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익 감독, <님은 먼 곳에>(2008)에 대한 시문학적 해석
심우장, 저녁 산책
한 사람 겨우 드나드는 골목은 언제나 예스럽다. 계단을 조금 오르면 떠난 사람들의 집이 줄지어 있고, 그 끝에 옛 시인 한용운의 마지막 거처가 있다. 문 닫을 무렵 들른 적이 있다. 고즈넉한 마당, 작은 방, 툇마루 앞뒤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은 한 세기를 건너온 듯 정겹다. 마당 한쪽 꽃나무 곁에 서면, 해 질 무렵 향기가 묻어 나오곤 한다. 그 향기 속에서 습관처럼 떠오르는 구절―“님은 갔습니다.” 정작 그 ‘님’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누구든 중요하지 않다. 부재의 자리를 통해 존재가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날 시인의 거처를 산책하는 동안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를 떠올렸다(2008). 한용운의 거처였던 심우장을 걷는 중이었으니 시 <님의 침묵>과 영화를 함께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화와 시의 제목 속에서 ‘님’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영화와 시가 아니라, 동명이작인 가요와의 연관성에 더 깊이 집중되었다. 바로 가수 김추자의 노래 <님은 먼 곳에>(1970)다. 대중은 이 영화를 김추자의 노래와 동일시하지만, 나는 그 이면에 한용운의 시가 가진 '님'의 철학적 부재와 탐색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영화 <님은 먼 곳에>는 ‘님’의 정체를 재규정하고, 나아가 새롭게 정의된 그 ‘님’을 찾아 나서는 수고의 가치를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님은 먼 곳에: 우리 시대의 ‘호소’
먼저 시인 한용운의「님의 침묵」부터 생각해 보자. 어린 시절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님’의 다의성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상실된 조국일 수도, 잃어버린 연인이거나 삶의 근원적 부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다층적 해석은 동시에 약간의 불편함도 남겼다. 분명한 하나의 ‘님’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시인이 쏟아낸 탄식의 힘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단호하게 외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만해 기념관장인 전보삼은 이 ‘님’에 대해 한용운의 권두언 ‘군말’에서 다음 말을 인용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릔 것은 다 님이다.” 덧붙여. 그것이 ‘불도의 사상’이라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님’은 단지 자기와 직관되지 않은 추상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시인과 직결되어 떠남의 고통을 일으킨 당사자다. 시인이 경험한 상실의 무게는 단순히 “가버렸다”라는 사실만이 아니다. “곁에 있던 그님이 이제 없다”라는 돌이킬 수 없는 부재의 아픔이다. 이 부재의 더 큰 문제는 그님이 시인에게 어떤 운명을 남겨놓고 ‘뒷걸음’으로 떠나버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님은 스스로, 숨어버린 것이다. 시인에게는 절대적 상실이다.
따라서 시인이 “뒷걸음쳐서 사라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다. 그것은 눈앞에서 잔상을 남기며 서서히 물러나는 떠남이다.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것을 두렵게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남겨진 이는 그 물러나는 모습을 가만히 오래도록 응시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 부재는 시인을 큰 허무에 빠지게 한다. 떠난 자는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예 능동적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이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부재가 바로 시인이 탄식하는 근원이다. 「군말」에 의하면, ‘그릔’은 둘 사이에 끊어질 수 없는 대승적 관계를 함의한다. 그러니 시인의 ‘님’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 마치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과 같은 관계를 의미한다. 전보삼은 논의를 통해 이 ‘님’이 바로 ‘진아’, 절대자유에 잇대어 있다고 분석한다. 어떤 해석자는 ‘사랑’이라고도 했다지만, 나는 이것이 1920년대 한국 사회가 겪었던 시대 절대정신과 잇대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님의 침묵」의 ‘님’은 누구라도 상관없는 대체 가능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으며, 그 ‘님’의 떠남 또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불가항력적 운명의 무게를 지닌 절대가치로 여겨져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탄식하는 ‘사라진 님’은 단순히 부재를 아쉬워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끝내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식한 그 ‘사명’을 제대로 각성하기 위해서라도 그 존재를 찾아야 한다. 동시에 결코 온전히 되찾을 수 없는 모순적 존재다. 무엇인가를 남기고 사라졌으나 찾아낼 수 없는 그 모순적 존재가 한용운이 탄식한 ‘님’의 정체일지 모른다. 그가 간절히 희구했으나 지금은 스스로 눈앞에서 희미해져 버린 그것이 바로 시인이 애타게 노래한 그 ‘님’이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그런 님이어야 시인의 간절한 노래가 우리 시대까지 울려 퍼지는 호소의 원천일 수 있지 않을까?
