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의식의 개벽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로데가 가져다준 파편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데오빌로는 혼자 위층 끝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조금 어둑한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그날 긴장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들이 웃으며 환대하는 모습도 상상됐습니다. 뭔가 눌려있던 호흡이 차분해졌습니다. 처음 받았을 땐 무관심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신중하게 내용을 확인한 뒤, 별도 서랍에 잘 정돈해 두기 위해 올라온 것입니다. 집어넣으려다 한 번 더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정신 차리고 있으세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매달려 기도하면서요! 그래서 머지않아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벗어나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세요.”(누가복음 21:36)


‘인자 앞에 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매달려 기도해야 하는’ 거구나. 물론 이 말이 그런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저 다락방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생존의 위협에 포위되어 있었지만, 저 장소야말로 바로 생존을 향한 위대한 걸음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생각도 번쩍였습니다. 자기 다락방이 그들의 방처럼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감동이 방 안의 공기처럼 가득 채워져, 어느새 이성의 한편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한 편의 기도가 자기 마음 안에서 솟아났습니다.


저는 기도를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제 잘 압니다.

저에게 기다림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저에게 기다림은 미학이 아니라 추학이라고 해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을 아름답게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다시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증인들입니다. 적어도 오늘 저에게 그렇습니다.

제가 기다릴 힘은 기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기다림을 버티는 힘이 기억이라면,

기다림을 밀고 나가는 동력은

기도에 힘쓰는 것임을 기꺼이 수긍하겠습니다.

저 자신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기에,

이런 고백에 진정한 확신이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다락방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장소에서 기억과 기다림

그리고 기도가 마치 과거와 미래와 현재라는 틀로 묶인 것임을

날마다 생각해두겠습니다.

저는 기도가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다림을 하나처럼

이어주는 연결도구입니다.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지만,

절대 없지 않은 무(無)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차원으로 분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는 ‘영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덧붙여

저는 모든 일의 시작이 ‘없을 듯 있는’ 것이지만

그 끝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도 ‘기도에 힘쓰는’ 삶의 방식을 한번 선택해 보겠습니다.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이 길을 잘 걸어낼 수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기대합니다. 기도문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 자유로운 기도의 세계까지

마음껏 유영할 날을 말입니다.

나의 기도로 당신을 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으리라 믿어 보겠습니다.”


주인님! 어디 계시나요?


방안 어둑함을 뚫고 스며든 빛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몸에 닿았습니다.

“하하, 일찍 왔네, 일찍 왔어. 고맙네”


디스마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데오빌로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감사하다는 인사인데, 데오빌로는 자신이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그가 도착하기 바로 전

그를 기다리는 데오빌로의 모든 두려움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디스마스는 더는 데오빌로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었습니다.


시종이지만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그의 선생의 말처럼,

사랑을 받아야 하고,

사랑해야 할 그런 존재입니다.


이제 그가 잠시 떠나도, 어디론가 멀리 가 있어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데오빌로의 몸 왼쪽에 자신의 이성이, 오른쪽에 자신을 떠받쳐주는 감정이 균형 있게

박동하며 마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디스마스에게 조용히 마음을 담아 환영 인사를 건넸습니다.


카리스 카이 에이레네”(χάρις καὶ εἰρήνη) ‘몸의 건강과 평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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