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어느 노래
2020년 「월간 윤종신」 10월호에 발표된 곡 〈느슨〉. 그 부제는 ‘느슨해야 보이는 것들’이다. 그 가사 중
바싹 묶은 신발 끈은
이젠 좀 느슨
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느슨하다’라는 형용사에서 ‘-하다’를 떼어낸 ‘느슨’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신발 끈을 풀어두는 상징적 표현 같다. 마치 ‘느슨’은 러닝화를 걷는 신발로 만드는 일처럼, 내달리기만 하는 삶에 여백을 두겠다는 의지의 실천인듯하다.
이 노래가 발표된 뒤, 몇몇 인터뷰 내용이 공개되었다. 특히 이 노래의 배경에 대한 그의 설명이 회자했다. 그즈음 그는 모친상을 겪었는데, 코로나 19 상황으로 격리가 일상이던 시절이었음에도, 친히 찾아와 위로해 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자신의 주변에서 늘 함께 해주는 이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맹목적으로 내달리는 삶으로부터 조금 ‘느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느슨〉은 만든 이의 개인적 경험을 모판으로 삼았다. 죽음이라는 배경과 친근한 이들에 대한 배려, 삶의 여백을 유지하여 삶을 ‘헐겁게’ 하는 수행의 의미가 은근히 스며있다. 〈느슨〉은 간극의 수행이다. 그런 ‘간극의 수행’이 어떻게 일상 속에서 실감할 수 있을까. 나는 몇 가지 일에서 이 ‘느슨’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우선 어느 날 아침 산책, 아주 사소한 일에서 그 ‘느슨함’의 표정을 보았다.
느슨한 표정: 낯설게 보기
여름보단 한참 늦어도 가을에는 이른 아침, 밤의 끝이 아직 흐릿하게 남아있는 날이 많다. 새벽이 길고, 어둠이 천천히 물러나기 때문이다. 평소 같은 시간, 여름이면 이미 아침이어서 바삐 움직여야 했겠지만, 가을 아침은 여전히 새벽 같아서 느릿한 몸짓이 자연스럽다. 옷도 가볍게 걸쳐 입고 몸도 천천히 움직인다. 오늘은 아침 바람이 쌀쌀하다. 모처럼 모자를 덧쓴다. 여전히 고요한 길로 나간다. 좀 걷다가 조금 떨어진 낮은 억새길로 들어선다.
가는 길, 어느 집 담벼락에 작은 토마토가 설익은 채 줄기가 말랐다. 사진 한 장 남기려고 다가갔다. 그때 담 너머 집 마당에서 무슨 일이냐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당황했지만, ‘토마토를 좀 찍어두려고 한다’라고 했다. ‘가져가도 좋다’라고 흔쾌히 허락하신다. 떨어질 듯한 토마토를 손에 들어 보이고 감사하다고 답례하고 돌아섰다. 호주머니에 기분 좋게 넣는다.
나는 잠시 즐거웠으나, 사실 그분에겐 불쑥 들어온 낯선 이로 인해 자신의 익숙한 아침 풍경이 깨지는 듯했을 것이다. 그래도 느슨한 마음으로 낯선 이를 받아준 그 마음이 새롭다. 그 앞에 어색한 채로 잠시 서 있었던 순간, 그분의 여유로운 마음이 나를 평안하게 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 일상이 얼마나 나만의 익숙함에 길들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요컨대, 익숙한 풍경에 끼어든 낯선 사건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느슨해지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이런 느슨을 다시 경험한 것은 서재 주변 풍경을 둘러본 일에서다.
느슨한 걸음: 다양한 풍경 자세히 보기
서재는 아침일수록 더 고요하다. 매일 같은 아침이지만, 들여다보면 사뭇 다르다. 그리 바쁠 필요도 없다. 물론 어디서든 사람들은 늘 그러하듯 자기 일에 몸을 바지런히 움직인다. 그래도 일부러 느슨하게 움직이다 보면 이 익숙한 시간이 새롭게 느껴진다.
