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울’에 관하여

-우울, 억울, 여울

by 푸른킴

ㅇ울의 언어적 변환

ㅇ울.’ 이 불완전한 표기 안엔 묘하게 완전한 감정이 숨어 있다. ‘우울’일까, ‘억울’일까. 문자를 보내려다 멈춘 손끝이 그 두 단어 사이에서 멈칫한다. 어쩌면 이 두 단어는 한 단어의 두 뜻일 수 있다. 억울이 이유/원인이면, 우울이 결과일 것이고, 우울이 원인이면, 억울이 결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억울‘하니, '우울'하고, ’우울‘하니 괜히 ’억울‘하다. 우울이 가벼운 느낌이라면, 억울은 조금 무거운 감이 든다. 우울이 내 안에 삭혀지는 미묘한 감정이라면, 억울은 내 몸 밖에서 거칠게 밀려온 물길 같은 감정이다. 그런데 ‘ㅇ울’이란 단어를 보니 유심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소월의 ‘개여울’

1922년, 시인 김소월은 시를 하나 발표한다. 알다시피, 소월의 시는 여릿한 서정이 압권이다. 여성 감성이 절묘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나는 그의 시들이 당시 한국 사회를 이른바, 문학으로 어루만지는 ‘시의 위로법’이었다고 이해해 왔다. 그의 시는 그저 웅얼거리는 감성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내면에서 숙성한 서사이며, 변화의 질서를 따르는 세계이해이며, 나와 너, 그리고 세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관계성을 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끌어올린 시어들은 개인과 개인(남과 여)이 만나 주고받는 연민의 정을 표현한다. 동시에 나와 타인, 세계와 세계, 사람과 세계의 교류에 토대를 둔 인간 감정을 완성했다. 그들 사이에서 빚어내는 감성을 진솔한 이성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차갑게 다듬어진 정갈한 이성을 따뜻하고 뭉툭해진 포근한 감정에 잇대어 드러내 준다. 개인적으로 <개여울>은 그런 노래를 대표한다.

널리 알려진, 그의 시 <개여울>은 이렇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1922년)


개여울에 담긴 이중적 의미

이 시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은 다양하지만, 나는 이 저녁에 한 단어를 주목한다. 시의 제목이기도 하며, 시의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개여울’이다. 특히 ‘여울’이라는 단어가 주된 관심어다.


여울은 강이나 바다와 같은 큰 물에서 선명하게 일어나는 좁고 거친 물놀이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이 선택한 개여울은 조금 다른 뉘앙스다. 큰 물이 아니라 개천같이 작은 시냇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울이 일어날 틈도 없는 작은 물길에 느닷없이 생긴 ‘이상한 여울’이 바로 개여울인 셈이다.


비평가들이 유연하게 언급하듯이, 이 시에서 시인이 언급한 ‘개여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과거 기억과 현재 다짐이 정치하게 교차하는 공간이라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시 전체를 살펴보면, 이 ‘개여울’은 한때 시의 화자가 그리워하든 사람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자가 바라보면서, 그 과거를 회상하는 공간이다. 과거 기억과 현재 회상이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개여울에서 화자는 ‘가도 아주 가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여 ’잊지 말아 달라는 부탁’까지 이어나간다. 그러니 ‘개여울’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미래의 시공간이다. 시의 화자에게 개여울은 자기 길만 생각하고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억울함과 그로 인해 우울해진 심정을 ‘잊지 않겠다’라는 자기 격려와 다짐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인 셈이다. 아니, 과거의 우울해진 심정이 지금 억울한 마음으로 재생했다는 기억표지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다. 시인이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잔물’이나 ‘파릇한 풀포기’는 마치 작은 여울 같은 ‘개여울’의 의미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시에서 개여울은 사랑하는 이가 남긴 약속이 우울과 억울의 원인처럼 화자의 마음에 남았다는 것을 그려낸다. 지금 이별이 완전한 작별이 아니라는 약속이 우울함과 억울함의 원인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오히려 희미하게나마 피어나는 희망일 수 있다.




세월이 지나, 이런 이중적 정서가 되살아났다. 시가 발표된 지 수 십 년 이 지난 1972년, 한 가수가 이 시를 노래로 불렀다. 이 노래는 여울에서 파생한 ‘개여울,’ 미세하고 여린 시의 서정성을 그대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울과 억울이라는 이 노래의 이중적 정서를 가수 특유의 이성적 목소리로 잘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여울’은 시와 노래에서 대척점에 자리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채 대중에게 회자하였다. 조금 이질적인 감성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의 내면을 잘 다독인 것이다. 하지만, ‘여울’은 그런 의미로만 멈추지 않았다.


여울목, 삶의 변곡점

‘여울목.’ 이 단어는 여울이 솟구쳐 오르는 바로 그 지점을 표현한다. 단어의 끝에 사용된 ‘~목’은 생활에서 흔하게 쓰인다. ‘길목’, ‘골목’(어원은 불분명하지만)이 같은 어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여울에서 확장된 여울목은 물길이 어느 순간 거칠게 소용돌이치거나 휘감아 돌아나가는 물살로 변화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심지어 강과 바다에서 위험할 정도로 위협하는 거센 물길이 그려진다.


