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자기 완벽주의의 성찰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디스마스의 어깨를 톡톡 치면서 인사를 건넨 데오빌로는 그가 문을 나서 나가는 모습을 보니 더 평안해졌습니다. 디스마스가 떠났던 하루 이틀의 결핍, 그 트라우마가 완벽하게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피곤할 테니 얼른 들어가 쉬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의 손도 잡아줬습니다. 그간 시종의 손을 잡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음 깊이 ‘감사하다’라는 말과 같은 몸짓이었습니다. 디스마스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며 물러갔습니다.

비가 오는 모양입니다. 비, 기분, 노래. 가끔 그는 이 단어들의 조합이 참 신기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글자가 아니라 어떤 삶 자체인 듯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누군가로부터 비가 오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러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는 시간, 데오빌로는 잠을 자려다, 오늘은 비 내리는 날 노래를 듣는 것처럼 선생 L의 편지 뒷부분을 마저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 파피루스 1장이 끝나는 것도 마음을 재촉했습니다.

데오빌로는 자리를 고쳐 앉고 책상 위 편지를 가만히 바라봤습니다. 읽겠다는 의지가 행동으로 나오기 직전, 습관처럼 몸에 밴 준비과정입니다. 천천히 오늘 아침에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여전히 천천히 읽어야만 이해되는 것이라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편지 본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메모 문장이 있었습니다.


“불안은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자기 완벽주의의 감정적 발현”


‘뭐지?’ 이런 용어를 첫 편지에서 읽은 기억이 없고, 또 그런 말을 직접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문보다 이 말에 먼저 끌렸습니다.


불안, 결핍, 완벽주의, 말과 글이 자기 몸에 박히면 그때부터는 생각이 조금씩 흔들기 마련입니다. 단어가 낯설진 않았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자기 몸 어딘가에 늘 박혀있는 말들이었습니다. 특히 결핍이라는 말에 마음이 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말은 어린 시절 슬픈 추억 속에서 배어 나온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오빌로의 어린 시절, 한 번도 넉넉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신분이야 그렇다 치고 경제적 삶은 늘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길을 걷다가도 이방인이라며 해코지를 당할까 불안했습니다. 쫓아오는 이 없이도 쫓기는 감정을 벗어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부와 명예가 쌓였지만, 창고가 가득 찰수록 마음의 방은 공실이 늘어났습니다. 채우는 만큼 비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그대를 생각해요♫”

“I'm singin' in the rain, Just singin' in the rain,”


빗소리에 실린 노래가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럴수록 데오빌로는 자신이 비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채워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비어있는 자신을 보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세 불안감이 밀려들었습니다. 조금 전 디스마스의 이른 귀가로 충만해진 평화로움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사실 데오빌로는 L의 메모 때문이 아니라 본래 남에게 말 못 하는 감정변화가 있었습니다. 비가 내릴 때 더욱 그렇습니다. 비를 보면 대부분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가끔 우울한 기분이 먼저 들고, 몸이 어두운 심해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을 때가 있었습니다. 우울은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몸 안에서 어떤 심각한 결핍이 일어난 것 같은 불안감입니다. 그 감정은 순식간에 활화산 마그마처럼 모세혈관까지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그런 날이 있습니다. 다행히 어떤 경우이든 그의 해법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노래’를 하거나 듣는 것입니다. 기분이 올라갈 때도 노래, 가라앉을 때도 노래였습니다. 대체로 ‘들을 때’가 더 많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단 하나의 노래라도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리는 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듣자 하니 히브리인들의 영웅 같은 왕, 다윗도 음악을 즐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비가 덮어버린 어둠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둠 너머 도시의 밤도 자신의 내면인 듯했습니다. 뭔가 가득했으나 빈 그것 천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을 사이에 두고 그와 도시 그 이질적인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데오빌로는 가끔 자신을 습격하는 이런 불안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디스마스의 부재는 자기 불안을 합리화하는 이유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창에 서린 또 다른 데오빌로가 말합니다.


“그건 그가 집을 비웠기 때문이지 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래? 나는 사실 그가 떠나는 것 자체가 불안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되지”

“그건 불안이 아니라 그냥 집착이야. 괜찮아 조금 결이 다르지만 같은 문제일 수 있어.”

“불안, 그래, 가벼운 집착이 맞겠군.”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는 바람에 형상이 흐릿해져 버렸습니다.


