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의 ‘긴 글’에 대한 헌사이자, ‘깊은 독자’가 되어줄 타자에게 보내는 사유의 연서(戀書)다.”
한 문장의 힘
한 줄의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라, 내가 멈춘 것이다. 글 한 줄이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나의 세상을 흔들던 순간들이 있었다. 누가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예언자의 문장, 광야 끝에서 들려온 한 줄의 고백은 한 사람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기도 하고, 따듯하게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 문장들은 짧았지만, 시간과 경험이 농축되어 있었다. 다시 들어보라, 예를 들어, ‘너 자신을 알라.’ 이 문장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다. 나에게 생동하는 힘을 깃들게 한다. 그 문장의 힘은 나를 질문의 장으로 초대한 것이다. 긴 글이란 나를 여러 문장이 살아있는 숲이다. 질문이란 그 글의 숲에서 자기 앞에 놓인 세계의 세밀한 결을 관찰한 흔적이다. 나의 왜곡된 확신에 틈을 내주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지혜의 두드림이다. 때로는 낮고 묵직하게 때로는 높고 날카로운 진동으로 내면을 조율하는 인간다움의 훈련이다. 긴 글, 살아있는 한 문장 앞에서 나는 질문받고 질문한다. 문자와 문장, 질문과 대답은 인간의 자기 성찰을 돕는 오래된 지혜 도구다. 이 둘의 관계는 꽤 오래되었다.
질문의 실종, 속도의 시대와 독서의 파편화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편은 실제와 가상 질문으로 치밀하게 직조된 대화 문학이다. ‘어찌하여’, ‘언제입니까?’. 이 질문은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고뇌를 표출하는 문구였다. 신에게 질문하겠다는 인간의 의지다. 하지만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 신이 사라진 듯 글 앞에서 인간은 질문을 잃어버렸다. 빠름의 시대이기 때문일까. 속독, 이미지화가 유익해졌다. 숏츠에 환호하고, 오래 생각하기는 낡아졌다. 속도에 짓밟힌 독서는 즉흥적으로 마음에 드는 문맥만 빼내 카드뉴스로 대체된다. 댓글은 댓글로만 반응한다. 해시태그는 앞선 글을 뒤따라 가며 사유를 지운다. 의미는 징검다리처럼 건너뛴다. 묻기는 낭비다. 문장 앞에서 멈추지 않음이 미덕인 시대다. 깊은 생각은 글의 표면에서 미끄러진다. 손에 잡히는 사물이 기호를 대체하고, 자막은 문장의 맛을 대신한다. 사유는 짐으로 버림받는다. 이 틈에 아름다운 표지만 신경 쓴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읽지만, 그 안에 오래 머물며 묻는 이는 적다. 이런 일들은 마치 책이라는 바다의 깊은 곳에 도달되기 전에 숨을 참지 못하고 떠오르는 잠수와도 같다. 안타깝게도 문명은 발달했고, 질문은 그리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궁금하다. 질문은 정말 사라졌는가? 잃어버린 것일까? 혹시, 아직 말해지지 않은 질문이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 질문의 새로운 변화라고 해도 좋겠다. 우리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은 채 살아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묻는다. 책의 홍수 시대, 책 앞에서 묻지 않은 채 글의 바다, 그 여백을 끝없이 여행할 수 있을까?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사실 고대로부터 글 앞에서 질문하는 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글이 삶을 찌르고 내면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린다는 것을 경험했다. 삶에서 구축해온 확실성에 틈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글은 길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짧든 길든 글을 마주한 이들은 이런 날카로운 책의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자기 성찰과 해체에 불안했다. 하지만, 희망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질문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또 어떤 이는 질문 앞에서 몸을 숨겼다. 태초의 사람이 나무 뒤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 사이에 글과 책은 사유의 그릇이 되지 못했다. 질문은 흘러가는 기호의 파편에 불과했다. 사색과 진지한 묵상은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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