서재가 있는 동네도 저마다의 풍경과 속도가 있다. 언덕 아래 번화한 길가에는 출근길 사람들의 발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하천을 따라 흩어진 집들에서는 느릿한 하루가 시작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하천을 따라 걸으며 잠시나마 쉼을 얻는다. 새소리와 물소리, 멀리서 돌아가는 경작기의 낮은 진동이 이른 아침의 배경을 이룬다.
이처럼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도 시간은 늘 다르게 맴돈다. 저녁에 익숙했던 길이 아침이 되면 낯설고, 그 낯섦 속에서 하루는 새롭게 열린다. 오늘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드나들며, 어둠과 밝음이 번갈아 마을을 물들인다. 그 느린 리듬에 맞춰 나의 시선도 느슨해진다. 이런 아침이 기분 좋게 낯설다. 그런 낯섦은 때로 책 속에서 다시 깨어난다. 요컨대, 동네의 일상 풍경은 빡빡한 마음이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다. ‘느슨’은 마음먹고 천천히 걸으려는 의지가 아니면 거의 느끼지 못한다. 윤종신의 노래처럼 풍경을 느린 동작처럼 바라보려는 노력의 결과다. 문득 어제 읽은 문장 하나가, 오래된 공기처럼 되살아나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 그 또한 ‘느슨’이다.
느슨한 읽기: 이미지 너머 아름다운 실체를 만나기
요즘 잠들기 전 머리맡에 두고 읽는 책이 있다. 문학사가 고(故) 김윤식 님의 『현대문학과의 대화』(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다. 대학교양총서 시리즈로 발행된 얇은 책이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는다. 세밀하게 읽지 않아도 좋다.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 가볍게, 몸에 닿는 대로 펼쳐 읽다가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는 책이다. 자주 어제 읽은 대목이 아침에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에 만난 글은 저자가 지난 1993년 11월 작고한 시인 김광균 님이 작고한 날을 기억하며 쓴 것이다. 제목은 ‘서정시의 운명.’ 김광균 시인이라면, 추억 속의 그 시구,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를 남긴 시인이다. 그날 각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이 저자에게 시인 김광균에 대해 이런저런 내용을 물어왔던 모양이다. 저자는 첫대목에 이렇게 썼다.
“(김광균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에) 각 신문사 문화부가 이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 어찌 이상하랴. 기자들이 내게 물어온 첫 번째 질문이나 두 번째 질문이 한결같았는데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에 관해서이다.”(106쪽)
그리고 덧붙여 한 시인의 생애에서 이토록 강렬하게 자기 시학을 압축할 수 있는 시구를 남겨둔 김광균의 생애를 내심 긍정했다. 하지만 저자의 마음은 이 글 끝에서 조금 드러났다. 문학비평가인 자신에게 이런 표현이 다시 낯설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익숙한 이 시구가 왜 낯설게 다가왔는지 그의 심정을 남겨둔 것이다. 저자의 말은, ‘분수처럼~’이 이미지로만 고착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표현에만 몰두하여 그 시가 사물의 실체와 동떨어진 세계를 그려내는 데 그쳐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 자세히 말하면, ‘서정시’에 대한 기우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저자의 속마음에서 낯선 조심성을 듣는다. 무엇이든 익숙해진 이미지는 어느새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으니, 그전에 한 번쯤 잔상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는 말. 김윤식 선생의 그 생각은 내 아침길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는 이미지의 시대를 만끽한다. 어디나 덧칠이 많다. 그래서 그 인위의 풍경을 의도적으로 거둬내며 천천히 걷다 보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사물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시인 나태주 님의 말을 빌리자면, ‘느슨하게 보기’는 곧 ‘자세히 보기’다.
느슨한 감상—가을의 느슨함, 와비-사비
아침 산길에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멀리서 바라보던 그 길 속으로 들어가면, 차츰 이미지가 걷힌다. 저 노학자가 말한 대로, 이미지에만 매인 시선은 사물의 실체를 어둑하게 만든다. 걷기란 그 어둠을 걷어내는 일일지 모른다. 실제로 자주 경험한다. 특히 가을에.
