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낯선 세계로 천천히 진입하는 데오빌로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이런 말씀을 하시고는 그들이 보는 가운데 위로 들려 올라가셨다. 구름이 예수님을 떠받쳐 올려서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이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은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두 남자가 그들 곁에 섰다! 흰옷을 입고 있었다. 11그들이 말도 건넸다. “갈릴래아 사람들이여, 왜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나요? 이 예수님, 곧 그대들을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분은, 하늘로 가시는 것을 그대들이 지켜본 그대로 오실 것입니다.”

유다의 자리를 맛디아가 채우다
그때에 사도들이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깝고 안식일에 가도 되는 거리쯤에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그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계속 머물러 온 방이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 필립과 토마스, 바돌로매와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독립당 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어제 읽기에 이어진 다음 구절(9-11절)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별 장면이었습니다. 승천이라는 말이 놀라운 일이라 하겠지만, 데오빌로에게는 어디로 가든, 어떻게 가든 ‘별리’는 별리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별이 아니라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별과 달리 ‘별리’는 ‘돌아올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데오빌로가 이별보다 선호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뭐라 써도 갈라짐은 슬픈 일이기에 이런 단어 구별은 에둘러 자기 슬픔을 감추려는 옹색한 자기방어라도 할 말은 없습니다.


데오빌로가 읽은 단락은 두 개의 이야기가 연속되어 있었습니다. 짧은 단락인 9-14절에서 하나는 9-11절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이 그 장면을 바라보는 동안 두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12~14절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다락방에 모이는 장면을 서술합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이 단락은 읽자마자 뭔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 같고, 뇌의 회전이 빨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낯선 단어들인데, 직독직해인 양 바로 심장에서 어떤 의미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심장박동수가 천천히 올랐습니다. 데오빌로는 아주 조금 불안감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마도 두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대립하는 감정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선생 예수와 헤어지는 제자들의 심리적 결단과 기다림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뭔가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니 이 단락에서 데오빌로는 보이는 글자보다 그 속에 숨겨진 제자들의 심리 변화를 더 크게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이 단락은 예수의 승천이 초래한 ‘부재’와 제자들의 귀환과 ‘불안한 기다림’이 대립 축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오늘은 글이 쉽게 잘 읽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오빌로 눈에 몇 개의 ‘명사’와 그와 관련된 단어가 눈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감정은 바닥에서 요동치는데 이성은 천장을 뚫고 활발합니다. 이렇게 합리적 사고가 작동하는 것이 데오빌로에게는 어릴 적부터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읽는 내내 그런 습관이 별로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성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일은 참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성적 변화 못지않게 감성적 달라짐도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데오빌로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자기 의지인가 싶기도 하고, 뭔가에 안내를 받는 것 같기도 한 이질감은 여전했습니다. 그 스멀스멀한 느낌이 데오빌로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싸고 있었습니다. 이게 그의 선생 L의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더 어색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글 앞에서 멈춘 경험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늘 L이 일러주는 지침을 따라갔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글자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펜에 잉크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편지 한쪽 편에 그 ‘명사형’ 단어를 적었습니다: 구름, 하늘, 갈릴리 사람, 본 그대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 다락방, 기도 등.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여러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옆에다 떠오르는 궁금증들을 같이 적어두었습니다.


돌 1. 왜 보는 앞에서 사라졌을까?

돌 2. 제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돌 3. 갑자기 흰 옷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돌 4. 왜 갈릴리 사람이지?

돌 5. 왜 안식일에 가도 되는 거리지?

돌 6. 무슨 이유로 아직 다락방에?

돌 7. 다른 사람들은 언제부터 모여있었을까?

끝돌.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 단어들은 모두 부재 속에서 방향을 찾는 제자들의 심리를 엮어주는 연결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서없었습니다. 데오빌로 자신의 속마음과 정신처럼 뒤죽박죽이어서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단어 뒤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데오빌로는 피곤해졌습니다. 눈을 좀 쉬려고 천정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스르르,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습니다.


