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ㅡ옵티콘 사유

파놉티콘, 시놉티콘 너머

by 푸른킴

판-옵티콘(Pan-Opticon), 쉰-옵티콘(Syn-Opticon)’을 넘어 ‘미-옵티콘(Me-Opticon)’의 세계로


기본 개념의 정의

이른바 파놉티콘은 권력이 대상에게 시선을 주입함으로써 자율적 통제를 유도하는 구조이다. 이는 종교 권위나 신학적 권위를 내면화된 억압 장치로 전환할 수 있다. 곧 판-옵티콘(Pan-Opticon)은 권력의 일방 감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을 뜻한다.


한편, 시놉티콘(Syn-Opticon)은 파놉티콘의 반대 개념이다. 노르웨이의 범죄학자 토마스 매티슨(Thomas Mathiesen, 1933~2021)이 제시했으며, ‘함께 본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는 정보사회가 발전할수록 일방적 감시 체제가 저항받는다고 보았다. 언론과 통신을 통해 권력을 감시하는 대중의 역(逆)감시, 상호 시선(아래에서 위, 옆)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개념은 인간이 감시를 피할 수 없음을 간파하지만, 여전히 외부의 시선에 의존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인간은 수동적 감시 체제 아래 갇힌 존재로 남는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자기 성찰이 내면으로부터 발생할 때 비로소 능동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고유하고 독특한 삶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기에, 내적 감시를 통해 자기 성찰을 구현할 수 있다. 이는 감시라는 동일한 조건에서도 판/쉰-옵티콘과 달리 자기를 내적으로부터 해방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미옵티콘(Me-Opticon)을 제안한다. ‘Me’와 ‘보다’(Opticon)를 합성한 조어로, 이는 타자의 시선이 아닌 양심과 사유에 의한 능동적 내적 조망을 통한 자기 성찰 행위다.


따라서 이 글은 세 가지 ‘옵티콘’ 유형을 신학, 문학, 권력 이론의 틀에서 재조명하며, 특히 히브리 문학의 ‘편애’를 통해 기울어진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자기 성찰로 이끌어 미놉티콘에 도달하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애와 신의 자기 성찰

히브리 성서의 신은 편애를 선택한 신이다. 이는 불합리한 모순이 아니라, 각 사람을 고유하게 대우하는 사랑이다. 곧 ‘헤세드’라 불리는 친절·사랑·환대가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방식이다. 모든 인간은 이 편애의 대상자이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그 사랑에서 배제된 듯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저항과 갈등이 발생한다.

신은 필요 없는 책임을 스스로 떠안는다. 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권력을 약함으로 위장하지도 않는다. 또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괄하는 추상적 사랑으로 갈등을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각 개인에게 불편하지만, 평안을 주는 특별한 사랑을 감수한다. 그러나 특정인을 편애하는 순간, 신은 갈등을 목격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자기 성찰의 곤경에 처한다.


이 기울어진 사랑은 신에게도 성찰을 요구하듯, 인간에게도 성찰을 요청한다. 이로써 신은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는 책임을 감당한다. 따라서 신학은 신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갈등과 성찰을 비추는 신의 인간학이다. 십자가 사건은 그 절정으로, 권력을 내어놓는 신의 겸손과 그것을 목격하는 인간의 자기 성찰을 함께 드러낸다.


결국 편애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신적 역설이다.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가 아니라, 차별적이되 고유하게 사랑하기 위한 방식이다. 신학은 성찰하는 신을 뒤따르는 성찰하는 인간(homo-praxis)을 길러내며, 나는 이 거울의 철학을 미놉티콘이라 부른다.


무사유와 아렌트

외부의 편애를 성찰의 계기로 삼는 것과 달리, 내적 성찰을 포기할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한나 아렌트의 '무사유' 개념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975)는 “무사유는 악이다(Thoughtlessness is Evil)”라는 통찰을 남겼다. 그녀에 따르면 악은 특별한 의지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유하기를 멈출 때 평범하게 증식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무사유는 곧 무세계성(worldlessness)으로 이어진다. 세계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사랑과 책임의 유대가 상실된 고립 상태다. 이 속에서 악은 더욱 은밀하게 작동한다.