이처럼 ‘여울목’은 여울이 거칠게 살아 움직이는 형상이다. 마치 여울이 안전하게 흐르는 물길의 발목을 잡는 모습 같다. 물길의 고요한 흐름을 방해하며, 흘러가는 방향을 되돌려 놓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물길에는 부담스러운 지점이다. 어쩌면 우울하고 억울한 일이 일어나도 그냥 감수해야 하는 걸림돌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울목의 의의는 좀 더 다른 의미에 있다. 즉, 여울목은 삶이 가볍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돌출과 전환의 지점이 있음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여울목은 나른하고 지루하며, 졸린 눈을 번쩍 뜨게 한다. 아무 일 없이 흐르는 물길은 여울목에서 흔들리거나 심하게 출렁거리지 않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 지점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온몸에 골고루 힘을 분산하며 잘 버틸 수 있도록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월이 지나 발표된 노래 ‘여울목’은 이런 의미를 잘 이해한 듯하다.


1986년, 가수 한영애는 솔로로 전향하며, 노래를 발표한다. <여울목>이다. 그 노래 속 가사는 이렇다.


맑은 시냇물 따라 꿈과 흘러가다가
어느 날 거센 물결이 굽이치는 여울목에서
나는 맴돌다 꿈과 헤어져
험하고 먼 길을 흘러서 간다
덧없는 세월 속에서 거친 파도 만나면
눈물겹도록 지난날의 꿈이 그리워
은빛 찬란한 물결 헤치고 나는 외로이
꿈을 찾는다


가수 한영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노래하는 풍을 상상해 보면, 이 노래가 어떤 정취를 풍길지 금방 알아챌 것 같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노래에는 ‘여울목’에 대해 꽤 정확한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가사 속에 ‘꿈을 가진 이가 여울목에서 꿈과 헤어진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생각해 보면, 이 노래는 여울목에 맞서는 사람을 그려낸다. 그는 여울이 일어나는 느닷없는 여울목에서 괜히 억울해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자기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다시 ‘은빛 찬란한 물결 헤치고 꿈을 찾아간다.’ 다분히 능동적이고 자기 의지를 따르는 생산성 있는 전투를 보여준다. 이 노래의 가수가 몽환적으로 부른다는 것이 오히려 극적인 아이러니를 일으킨다. 이 노래는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삶은 갈수록 ‘ㅇ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길 같아서 작은 ‘여울목’에서도 파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여린 자신을 오히려 견고하게 지켜내는 탄탄한 이성에 토대를 두고 여울목을 지나가는 사람을 노래한다. 그 방법은 ‘과거’를 딛고, 현재의 꿈을 찾아내는 것이다.


개여울목의 의의

개인적으로, 삶이 익어갈수록 이런 ‘ㅇ울’에 노출될 위험도 커지는 듯하다. 앞으로 나갈 일보다 뒤를 돌아볼 일이 더 많아져서 그런 모양이다. 이룬 것 없어 보이는 삶인 데다 이룰 것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리라.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한들, 결실이 터무니없거나 기대에 미치지 않는 낭패감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울’은 쓸모없는 ‘억울’을 잉태하고, ‘억울’은 쓸데없는 ‘우울’로 발아한다. 어쩌면 나이 들어가는 일에 가장 큰 위험은 스스로 ‘억울해하고’, ‘우울해 빠져’ 삶에 괜한 ‘여울’을 만들어내는 일일지 모른다. 개여울이라면 괜히 멋쩍은 감성을 잠시 누릴 수도 있겠지만, ‘여울목’이라면 괜한 심적 풍파를 스스로 자극하는 셈이다.


하여 나이 들어가는 이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여울목에 방치되는 것이다. 고요하고, 안정되며, 나름 의미 있는 방식으로 흘러온 자기 삶에 생채기를 방관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실개천 같은 삶에 괜한 여울목을 스스로 만들 위험을 관망하는 것이다. 이른바 ‘개여울목의 방치’다. 이것은 필경, 손에 잡히는 결실이 없다는 불안감, 이뤄야 할 ‘인생에 대한 조급한 욕심’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하다. 그럴 때는 여울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그것은 물길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물속의 돌과 뿌리를 손끝으로 더듬듯, 천천히 거둬내는 일이다.

영원의 한 조각, 나의 개여울

가을 긴 연휴가 끝났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고, 다시 비가 올 모양이다. 햇살 틈에 구름이 뭉쳤다 헤어졌다 한다. 비가 온 다음에도 낙수 소리가 정겹다. 개천 둑길을 조금 걸었다. 비가 내려서 인지 개울물이 한층 불어났다. 건너편 숲 아래로 유난히 심한 여울목 하나가 있다. 콸콸 흐르다 튀어 오르는 그 물길이 보기 좋아 가만히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여울의 소리가 듣기 좋다. 날씨는 흐렸지만, 마음은 괜찮다. 오늘따라 낮달이 선명하다. 하늘 끝에 기운 달이 가늘게 몸을 걸치고 있다. 저 여울 소리에 여울목이 거친 숨소리같이 산책로 밖으로 쏟아진다. 그 틈에 물길 옆에 청둥오리 두 마리가 조용히 앉아있다. 갈수록 나의 잔잔한 생로(生路)에 ‘개여울목’들이 빈번히 생긴다.


한적한 산책로에서 ‘ㅇ울’ 물길을 보고 있으니 또 한 번의 가을 길을 환호와 함께 잘 지나고 있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사실, 아무리 거친 여울목이라도 돌아보면 모두 추억이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모든 작은 물길에서 일어나는 여울은 웅장한 ‘영원(올람),’의 한 개여울일 테다. 가능하다면, 그 물길을 따라 흘러가며 개여울목을 내버려 두지 말고 차근차근 다듬어가다 보면 그 안에서는 '마지막에' 결국 온전한 물길로 흘러갈 것이다.


가을 연휴가 끝나는 즈음,
이 평범한 사실을 다시 나의 나이에 치장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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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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