데오빌로의 눈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어느 산골 휘돌아나가는 개울가에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있고, 어떤 사람이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모습입니다. 돌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았고, 건너는 사람은 머뭇머뭇하지 않고 단번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하나씩 딛고 뛰어가듯 건너편까지 안착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마지막 디딤돌에서 훨씬 더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내딛는 발을 놓아야 할 자리를 신중히 찾고, 힘을 주어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사이에 받쳐주는 뒷발을 떼지 않은 채 앞발이 자기 자리를 찾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기다림이 끝난 뒤 비로소 자기를 들어 올려 앞발을 뒤따라 내디뎠습니다.


‘툭’


손에 잡고 있던 펜이 떨어졌습니다. 놀라 잠을 깼습니다.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방이었습니다. 자기 혼자만 있었습니다. ‘징검다리가 꽤 길었는데, 처음에 어찌 건너가야 할지 고민하던 그 사람은 결국 마지막 돌에 이르러 앞걸음보다 훨씬 더 힘을 써서 개울을 건너갔구나’ 데오빌로는 몽롱한 채로 그 그림 같은 장면을 다시 떠올려봤습니다.


특히 마지막 돌에 내딛던 그 견고한 발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 긴 징검다리의 끝을 기다리다 결국 힘차게 내딛는 마지막 발. 자연스럽게 데오빌로는 마지막 단어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힘쓰더라.’ ‘기도에 힘쓰더라.’ 이 마지막 동작은 분명 뜬금없어 보였습니다. 흘러온 과정도 없으니 마음에 이미 결정된 것인지 모릅니다. 마치 견고하게 놓인 징검다리를 막힘없이 건너 마지막 돌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 건너기는 이 단어들 앞에 놓인 사건들이 마지막 행동까지 이른 과정을 설명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쓴다는 행동이 뜬금없는 모습은 아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데오빌로의 이성이 가차 없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기도를 택했을까?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아주 의아했습니다. 예수는 기다리라고 했는데, 기도를 선택한 결정이 뭔가 어색했기 그럼 기다림이 기도라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니 그저 그들 중 누군가의 궁여지책 해법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선생의 부재라는 슬픔 앞에서 기다리는 말을 듣고서도 의의 없이 이런 일사불란한 행동에 힘을 쏟다니, 그것은 뭔가 잘못된 자기 세뇌가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마음을 다잡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기도에 힘쓰더라는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앞에 놓인 이 문장의 명사들에서 어떤 힌트가 있을까 싶어 두 눈을 크게 뜨고 단어와 단어 사이를 헤맸습니다. 견고한 돌도 다시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그 단어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뭔가 선명한 의미가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데오빌로는 의심과 질문의 징검다리를 따라 처음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마지막 돌까지 이르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던 그 사람처럼 자신도 신중해야겠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렴풋이 어떤 추론이 이성의 균열을 뚫고 빛처럼 새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파편을 붙잡아 이렇게 메모했습니다.


보는 앞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진 예수를 보는 제자들은 충격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예수가 올라가는 하늘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느닷없이 흰옷 입은 두 남자가 그들 앞에 나타나 ‘가신 대로 다시 온다.’는 말을 던졌다. 지금 그대로 다시 온다는 말에 놀랐다. 그 남자들은 제자들을 모두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닌 제자도 있는데, 이렇게 말한 것이 의아하다. 왜 갈릴리 사람이라 불렀을까?. 당황스러움을 안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안식일에도 갈만한 거리 같다고 했다. 어떤 복선 같기도 한데 다른 면에서는 규정을 지키려는 안정감도 보이네. 돌아온 곳은 다락방, 공적 장소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여전히 위험한 그곳을 왜 바로 떠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거기는 이미 제자들 모두와 가족들도 모였다는 것은 사전에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건데, 그들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뭔가 모의하는 건지 의심이 드는 장면이긴 해, 그런데 마지막 행동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어이없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방법치고는 유지하기도 하고 무력하기도하고. 하지만, 기다리는 말을 기억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기억이 기도의 출발인가? 그렇다면 다락방이야말로 최고의 장소지. 기도가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비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사람들이 평소에 광장에 나와서 큰소리로 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이곳만큼 선생을 기다릴 수 있는 장소도 없을 테니. 그렇다면, 기억-기다림-기도가 그들이 이 기도를 선택한 이유일지 몰라. 선생의 의도일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성령 세례를 위해서는 이 기도라는 방식이 최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이건 참 흥미로운 태도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어.


데오빌로는 얼른 L의 편지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더 자세히 살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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