신학적 맥락에서 무사유는 단순한 지적 게으름이 아니라, 신을 성찰하지 않는 태도와 직결된다. 신의 편애를 단순한 이념이나 구호로만 받아들이면, 그것은 왜곡된 종교적 편애로 전락한다. 결국 신의 사랑은 권력의 도구로 오해되고, 본래 의미인 “성찰을 요청하는 사랑”은 사라진다.


따라서 무사유는 미놉티콘의 정반대다. 무사유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성찰의 책임에서 도피하게 만들지만, 사유하는 인간은 신의 편애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나아간다. 바로 여기서 문학은 사유를 자극하는 장이 된다.


문학 속의 편애와 성찰

이승우의 『사랑이 한 일』(2020)은 창세기의 여러 장면을 다시 쓰며, 신의 사랑이 곧 편애임을 드러낸다. 아브라함과 롯, 하갈과 이스마엘, 이삭과 야곱 이야기는 모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편애가 갈등을 낳지만, 동시에 자기 성찰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힘임을 드러낸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마음의 부력」(2021) 역시 편애가 신 자신에게 성찰의 책임을 안기며, 인간에게는 환대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사랑은 차별적이지만, 그 차별이야말로 성찰을 가능케 하는 계기다.


정호승의 시 또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타인의 고통과 우주적 연대를 품는다. 그의 시를 읽는 순간 독자는 타자의 세계와 마주하며, 편애의 고유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이처럼 문학은 편애를 단순한 불평등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성찰과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성찰이 사회 구조 속 권력과 만날 때, 뜻밖에 감시 장치로 변형될 위험이 있다.


권력의 이중성: 파놉티콘과 시놉티콘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는 권력의 두 얼굴을 드러낸다. 하나는 전통적이고 가시적인 강압 권력(‘새 장수’), 다른 하나는 은밀하고 미시적인 통제 권력(‘전짓불’)이다. 이는 푸코가 말한 거시권력과 미시권력의 이중성을 문학적으로 재현한 사례다.

오늘날 권력은 더 이상 단일하지 않다. 수직적 통치와 부드러운 통제가 혼종(hybridity) 상태로 얽혀 있다. 권력자와 대중은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권력 유지에 공모한다. 그 결과 권력의 편애는 자기 이익을 보호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정치적 도구로 왜곡된다.


권력은 이제 방향 면에서 수직적 지배에 하향·상향으로 분산되고, 내용 면에서는 강압적 힘과 부드러운 통제가 뒤섞여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편애는 정치적 이념으로 변질되며, 종교마저도 그 힘에 기댄다. 이는 신적 편애와 인간 권력의 왜곡된 편애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부각한다.


미놉티콘의 길

오늘날 필요한 것은 권력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다. 권력은 단순한 지배·복종의 구조가 아니라, 자기 성찰로 전환될 수 있어야 한다. 미놉티콘은 외부의 감시와 저항을 넘어서, 내적 성찰을 통한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적 차원에서는 신의 편애가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자기 성찰을 요청한다. 철학적 차원에서는 아렌트가 지적한 무사유의 위험이 드러난다. 문학적 차원에서는 이승우와 이청준의 작품이 인간이 사유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서사화한다. 정치·사회적 차원에서는 파놉티콘과 시놉티콘이 여전히 외부 시선에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논의는 하나의 요청으로 수렴된다. 미놉티콘이라는 인간의 사유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편애는 자신이 왜 특별하게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사유하게 돕는다. 무사유는 악의 기원이 결국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반성하게 한다. 감시 권력의 횡행에 대해 인간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자유를 고수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내면을 비판함으로써 외부 감시만을 의식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내적 조망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능동적 존재로 전진할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미놉티콘은 신의 자기 성찰을 본받아, 인간이 자기 안에서 반성과 결단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지혜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미놉티콘의 길을 따라 사유를 멈추지 않고 왜곡된 권력의 편애가 아닌 신의 편애를 새롭게 이해하고, 무사유의 평범한 악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읽기, 쓰기라는 반복된 하비투스를 통해 실현된다. 특히 일기 쓰기의 반복은 자기 삶을 성찰하며 사유하게 돕는 가장 작은 실천일 수 있다.


이런 실천을 통해 인간은 끝내
자기 성찰의 길 위에 서려는 의지를 실현하면서
동시에 신이 자기 성찰에 참여하도록 부탁하는 고유한 요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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