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 『저만치 혼자서』 가벼운 리뷰
붉은 물빛의 감각―히비스커스 차 한잔
히비스커스의 꽃말은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이다. 누가 이런 말을 처음 붙였을까. 그 감각의 연원을 더듬다 보면, 사막의 열기 속 붉은 꽃잎 하나를 오래 바라보던 한 인간의 시선이 떠오른다. 그 시선은 단지 미적 감탄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생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비스커스의 붉은 물빛은 사랑의 달콤함보다도 삶의 지속을 위한 어떤 결심에 가깝다.
아침에 그 꽃잎 차에 미지근한 물을 부으면 시나브로 붉은색이 번진다. 그 물빛을 바라보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 본다. 어디서나 삶의 온기가 은근히 피어오르면 좋겠다.
이렇게 히비스커스 차를 마시는 작은 일도 가끔 나에겐 사랑을 음미하는 일인 동시에, 오늘 하루를 견뎌낼 ‘섬세한 의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상큼한 맛에 스민 감각은 사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 사유의 꽃을 새롭게 만난 적이 또 있었다.
슬프나 단아한 노래-상사화의 노래
상사화, 그 꽃말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저 비탄의 고백이 아니다. 끝까지 피어오를 사랑의 저력처럼 들린다. 이 꽃은 잎과 잎이 한 시절에 만나지 못하는 탓에 애달픔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꽃의 생태처럼 우리의 삶 또한 동시에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때 미얀마의 소녀가 우리말로 부른 〈상사화〉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미얀마에 뜻하지 않은 혼란이 있었다. 그 탓인지 노래는 더욱 애잔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날의 노래는 슬픔에 머물지 않았다. 노래 속 상사화는 저만치 홀로 피어나면서 누구의 시선에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존재였다. 그것은 사랑이 불가능한 거리에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의지, 떨어진 채라도 삶의 존엄을 지키려는 단아한 모습이었다.
히비스커스가 마음속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감각이라면, 상사화는 환경과 상관없이 그 사랑의 견고한 지속을 상징한다. 두 꽃은 모두 ‘저만치 혼자서’ 피어나지만 절대 고립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독 속에서 자기 빛을 찾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덕분에 나도, 떨어져 있으면서 함께 있음을 느낀다.
‘저만치 혼자서’―연민의 거리감
책상 저 끝에 놓인 김훈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가 눈에 들어온다. 띠지의 문장이 오늘따라 유난하다.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이 문장은 이 소설집에서 김훈 문학이 지향하는 윤리적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인물들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는 그 주변부의 인간들을 ‘이웃’으로 부른다.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것이 김훈이 구축한 문학의 윤리, 즉 ‘이웃의 문학’ 일 것이다.
하지만 그 윤리 속에는 미묘한 긴장도 있다. 그의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의 서술은 세밀하고 섬세하다. 그러나 그 섬세함이 때로 연민의 형태로만 굳어질 수도 있다. 이 거리감의 미학이 김훈 문체의 품격이자, 어쩌면 한계일 수도 있다.
그의 문장은 남성적이고 강직하다. 그러나 그 강직한 문장은 때로 냉정함으로 비켜 읽힌다. 소설 속 그의 이웃들은 생생히 살아 있지만, 여전히 저자의 시선 속에서는 ‘타인’이다. 그가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조에 가깝다는 비판은 유효하지만, “이웃으로 썼다”라는 선언은 주변부의 인간들이 곧 ‘공동의 삶’을 지탱하는 존재임을 환기하려는 윤리적 의무감의 발로이기도하다. 이처럼 김훈의 문학은 ‘고독한 인간의 대리 고백의 서사’로 읽힌다. 그 연민이 어떻게 진정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그 답은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의 근원, 즉 시로 돌아가면 보인다.
소월의 「산유화」 속 ‘저만치 혼자서’-슬픈 단아함
김훈은 제목의 출처를 소월의 「산유화」라 밝혔다.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저만치 혼자서 피네.” 그러나 소월은 ‘저만치 혼자서’를 결코 연민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 꽃은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도 자기 빛을 잃지 않는 존재다. 불쌍히 여김을 당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존재의 당당함으로 홀로 피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소월의 시와 김훈의 소설은 갈라진다. 소월의 시는 고독 속 자립을, 김훈의 소설은 고독을 연민으로 응시한 자기 관찰을 그린다. 하나는 존재 가치의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묘사다. 이 차이는 단순한 ‘거리감’이 아니라, 관찰자가 타인을 대하는 ‘공감의 질’에 관한 문제다.
잔향의 미학―연민을 넘어, 인간다운 거리로
김훈은 “이웃으로 썼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이웃은 단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존재다. 그러나 이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대신 느끼는 연민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서서 그 당당한 의지를 존중하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일이다.
연민의 문학이 타인의 고통을 서정으로 번역한다면, 공감의 문학은 그 서정을 다시 현실의 감각으로 되돌린다. 전자는 슬픔을 아름답게 만들지만, 후자는 그 아름다움의 책임을 묻는다. 김훈의 문장은 전자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지만, 여전히 거리의 미학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관조는 과도한 동일시가 낳을 수 있는 연민의 폭력을 피하려는 윤리적 거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거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인간다운 거리’로 다시 배우는 가에 있다.
작가가 나이 든다는 것은 문학이 늙는다는 것이거나 생명력이 다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 늙음 속에서 인간의 이야기는 더 단단해지고, 그 거리를 건너는 우리의 공감력은 더욱 깊어진다. 그것이 김훈의 문학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는 이유다.
히비스커스의 시고 단 맛처럼 삶의 감각을 깨우고, 상사화의 노래처럼 슬픔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을 기억하는 아침,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더욱 마음에 남는다. 단지 이웃의 삶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방식을 고민한다. 식은 차 한 잔에도 온기는 남는다. 문학도 그 잔열이 이어진다. 김훈의 문학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이유도, 이웃을 향한 그의 인간미 온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