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선 시인의 실존-불안과 희망의 조화

시인 윤동주의 「길」 읽기-어느 예언서의 세 층위 해석법 적용

by 푸른킴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一九四一、九、三一、



상실과 회복의 시학

시(詩)가 현실을 상상으로 그려낸 메타포라면, 윤동주의 「길」은 그 좋은 예가 된다. 그의 다른 시들보다 이 시가 특별한 이유는, 메타포의 층위가 세 겹으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맨 아래에는 현실 사건이 있고, 그 위에 해석 사건,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시로 승화시킨 문학 사건이 있다. 시인은 경험한 현실을 해석으로 비추고, 그 해석을 다시 시의 언어로 형상화한다. 나는 이 과정을 따라가며 시인이 목격한 현실 사건을 새로운 나의 이미지로 만나게 된다. 나는, 현실에서 상상으로 전이되는 이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윤동주의 「길」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아모스의 서술, 윤동주의 서술

이처럼 현실-문학적 상상이라는 서술 방식은 오래전 히브리 성서의 『아모스서』에서 먼저 읽어볼 수 있다. 로버트 쿠트의 견해에 따르면(1981), 아모스서는 실사건–해석–사상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방식으로 본다면, 「길」 또한 사실에서 미래적 희망을 도출하는 하나의 예언시처럼 구성되어 있다. 다만, 아모스가 심판과 회복을 선언했다면, 윤동주의 시간은 부끄러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내적 종말의 사건이다. 즉, 그의 시는 외적 혁명보다는 내면의 각성과 결단을 통해, 현실을 넘어서려는 실존적 선언으로 읽힌다는 점이 다르다. 요컨대, 「길」은 불안한 시대 속에서 자아 상실과 그 회복의 과정을 시적 현실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세 층위

나의 관찰에 따르면, 이 시는 크게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현실적 사건으로서의 ‘길’
둘째, 시인의 내면적 각성
셋째,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문학적 결단이다.


이 세 층위 위에 시인의 인간상은 대조와 조화를 이루며, 시공간은 부드럽게 분할되고 다시 통합된다.

제1층위 ― 현실 사건, 막힌 길의 체험

이 시의 가장 낮은 층위에는 시인의 현실이 있다. 추론하자면, 1941년 가을, 윤동주는 하숙하던 북아현동 인근의 골목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 그 길은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이어져 있고, “풀 한 포기”도 없는 삭막 했다. “쇠문이 굳게 닫힌 담”과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길”은 자기 내면의 속박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제의 억압 아래 놓인 시대의 풍경을 상징한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시기, 그는 시를 쓰면서도 불안한 실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일본 유학을 결심했던 것도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가 산책으로 걷는 그 길은 단순한 골목이 아니라, 시대의 막다른 골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에서 시인은 스스로의 존재를 조용히 되묻는다.


제2층위 ― 해석 사건, 부끄러움의 각성

시인은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다”라고 적는다. 이 문장은 시간의 순환을 넘어, 존재의 반성을 말한다. 밤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길, 끝나지 않는 하루의 반복. 그 길 위에서 시인은 “하늘은 부끄럽게 푸르다”라고 말한다. 그의 모든 시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자기 존재를 일깨우는 실존, 그 내면의 각성이다. 그의 시에서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원한 자기 성찰적 윤리의 치밀한 응시이다. 길 끝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현실의 억압을 넘어 하늘과 인간 사이, 초월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발견한다. 그 푸르름이 부끄러움으로 이해되는 이유는 그가 여전히 ‘담 이쪽’에 머물러 불안한 시선으로 저쪽을 응시하기 때문이다.


제3층위 ― 문학 사건, 잃음과 찾음의 여정

“잃어버렸습니다.”

이 첫 구절은 시 전체의 긴장을 보여주며, 시인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결핍의 선언이다.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는 상태, 그러나 그 잃음이 곧 그가 길을 나서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예측불가한 현실을 조심스럽게 조망한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어 더듬는다”라는 이 행위는, 불안을 어루만지며 길로 나아가는 시인의 무의식적 몸짓이다. 주머니는 닫힌 세계 속으로 들어서는 최후의 틈이며, 모든 길의 입구를 상징한다. 그는 마침내 깨닫는다. 이것은 단순한 상실의 고백이 아니다.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다”라는 자기 존재 인식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것은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는 결론은 자기 존재의 생존 이유, 불안한 자신이 지향하는 실존적 목표를 적확하게 제시한다. 그는 단순히 내면 회복이 아니라 길로 나아가 잃어버렸던 그것을 찾으려 한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그의 실존적 성찰을 시적으로 결단하는 증거다. 시인은 잃어버린 자신을 골목을 걸어 나간다. 그 길은 불안한 길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는 길이기도 하다.




대조적 인간상의 조화

그렇게 이 시에는 두 인간상이 겹쳐 있다. 하나는 무력하게 길을 걷는 자아, 또 하나는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나는 순례자이다. 전자는 닫힌 골목을 걷는 사람이고, 후자는 그 길 끝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시에서 시인은 이 둘을 배척하거나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슬픔과 용기, 체념과 희망을 하나의 인간 안에서 공존시킨다. 그 조화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속에서 부드럽게 이어져있다. 그에게 부끄러움은 절망의 감정이 아니라다. 언제나 다시 걷게 하는 내면의 힘이다. 죽은 길을 살아 있는 길로 바꾸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시인이 조용히 길을 걸었던 청년 예수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연약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런 부드러운 강인함을 배웠을 것이다.

시공간의 분할과 통합

다음으로 이 시가 보여주는 시공간이다. 이는 기호학적으로도 단순하진 않다. 길은 수평적 공간이고, 땅과 하늘은 수직적 공간을 이룬다. 시인은 수평의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지점이다. 걷고, 멈추고, 바라보는 그 일련의 행위가 시인이 점유한 입체적 공간을 이룬다.


여기서 시간 또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구절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순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침과 저녁은 서로를 비추며 무한히 회귀한다. 그 회귀 속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따라서 이 시간은 시인에게 사건 그 자체다. 그 사건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시인에게 그 자리―돌담 앞에서 눈물짓는 자리―는 바로 시적 카이로스(kairos)다. 신적 은총의 시간이다. 또한, ‘푸른 하늘’과 ‘풀 한 포기 없는 길’의 대비는 부끄러움과 희망, 닫힘과 열림의 대조다. 그 대조는 시인이 걷는 길이 단순한 거리, 그 풍경이 아니라, 길을 걷는 존재의 보이지 않은 깊은 심연을 드러내주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 골목길을 통해 불안한 자기 실존의 희망의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의식을 보여준다.

길 위의 예언과 실존의 권면

단순한 방식으로 살펴보았지만, 윤동주의 시 「길」은 상실의 체험(현실 사건), 부끄러움의 각성(해석 사건), 그리고 회복의 결단(문학 사건)이 한 몸으로 엮는 실존주의 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윤리적 자아의 깨어남이며, 그 부끄러움을 통과한 자만이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의 길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불안한 실존이 희망의 존재로 이행하는 헤테로토포스다. 그리하여 돌담길을 걷던 시인은 마침내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물론 그 하늘 아래서 시인은 언제나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그 고개를 든 순간 죽은 길은 살아 있는 길로 펼쳐진다. 불안한 자아가 희망을 내다보는 것이다.


오늘 나 또한 그 길 끝에 서 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몰라 하늘만 바라보는 날이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 윤동주의 시는 여전히 나를 부른다.


“잃은 것을 찾으라.”


그 부끄러운 푸르름 속에서, 오늘도 나는 다시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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