정리하면, 「님의 침묵」의 ‘님’은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을 품으면서도, 그 핵심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상실의 경험이 있다. 가버린 곳을 알지 못한 채 상실의 아픔을 노래해야 하는 그것은 아마도 시인 한용운이 끝내 품었어야 할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시대적 상흔이나 개인의 상처를 넘어선 당대 시인 자신이 잃어버린 생활세계의 시대정신이 바로 그 ‘님’이라는 것이다. 그 보편타당한 정신이어야 오늘날 우리를 울릴만한 ‘호소’ 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님이 뒷걸음으로 사라졌다는 이 장면에서 그 존재가 시인에게 어떤 ‘사명’ 같은 것을 부탁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괜한 이별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물러나 숨어버린 절대정신을 마땅히 찾아 나서야 한다. 그 시대정신이 사라졌다는 것보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수고’다.
한용운과 이준익 ‘님’의 만남
한용운의 ‘님’과 이준익 감독의 님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시인이 ‘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보다 오히려 떠난 ‘님’을 찾아 나서는 데 힘을 쓰는 양상처럼, 영화 속 ‘님’ 또한 떠나버린 그 님이 있다는 곳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 서사의 중심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님’의 행방에 대해 시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영화 속 ‘님’은 가버린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한복판이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 해서 님을 떠나보낸 이의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결국 전쟁터로 찾아간다. 이때 영화 속 주인공이 들고 간 것이 바로 가요, ‘님은 먼 곳에’다. 이 노래는 1969년 가수 김추자에 의해 취입되었다. 이후 베트남 전쟁 즈음에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렇다면, 영화가 이 노래를 끌어들인 것은, 저 한용운 시인의 시와 주제적으로 우연히 공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우연은 나를 시와 노래, 영화가 시대와 역사의 기억을 추체험하도록 이끌었다. 이제 나는 영화 속에서 ‘님’을 살펴보고, 그님을 찾으려는 수고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한용운의 시구처럼, ‘늦기 전에’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를 되새기면서 말이다.
영화에서 ‘님’을 추적하는 방식은 첫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부터 묘사된다. 카메라는 공중에서부터 넓은 들판을 훑듯이 비춘다. 잠시 후, 한 노랫소리를 따라가다 그 주인공 앞에서 멈춘다. 주인공의 이름은 순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녀가 앞으로도 그 노래를 계속 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그 노래의 리듬이나, 가사, 그리고 분위기와 상관없다. 정해진 음정과 박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카메라는 오히려 어떤 ‘한’과 ‘애절함’에 줌인하고 있다. 그 ‘한’과 ‘애절함’은 거리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바로 ‘먼 곳에’ 있는 ‘님’이 원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님이 간 곳은 알지만, 실제 문제는 그가 머무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연히 ‘님’의 위치를 알지 못하기에 ‘애절함’은 불가피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악전고투도 불사한다. 영화는 이 먼 ‘거리’ 어디에서도 ‘님’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계속 보여주면서도 결정적으로 그 위치마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니 님은 존재하나 물리적 거리, 좌표를 알 수 없는 부재의 존재다. 몸은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겠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과 ‘내면’의 불안함을 치솟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님은 먼 곳에’라는 이 말속에는,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서로 만날 듯하면서 어긋나는 관계로 투사된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관계, 그리고 애절한 마음으로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해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흘러가는 소망일 뿐 시나 영화는 모두 우리 시대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내재하고 있다. 그런 점을 인식하기에 영화는 곳곳에 그 먼 곳에 있는 ‘님’의 실체를 현실적인 것들에 재투사한다. 예를 들면, 아들밖에 모르는 시어머니, 사고를 치고 가족들도 모르게 월남행을 택한 순이의 남편 박상길은 그 대표적인 인물 것이다.
