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임꺽정’ 다시 생각하기

-구효서의 소설 비판적 읽기:교리화된 해석과 그 상상력의 오류

by 푸른킴

소설 임꺽정과 상상력

『홍명희의 임꺽정 프로젝트-남북통합의 인문콘텐츠와 정치적 상상력』(진인진, 2024)을 읽은 뒤, 그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말에 생각이 깊어졌다. 벽초의 문학적 의도 속에 ‘상상력’이 잠재해 있다는 말로 읽혔기때문이다. 동시에 그 상상력이 무엇을 향해 뻗어 있는지, 그 방향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상상력이야 누구에게든 자유롭지만, 그 결과는 자칫 삶을 윽박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소설, 『악당 임꺽정』(해냄, 1999)이 나에게는 이 상상력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일으킨 경우다. 이 소설은 의적 임꺽정을 ‘악당’이라는 반어적 의미로 규정한다. 처음에 나는 이런 제목이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새롭게 읽어낼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악당’이라는 관점을 ‘임꺽정의 모사로 활약하다 변절한 서림’의 진술을 토대로 소설 전체의 틀을 삼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기발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소설의 상상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임꺽정에 관한 소설은 벽초 홍명희의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그의 장편작 『임꺽정』(10권)은 소설의 구성뿐만 아니라 수려한 우리말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를 입증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 임꺽정은 전투적인 실제 모습과 함께 기존 권력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실천적 가치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어떤 분들의 평가처럼 실제와는 다를 수 있지만, 의적 임꺽정이라는 이미지는 벽초의 소설에서 문학적, 대중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은 분명하다.


의적 임꺽정 대(對) 악당 임꺽정

그런데 1999년 소설가 구효서는 이런 의적 임꺽정을 비틀어 『악당 임꺽정』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한 것이다. 이 소설은 그동안 철저하게 의로운 이미지로 일관한 임꺽정을 해체하고 탈색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리하여 인간 그 자체로서 임꺽정의 이미지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것 같다. 요컨대, 그는 ‘인간 임꺽정’을 해체하여 그 이면의 모습을 재건함으로써 기존 통념에 균열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이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밝혀둔다. 조금 길지만, 작가의 의도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기에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옳고 그름이 세상을 어지럽게는 할 수 있을망정 사람의 마음까지는 마침내 속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시비공론은 한때의 이런저런 사정에 따라 막힐 수는 있겠지만 하늘의 이치는 결코 명멸하지 않는 법. 현란한 시비는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정해지고 두절된 공론은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행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간흉의 극악함이 세도를 잡고 살륙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충성되고 어진 자들을 대악으로 몰아 마침내 불측한 화를 빚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해 비록 당장에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고 공평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섣부르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앞날에 대한 허망한 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쪽의 것이든, 저쪽의 것이든, 기만적인 대의명분 따위에는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악이 가능하게끔 비겁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악당 임꺽정』 제2권, 284쪽)


위의 대목은 이 소설의 요체가 되는 서림의 최후 진술이다. 이 진술의 핵심은 자신이 임꺽정이라는 ‘허망한 존재의 꾐’에 빠져 ‘비겁한 삶을 살아’ 끝내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문학적 고백을 빌어 자기 소설의 큰 틀로 삼은 것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임꺽정이 이룬 성취 혹은 벽초 홍명희에 의해 철저히 이미지화된 임꺽정에 대한 반론이 전개된다. 그러면 왜 이런 해체가 필요했을까?


악당 임꺽정의 출현 배경

구효서의 소설은 세기말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문학적 성과다. 이념이 해체되고, 영웅주의 대신 개인의 실존이 중심으로 떠오르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이 소설에서 임꺽정에 대한 외전을 토대로 그의 역사적 성과에 대해 정·반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에게 임꺽정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의 토대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소설은 임꺽정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정하며, 의적 임꺽정을 온전한 권력자가 아닌 ‘자기 왕국을 꿈꾼 악의적 야망의 인물’로 드러내려는 시도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서림의 마지막 서술을 통해 들려준 이 말은 몇 번을 읽어도 구구절절 타당하다.


그러나 바로 그 고백이, 역설적으로 작가가 꿈꾸었던 ‘인간 임꺽정의 복원’이 얼마나 현실의 삶과 괴리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이 서술은 소설의 주제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비춰주는 거울로 작용한다.