데오빌로는 불안이 자기 내면에서 곪을 때도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자기 불안의 해법은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어제 알게 된 ‘다락방의 기도’라는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말하는 기도는 잘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울하거나 불안하다면, 노래를 듣듯이 기도도 그런 의미가 있을 것 같긴 했습니다. 가끔 우울의 바다로 이끌려 나갈 상황에 노래의 배를 띄워보기도 했지만, 이젠 기도를 시도해 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직 어색하지만, 데오빌로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생 예수의 사람들처럼 기도의 바다로 나가보자, 그런데 정말로 결핍과 불안이 사라질까? 비에 어울리는 노래를 찾는 것처럼 기도한다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효과가 있는 걸까? 기도는 그저 결핍을 채우는 자기 최면일까?’ 생각할수록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자기 완벽주의의 감정적 발현

불안이 완벽주의와 관련 있다면, 불안의 해법으로서 기도는, 자신이 완벽하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는 어떤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안은 감정의 등락을 초래하는 외적 원인이라기보다, 완벽해지려는 사람이 스스로 초래한 자기 내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신뢰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희미해진 상태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완벽주의에 대한 대항일 가능성도 컸습니다. 그리고 앞서 성령 세례와 기도가 연관되었다는 것을 참작하면,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의지에 의한 능동적 행동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신의 부탁에 응답하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해주기를 바라는 신의 초청에 반응하는 것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 말은 기도하는 이야말로 자기 결핍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말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때 자기 생각을 자신도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언젠가 얼핏 들었던 단어, 문장, 말이 뒤섞여 몸 밖으로 마구 튀어나왔습니다.

“카오스? 그래 이 뒤엉킴의 이유는 무엇일까?”

창밖에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립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창에 서린 데오빌로의 잔영이 말을 건넵니다.


“카오스는 또 다른 질서일 수도 있어.”

“정말?”

“어떤 혼란도 무조건 생기는 법이 없고, 허망하게 사라지는 일도 없어. 그것은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지.”
“새로운 일? 어떤?”

“불안과 스스로 완벽해지려는 것은 스스로 방어벽을 높이, 견고하게 쌓으려 하는 것이거든”
“그래서?”
“만약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해체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해. 그 사이에 카오스라는 혼란 상태가 생기는 거야?”
“아!”
“그러니 불안을 넘어서려는 사람은 반드시 카오스 상태를 벗어나야 해. 그것이 카오스 모스라고 생각하면 일단 괜찮아.”

“아, 불안이나 자기 완벽을 넘어서려고 한다면, 카오스 상태는 당연하다는 것, 그렇게 새로운 일로 나아간다는 것이 카오스모스란 말이구나.”
“카오스는 그 자체로 새로운 일로 나아가는 질서야, 그러니 힘들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문제가 아닌데도 데오빌로는 그 말이 자기를 위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여전했지만, 이런 말 하나로도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습니다. ‘카오스모스!’ 혼돈 속에도 질서가 있는 세계!


이 말을 던지는 순간 데오빌로는 디스마스에 대한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적 고통이 데오빌로를 조금 괴롭힌 것은 사실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서 오는 불안과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강박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안은 완전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 불안은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자기 완벽주의의 감정적 발현’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자신이 완벽주의자인 것은 과거의 영광을 미래에도 놓치고 싶지 않으려는 의지 때문입니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에 완벽주의라는 것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물로 데오빌로에게 디스마스의 부재가 힘들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데오빌로는 디스마스의 존재를 자기 완벽한 삶의 한 요소로 받아들였습니다. 어젯밤은 한없이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까지만 그랬습니다. 오늘 밤부터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완벽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또다시 떠나는 일이 생기면 더 불안할 것입니다. 불안의 가중치는 느닷없이 기하급수로 폭발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그 불안에 대한 원인보다 해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해법 중 하나가 기도한다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데오빌로의 관심은 전혀 다른 질문으로 옮겨갔습니다. 선생 L의 이전 편지에서 이 불안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까? 다시 편지글을 천천히 훑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아예 감지조차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첫 편지에서 의심되는 몇 군데를 찾아봤는데도 아예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불안’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선생 L은 이런 단어를 써서 이렇게 눈에 띄게 메모를 해 두었을까?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혹시 나보고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암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데오빌로는 L의 그 단어들을 한 단어씩 생각하며 다시 적어뒀습니다. ‘불안, 결핍, 완벽주의, 감정’

이제 그의 관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습니다. L의 편지 속으로 들어가 볼 마음을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잠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몸을 일깨웠습니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낮은 울음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습니다. 데오빌로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습니다. 소요인가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는 알 수 없는 불안을 감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작은 희망도 함께 품게 되었습니다. 불안이 어떤 결핍이라면 아예 그 결핍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를 짓누르는 완벽의 강박은 내가 원인일 때가 많다는 생각도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안은 어떻게든 치유될 것이라는 희미한 확신도 동시에 느꼈습니다.


신제품으로 나온 손바닥만 한 유리 너머로 창밖이 선명해지고 거기에 뭔가 의욕에 가득한 데오빌로의 모습이 페이드아웃 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밤에 그가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하늘만 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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