'님'의 정체성:생활세계의 시대정신
그러나 이 영화에서 ‘님’은 전혀 새로운 것에 잇대어 있다.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인간이 내세우는 가치다. 영화에서는 ‘사람의 평화’ 일 수도 있다. 밴드 리더 정만이 베트콩에게 잡혔을 때, 그들의 대화는 엉뚱하게도 ‘평화’에 집중된다. 전쟁 상황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아이러니는 이 영화가 집약한 대로 ‘님은 먼 곳에’라는 주제를 더욱 고착시켜 준다. 그리고 더 실제로 이 영화가 추구하고자 하는 평화는 전쟁 중에도, 그 토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순이가 노래하는 것을 행복하게 듣는 그 땅 밑의 사람들에게서 더 묻어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지만, 그 전쟁은 더는 저 먼 곳에 있는 ‘평화’를 가까이 가져올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땅의 평화를 전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역설과 그 평화와 전쟁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이질적이라는 상황이야말로 '늦기 전에' 그 '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님은 여전히 먼 곳에’ 있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숱한 연구 결과들이 입증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은 얻은 것 하나 없이 수없이 많은 아픈 기억들과 상처만을 남겨둔 채, 실패로 끝난 전쟁이다.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 전쟁을 통해 미군과 한국군이 전장의 수확물로 가지고 돌아온 것은 씁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영화에는 순이의 노래와 함께 다른 노래가 등장한다. 이것은 순이가 부르지 않는 노래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 노래는 밴드 리더 정만이가 부른다. 그런데 이 노래는 특별한 기능을 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전쟁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에 스며있는 감성은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적이다. 이 죽음 해체의 정서는 영화가 진행되는 전 과정에 순이의 노래와 함께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이 대목은 사실, 영화 전체에 흐르는 한국적 정서, 즉 ‘한’과 ‘탄식’과는 조금 다른 서정이긴 하다.
알다시피, 북아일랜드의 민요인 이 ‘오 데니 보이’는 한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오, 데니 보이...
저 초원에 여름이 오면
네가 돌아와 줄까
계곡이 숨을 죽이고
눈으로 뒤덮일 때면 돌아올까
햇빛이 비추어
그늘이 드리워도
난 여기 있을 거야
데니보이
오 데니보이
난 정말 널 사랑한단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 소개된 이 외국곡은 동서양의 정서 차이는 차치하고, 단 하나의 공통된 정서에 닿아 있다. 다름 아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아픔, 그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간절함, 그리고 그것이 어느 세계나 보편적으로 유지되어야 인간의 평화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느 사람에게든지, 전쟁의 아픔이 가져오는 최악의 슬픔은 ‘죽음’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전쟁터는 죽음이 언제 어디서 자신을 공격해 올지 모르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하고자 애쓴다고 하여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고 흥겨워하는 중에도, 걷잡을 수 없는 폭탄이 터져, 순식간에 삶은 죽음으로 바뀐다. 베트남 전쟁은 그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죽음’의 힘에 대한 거의 불가항력적인 무의미한 대항 속에서 허우적거린 전쟁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니 ‘먼 곳에 가버린 님’은 전쟁이 끝나야 찾을 수 있는 평화가 분명하다. 이는 세계 어디서나 생활세계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구분 없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다.