역사적·문학적 인물의 해체와 역사적 맥락

정당한 교리나 비판적 의도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자리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할 때 언어는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그 의도는 자칫 위태로운 줄타기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글은 인간 임꺽정의 이면을 되살려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입증하려 했을 테지만, 오히려 그 결과는 의적으로서 임꺽정의 삶마저 역사적 맥락 밖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사실 홍명희가 그려낸 의적 임꺽정 역시 소설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런데도 일제 통치하에 그 소설이 회자된 것은, 그 시대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통치 권력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 문학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이 연재되었을 당시부터 이미 모든 이들에게 시대 저항의 어떤 교리처럼 남아 있었다.


반면 구효서의 의도는 문학의 힘을 빌려 그런 단단한 의적 이미지를 ‘해체’ 해 보자는 것이었다. 작가는 임꺽정에 대한 이런 의적 이미지가 지나치게 교리화되어 박제되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세계에는 정설로 드러나는 일이라도 그에 못지않은 야사도 공존한다는 것에 착안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정·반의 대응은 소설의 당대 사회적 맥락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또한, 한 인물에 대한 상반된 서술은 실제로 의와 악을 자기 위주로 악용하여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분명하다.


그러나 벽초의 임꺽정은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당대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이상적 저항의 구현이다. 이에 독자들이 호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인물은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맞는 재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구효서가 의적을 ‘악당’으로 해체하는 작업은 역설적으로 교리화된 신념에 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의적이라는 문학적 서사가 악당이라는 서술로 전이될 때에는, 삶의 보편적 맥락과 역사적으로 일관된 사회적 좌표를 벗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필요도 있다. 물론 ‘악당’이라는 이미지 해체는 ‘역사적 임꺽정이 가진 포학할 정도의 무력행사를 통해 1인 지배 권력욕의 과정과 함께 어떤 역사적 서술도 믿을 수 없으며, 기록된 역사조차 선택적 해석일 수 있다’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적이 악당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당위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서림이라는 인물의 말에 근거한 소설은 임꺽정이 악당이라는 이면을 고발하는 공익제보의 관점보다는 역사적 변절자(서림)에 대한 합리화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아닌지라는 질문도 불가피하다. 이런 점에서 구효서의 문학적 성과 역시, 이미 정해진 고착된 교리에 갇힌 또 다른 상대화의 오류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 결론을 정해둔 연역적 서술 구조 속에서 인간의 복합적 실존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예는 고대 서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히브리 성경에서 깊은 질문의 늪에 빠진 욥을 향해 온갖 정교한 교리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붓는 욥 친구들의 말이 그런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은 그 자체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으나, 그것이 욥의 실존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판의 긍정보다도 삶을 왜곡하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것과 같다.


시대적 맥락에 따른 비판적 해석의 필요성

욥의 이야기는 잠언과 같은 정통 지혜에 대한 도전이다. 이유는, 그 지혜들이 더는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리화된 지혜가 현실로부터 이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는 악에 지배되고, 악은 어떤 징계도 받지 않는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기존 질서의 정교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대표한다.


이런 욥을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정교한 질서에 함몰되면서도 그 지혜를 여전히 고수하는 삶을 산다. 이 둘의 차이가 욥기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욥은 격동하는 시대 안에서 여전히 지혜 추구를 통해 삶을 역동한다. 반면 그의 친구들은 갇힌 지혜에 삶을 고착시키려는 결과에 머문다. 친구들이 정교한 자기 교리로 욥의 고통을 해석하려 했지만, 그 교리는 욥의 실존과 어긋나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상처만 더했다.


이처럼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교리와 신념에만 근거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오해하는 맥락에 놓일 위험이 있어 보인다. 벽초의 임꺽정이 틀에 갇힌 세계에 대해 그것이 진정 올바른가를 묻는 일이라면, 구효서의 임꺽정은 그런 질문의 내적 의도가 오히려 편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오해를 자초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의도 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이미 안정된 질서를 불필요하게 흔드는 일이 무모할 수 있다는 자기 보수적 정서가 더 짙게 배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말과 글이 제 빛을 내려면 그 말이 놓인 시대의 맥락이 적확해야 한다. 물론 그 맥락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불확정적 세계이기도 하다. 특히 언론가와 종교가와 정치가와 문학가의 공통점은 ‘말’을 글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부여된 책임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사건들을 치밀하게 꿰어 보며, 언어를 통해 이념의 불완전성을 간파하고, 시대의 추가 서로 다르게—그러나 일관되게—흔들리도록 안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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