대략 아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평소에는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어질 로데의 말이 궁금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랬습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 다락방 아래 매여있던 한 마리 나귀의 입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결론적으로 나귀의 입에 담긴 이야기에서 그 다락방은 ‘기억의 헤테로토포스’였습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전 숭고한 의식이 진행되는 ‘검은 안식’ 같은 장소 말입니다.


선생 예수와 열두 제자가 그 다락방에 모인 것은 처형되기 전날이었습니다. 나귀는 그날 그곳에서 저녁 식사가 있었고, 거기서 약간 우당 탕탕하는 소란이 있었다가 이내 고요해졌다고 했습니다. 식사는 옛 조상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에서 먹었던 빵과 음료를 상징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새겨진 의식이죠.


그런데 그날 또 아주 의아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문밖에서 지루하게 쪼그려 앉아있던 나귀는 젊은 사람들이 물을 들고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데오빌로는 그 더러운 발을 씻겨주었냐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전혀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날 선생은 오랜 시간 말을 했습니다. 그가 힘주어 말했던, 그날 주제가 바로 ‘기도’였습니다. 선생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기도하면 지내라’라는 것입니다(참조. 요 16~17장). 그저 ‘요구하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란 ‘관계 다짐’이며, ‘배려와 환대의 선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나귀는 그날 이상한 모습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제자 한 명이 씩씩거리며 화가 가득 나서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배신’이라는 말에 자기 행위가 들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은 감람산에서 잡혀간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은 잊어서는 안 되는 배신의 기억이 새겨진 곳이었습니다.

로데가 전해준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데오빌로는 그 다락방이 그들에게 참 아름다운 장소였을 것 같았습니다. 잊지 못할 선생과의 추억이 서린 곳 말입니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그 다락방이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아직 그들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많아 위험한 장소라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다른 의미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로데의 이야기는 데오빌로의 궁금증을 더욱 키웠습니다. 혹시 그날 받은 파편이 그들의 마음을 담은 것은 아닌지, 그리고 다락방이 단순한 추억의 공간이 아니라 어떤 개혁을 위한 전초기지 같은 의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롭게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다락방은 전통과는 다른 기도의 방식이 일어나는 장소였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기억을 공유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는 곧 그들에게 어떤 개혁과 실천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데오빌로는 아예 이 다락방을 다음 세 가지 새로운 의미로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 다락방은 역사기억과 교육, 그리고 배신의 토포스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장소에서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모였습니다. 하지만 이 장소는 선생과 제자들이 일상을 보냈던 공간이면서 배신과 실패의 추억이 뒤엉킨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소에서 그들이 ‘기도’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장소는 이제 그날과는 전혀 이질적인 곳이 되었으며, 새벽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듯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기다림, 그것이 그들이 다락방을 떠나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다림이라는 행동은 단순히 다락방에 얽힌 감동적인 전설로만 설명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그 다양한 참여자들이 이 기다림을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도 감지했습니다. 이 공간에서 선생이 그들의 발을 씻겨준 사건이 그랬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 그리 유쾌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기꺼이 정성껏 그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느꼈습니다. 선생과 그들 사이, 그들과 그들 사이 어떤 경계가 해체되어 버렸다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했습니다. 그날부터 이 기도공간은 신분과 계층의 경계가 해체되는 섬김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다락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변혁의 상징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락방에, 평소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과 선생 예수의 가족도 함께 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자들과 동등하게 자기 자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유대 종교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다락방은 파격의 장소였습니다. 이런 낯선 장면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한 목적으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생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만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서 함께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락방은 새 질서의 공동체성을 예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공식적인 제자들 즉, 도데카의 외연이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다락방은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누구나 선생 예수를 따르고 싶은 이들은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전통을 답습하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이들의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자발적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데오빌로는 이들이 기도했다는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선생 예수가 말한 ‘성령세례’라는 어떤 사건이 도래하기 전 새 세계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긴장감이 고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 예수의 뒤를 따르는 어떤 공동체가 탄생하기 직전의 긴박함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락방은 기억의 공간이며 세계관의 경계가 확장되는 전초기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데오빌로의 마음으로부터 조금씩 삐져나왔습니다.


이제 데오빌로는 ‘다락방’의 의미를 거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기다리라고 한 말은 다락방으로 가라는 말이었고,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곳으로 선생이 오신다. 그곳은 약속의 장소다. 이 위험한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엇갈리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곳은 다락방이다. 시간을 정할 수 없으니 공간만이라도 정해두면 다시 만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해로 데오빌로는 기도에 적극적인 이유, 그 다락방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던 이유도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결국, 다락방은 과거에는 기억이라는 감성으로, 지금은 ‘기억으로 저항하는 전초기지’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있는 장소였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곳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고위층의 형식적 기도 전통과 권위에 대한 반전통적 저항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기도문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겠다는 의지의 확증’으로 충분했습니다. 기도는 암송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를 앞에 둔 ‘대화’였고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오빌로는 이제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했다’라는 행동을 다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문제도 알았습니다. 그의 선생 예수가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그들이 파루시아(parusia)라고 한 것도 명쾌하게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했습니다. 다시 오시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 이스라엘 회복의 때가 온 것이니 기다리자고 결의를 다졌던 것입니다. 선생 예수가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했음에도 그들은 기다리기만 하면 이뤄지리라는 평소 생각을 접지 않았습니다. 데오빌로는 그들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들이 기도에 힘썼다는 행동에서 우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데오빌로는 다락방에서 있었던 기도 행동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메모해 두었습니다.
1. 선생 예수를 뒤따르려는 모든 이들에게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
2. 이 기다림은 능동적 행위이어야 함!
3. 다락방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며 저항하는 현재 공간. 신분과 성별 차이를 넘고, 배제와 차별의 경계를 열어가는 적극적 행위의 장소.


데오빌로의 머릿속이 거침없이 움직였습니다. 평소 습관대로 이성이 질서 있게 작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자신에게도 낯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견고한 이성의 지평선 너머에서 어떤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자신도 그들처럼 막연한 그 기다림에 한번 참여해보고 싶다는 거의 충동적인 마음이 생겼습니다.


방향 없는 바람이 가볍게 데오빌로를 감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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