영화에서,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땅속 생활을 하던 순이 일행은 갑작스러운 미군의 폭격으로 땅속에서 베트콩들과 함께 탈출해야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지상으로 올라왔으나 이미 미군에게 모두 또다시 포로가 된다. 미군들은 베트콩 지도자들을 차례로 즉결처형한다. 순이 일행은 극도로 불안해한다. 지금 그들이 사는 길은 그들이 베트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바로 그 순간 정만은 총을 겨누는 미군을 향해 노래한다. 그 팽배해진 긴장에 균열이 생긴다. 그 결정적 도구는 ‘오 데니 보이~’였다.
미군의 눈빛이 누그러든다. 그의 눈에 두고 온 고향이 떠오른다.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나온다. 어쩌면 이 노래는 우리의 ‘고향의 봄’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음을 이기기 위해 총을 겨누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죽음을 이기는 또 하나의 힘은 두고 온 고향, 삶이 살아 숨 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현듯 솟구친다. 이 노래는 순이 일행의 목숨을 구한다.
순이가 부르는 노래가 자신의 정서를 더욱 공고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오 데니 보이는 다른 이의 정서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두 노래의 층위는 동시에 죽음이 곳곳에 숨 쉬고 있는 전쟁터를 생존의 터로 바꿀 수 있는 의미 있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이, 더 늦기 전에, 이미 떠나보낸, 사랑과 평화가 다시 되돌아오도록, 이 전쟁터와 같은 세상을 생존의 땅, 평화의 땅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먼 곳에 있는 ‘님’을 더욱 재촉하는 듯하다.
‘님’을 찾는 수고, 우리 시대의 희구
-‘간다고 하지 마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시인 한용운은 그가 승려의 신분으로서 시대와 역사를 자신의 눈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의 세계관은 역사의 순환이라는 폐쇄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것으로 현재의 아픔을 치유해 보려는 적극적 개방적 노력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눈물이 현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노래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 한계에 부딪혔다. 인간의 눈물은 아무리 새롭게 쏟아부어도 자기 세계 이상의 것을 가져다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다고 하지 마오’라는 눈물의 호소를 쏟아부어도 ‘님은 먼 곳에’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속에는 또 다른 ‘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이공에서 순이가 받은 한 질문과 관련된다.: 남편을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순이는 답하지 않는다. 그저 미소로 응대한다. 순이는 예전에도 남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묻는다. ‘니, 네 사랑하나?’
영화가 어느 면에서는 로드 무비의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영화 전체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하여 순이가 답을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진정, 순이는 왜 그 남편을 찾아 베트남까지 가는 것일까? 왜 그녀는 죽음의 터, 전쟁터를 관통하는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복수하려고?
영화는 한 마디도 이에 대해 직설적으로 답하지 않은 채 오직 마지막 장면에서 그 물음에 암시적으로 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 순이는 사선을 넘어 기적적으로 남편을 찾게 된 순간 울분 가득한 마음으로 그의 뺨을 내갈긴다. 그리고 남편은 그 앞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일어서지 못한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으로 영화는 끝이다. 그토록 애타게 찾았고, 전쟁을 넘어 마지막 시간까지 다다르고 마침내 자신의 ‘님’을 찾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희망’도 아니고, ‘눈물’도 아니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평론가들에 의해 ‘전쟁 멜로’라는 장르에 국한되는 것에 대해 잠시 멈칫한다. 또한 ‘한 여인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의 참상’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면밀히 보면, 이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현재 상황에 고발’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이전의 두 개의 영화와 관련지어 연속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첫 번째 영화 ‘라디오 스타’는 ‘자신의 삶 속에서의 개인’의 문제를, 두 번째 영화 ‘즐거운 인생’은 ‘한국 사회 속에서의 개인’을, 그려냈다면 이 세 번째 것은 ‘세계 속에서의 개인’을 함축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남편 박상길과 아내 순이가 만나는 순간이 격정적이거나 뜨거운 인간애가 물씬 풍기는 감동적인 장면이 아니라, 회한과 울분,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솔직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될만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위해 이 허무한 결로까지 달려왔는가? 그래서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실 월남행을 택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아내 순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고향에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답이란 두 가지뿐이다. 