가을길은 여름의 잔상 위에 익숙하게 놓여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르다. 잡풀이 베어진 개울가,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 잎이 떨어진 코스모스, 익다 만 호박, 새끼를 품다 놀라 달아난 길고양이, 수척해진 물줄기, 추수가 끝난 논의 빈자리들. 겉으로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텁텁하고 낯설다. 아름다움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 텁텁한 실체 속에 있다. 이미지를 벗기면 사물은 스스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렇게 이미지를 벗겨내는 일은 결국 ‘느슨하게 보기’와 다르지 않다. 시선의 매듭을 풀면 삶의 결도 느슨해진다.
가을은 그런 느슨함을 허용하는 계절이다. 산책은 그 느슨함 속을 걷는 작은 수행이다. 길 위의 바람은 책장처럼 넘겨지고,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은 몸을 일깨운다. 걷는다는 것은 곧 자기 성찰이며, 나에게 그것은 ‘와비-사비’의 체험과 같다.
와비-사비는 완벽함을 향한 무한한 반복 대신, 불완전함 속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밀착된 것을 한 뼘 느슨하게 벌려 여백을 만들고, 그 여백에서 사물의 숨결을 더듬는다. 정형과 비정형을 함께 품으며, 버릴 것을 버리되 남은 흔적까지 성찰한다. 스스로 쓸쓸해지고(와비), 스스로 퇴행하려(사비) 하는 일, 오래된 것을 버리되 잊지 않는 일. 그것이 문명 속에서 아날로그적 삶을 지켜내려는 의지다.
요컨대, 산책이란 그런 여백을 누리는 느슨함의 행복이다. 몸을 움직이며 마음의 매듭을 푸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화해한다. 완전함을 향해 팽팽히 조여진 삶의 끈을 조금 풀면, 그 헐거워진 실루엣 속에서 세계가 오히려 또렷해진다.
느슨한 나이 듦—관조, 헐거운 삶
익숙했으나 이젠 낯설어지는 그 사물들 틈을 걷다 보면, 어느새 지난 한 해 이 벌판에서 치열하게 생존해 온 어떤 사람들의 흔적들이 눈에 밟힌다. 그래서 다시 낯설어진다. 여름엔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던 개울 앞에 선다. 가로질러 놓인 징검다리를 따라 건너편으로 올라가 본다. 이곳에서만 넘겨보던 저곳에 이르니 이곳이 새롭다. 한두 번 개울을 이리저리 건너본다. 한가하던 오리 떼가 놀란 듯 푸드덕 날아오른다. 고요한 아침을 깨뜨린 것이다. 여름보다 물줄기는 가냘파졌다. 개울가에 멈춰 선다. 물줄기 위아래를 둘러본다. 어느 사이 물길 따라 계절도 훌쩍 가버렸다. 뭐라도 하나 손에 잡을 것 남기지 못해 아쉬울 듯하지만,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익숙한 나를 낯설게 대할 수 있다면, 나이 들어가는 나를 갓 태어난 아이처럼 다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요컨대, 느슨함은 자기 위로다. 정신없음을 당겨 쓰지 않고,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다독이는 의식이다.
다시 느슨: 시와 노래로 이어지는 여백
길 걷기를 마치고 서재로 돌아오면, 우선 창을 열어 바람길을 터 준다. 다시 처음 그 노래가 떠오른다. 삶을 헐겁게 묶어두자는 그 음성. 느슨함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상. 그 사이 ‘느슨’을 다시 듣는다. 느릿한 노래 사이로 상큼한 바람이 스며든다.
“저기 낯선 길로도 한번 가보자
궁금하잖아.”
―윤종신, 〈느슨〉 중
오늘, 그대의 익숙한 길—느슨할 수 없는 바쁨 속에서도—잠깐의 ‘조용한 시간(Quiet Time)’을 가져보자. 그 틈에 떠오른 당신의 단어를 하루 양식으로 삼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