전사통지서이거나 귀국 소식. 순이 역시 그를 찾아 나서야 할 이유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순이는 새로운 답을 시도한다. 그녀는 전쟁터의 남편을 면회하기로 한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고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을 순이는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방법을 시도한다. 예상하듯이 남편은 자신을 그리 달갑게 맞아주거나, 사랑으로 환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쟁터까지 가려고 한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곧, 그는 그녀를 떠나갔지만, 그녀는 그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을 홀대하는 그 남편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끝까지 떠나가지 않고 그를 찾아 나서는 순이는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끈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남편이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희망은 좀 더 일찍 찾아왔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이 사회에 의해, 지금은 이 세계의 흐름 속에서 부당한 죽음에 직면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함께 있어 주기 위해 길을 가는 평화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바로 ‘님’들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의 평화’가 늘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우리를 다시 찾아와 우리 안에 계시는 나의 ‘님’, 지금-여기에’
영화 한 편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한 관객으로서는 이 영화가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 시각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나 별 생각하지 않고서도 영화의 유희적 기능에 충실하여 한 번 신나게 웃고 나오기를 기대하는 경우라면 충분히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 먼 곳에 있는 ‘님’을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어떤 흥행 결과보다도 값진 결실일 것이다. 그 어떤 ‘님’이 전쟁터를 뚫고 이 험한 세계 속에서 이리저리 내몰리고 있는 나를 찾아 이역만리 길을 죽음의 계곡을 지나면서까지 찾아와 준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영화의 좁지만, 깊은 그리고 알찬 성공일 것이다.
그러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이 영화는 굳이 ‘님’을 누구라고 정할 필요가 없다고 넌지시 말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 가치를 입증했다. 다만 한 가지 보완할 것이 있다. 한용운의 시의 해석에서도 보듯이 ‘님’에 대한 다의적 해석은 시해석의 방향에 추상성만 남길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다행인 것은 시나 영화에서 이 다의성보다 중요한 것은 님과 관련된 하나의 가치’에 수렴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와 영화에서 제시된 ‘님’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하고 되찾아야 할 가치,’ 즉 ‘자기 세계에서 인간다움을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안전한 토대, 평화로운 거처’의 확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토대와 거처를 찾으려는 수고’다.
한편, 시와 영화의 ‘님’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하고 되찾아야 할 가치, 곧 자기 세계에서 인간다움을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상징한다. 이는 안전한 토대, 평화로운 거처를 찾으려는 수고다. 하지만 그 ‘님’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그 ‘님’은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평화’를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평화의 땅에서 전쟁 같은 일이 일어나는 자리에도 머물러 있다. 내가 멀리 떠나보낸 그 ‘님’은 오히려 내 ‘영역’ 안에도 머문다. 이 땅의 현실을 멀리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자신이 살아온 하늘의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나아가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 눈물의 호소만으로는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자신의 고통을 답습하고, 각인시키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 먼 곳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나의 ‘님’은 내가 찾아 나서기 전에 나를 먼저 찾아온다. 그것이 시에 연동된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궁극적 메시지다. 내가 멀리 떠나보낸 그 ‘님’이 오히려 내 ‘영역’ 안에 이미 머물러 있다. ‘늦기 전에’ 다시 돌아와 달라고 호소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 함께 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님’은 전쟁 속에서도 추구되어야 할 인간 세계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과 ‘평화’로 체화하며 우리 안에 돌아와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며, 평화라는 자신의 가치를 찾으라고 따뜻한 미소로 채근한다. 시와 영화와 노래 속에서 재현되는 시대의 ‘님’은 오늘도 ‘침묵’하는 것 같지만, 포연 자욱한 전쟁터에서도 내밀어오는 강한 손과 따뜻한 팔을 내밀어 오늘 나의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일어나, 나를 찾으러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