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투쟁과 인간의 미세한 힘 ― 위화의 문학적 해석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

by 푸른킴

위화의 글, 나의 새로운 만남

언젠가 중국문학평론가들이 위화(余华)의 소설을 다룬 짧은 논문들을 읽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시기와 관점이 제각각인 글들이었지만, 분석 대상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중에서도 그의 장편소설 《인생(活着)》(1993)은 《살아간다는 것》(푸른숲, 1997)이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후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고 갈우와 공리가 주연한 영화 <인생>으로 다시 소개되면서 ‘위화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 현상은 단순한 문학적 인기 이상의 것이었다. 1990년대 동아시아 사회가 겪은 이념의 피로와 변화를 반영하는 시대적 감수성의 전환이었다. 위화는 문화 대혁명 같은 거대한 역사 속 민중의 갈등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혁명 서사가 아닌 인간의 생존 서사로 풀어냈다. 그 결과 그는 ‘정치적 작가’라기보다 인간의 고통을 문학으로 기록한 작가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내가 위화의 작품에 한층 더 깊이 다가가게 된 계기는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였다. 바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원제: 十個詞彙中的中國, 문학동네, 2012)에서 나는 낯선 위화를 만났다.


낯선 에세이스트 위화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도, 정치평론도 아니다. 위화가 온몸으로 겪은 중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가되, 그것을 문학적 사유의 언어로 다시 직조한 사회사상 에세이다.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서 이러한 글쓰기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였다. 아마도 1990년대 후반만 해도, 대중에게 ‘인문학술에세이’라는 장르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설가 위화’의 이름으로 그를 읽어왔고, 그래서 ‘에세이스트 위화’는 낯설었다.


사실 그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품은 1996년에 발표된 『허삼관 매혈기』(푸른 숲, 2007 번역, 2015 영화화)였다. 나 역시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세계관에 깊이 빠져들었다. ‘매혈기(賣血記)’—피를 판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내게 피는 ‘헌혈’로 익숙했지, 생존의 마지막 자원을 거래하는 행위로 상상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위화의 글에서 피를 판다는 행위는 단순한 빈곤의 상징이 아니라,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짓는 인간의 생존 본능으로 그려진다. 슬픔과 유머가 동시에 번지는 그 세계는 잔혹하면서도 따뜻했다.


그 후 나는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책 보다 더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위화의 글이 단지 허구가 아니라, 구술된 역사와 살아 있는 언어를 문학으로 번역한 결과임을 실감했다. 구술의 역사(口述史)가 문학의 서사보다 더 깊은 온기를 품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그들과의 대화 끝에 나는 위화의 에세이에 대해 물었다. 놀랍게도 책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전한 위화의 주장과 단어들에는 누구보다 생생하게 반응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이미 그 책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사회인문사상 에세이, 『열 개의 단어 속 중국』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다. 본래 제목은 부제로 달린 『열 개의 단어 속 중국』이다. 개인적으로 번역 제목은 이 책을 가장 문학적으로 고양하는 표현이며, 인문학적 출판 감각이 빚어낸 성과라고 생각한다. 건조한 원제에 비하면 번역본의 승리다. 다만 번역 제목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개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번역 제목과 함께 원제를 함께 의식하는 편이 좋다.


제목만 보고도 질문이 생겼다. ‘과연 중국을 열 개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단어들이 거대한 중국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까?’ 책을 다 읽고 보니, 오히려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솔직히 중국은 다녀볼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다. 이 책을 통해 어려운 퍼즐 몇 조각을 맞춘 듯한 안도감을 얻었다.


위화는 하나의 숫자와 함께 열 개의 단어를 제시한다: 5월 35일,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얼핏 낯선 단어들도 있다. 이 단어들은 정치적 진술에 그치지 않고 정치-문학적 진술이다. 그의 관심은 정치 자체의 분석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자신이 처한 정치 현실을 그려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열 단어는 그의 해석의 틀이다. 정치·문화·역사를 엮어 문학적 해석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며,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문학적 기본 개념의 지도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문학적 해석’이란, 작가가 경험한 현실을 상상과 이미지로 번역해 사실 너머의 의미와, 의미 너머의 가능성(미래 전망)까지 밀고 가는 글쓰기다. 위화는 각 단어를 통해 개인 경험과 사회적 반응, 그리고 그 진술들을 엮어 공동의 역사로 재구성한다. 특히 1966년 문화 대혁명을 출발선으로 삼아 등소평을 거쳐 오늘의 중국 사회까지 아우르는 서술 방식은, 이념의 전장에서 관계의 전장으로 이행한 중국의 변화를 읽어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책의 사상적 토대: 호메로스와 맹자

위화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 동기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이 하나의 문으로만 드나드는 사회로 더욱 견고해졌다는 인식이다. 그 문은 갈수록 공고해졌고, 그래서 첫 단어로 ‘5월 35일’을 택한다. 이는 6월 4일을 직접 표기할 수 없는 현실을 꼬집는 문학적 우회다. 단순한 날짜 변형을 넘어, 망각을 강요하는 체제에 맞서 기억을 보존하려는 기호다. 가상의 날짜(31+4=35)를 만들어 사건을 환기하는 이 방식은 국가의 망각 강요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거스르는 ‘기억 투쟁’이다. ‘5월 35일’은 개방의 문이 다시 닫힌 날, 다시 말해 말할 수 없음의 통제가 시작된 날을 상징한다.


위화는 이렇게 쓴다.


나는 이 책에서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성질을 두루 갖추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초연한 서술과 절실한 삶이 책 속에서 걸어가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이 열 개의 단어 속에서 호메로스와 맹자의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호메로스가 인간 운명의 비극성과 분노를 서사로 노래했다면, 맹자는 인의(仁義)의 정치로 인간의 마음을 다독였다. 위화는 이 두 태도를 잇는 문학으로 자기 시대의 상흔을 해석하려 한다. 요컨대 문학이 정치의 삭아가는 뿌리를 드러내고, 잘라내고, 다시 이식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열 단어의 재구성과 루쉰

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묶일 수 있다.


1. 정치적 토대: ① 인민, ② 영수

2. 언어의 힘: ③ 독서, ④ 글쓰기, ⑤ 루쉰

3. 삶의 질서: ⑥ 차이, ⑦ 혁명, ⑧ 풀뿌리, ⑨ 산채, ⑩ 홀유


특히 산채와 홀유는 현대 중국사회를 이해하려는 외부 독자에게 유익한 핵심 개념이다. 또한 위화가 은근히 강조한 항목은 ‘루쉰’이다. 그는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 인물로 마오나 등소평이 아니라 루쉰을 전면에 세운다.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


위화에게 루쉰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학-정치의 기준점이다. 동시에 위화는 중국 사회가 정치 의존의 집단 체제에서 경제 의존의 집단 체제로 이행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경제 중심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분열과 격차를 감수하게 만든다. 그 결과 정치의 표리부동과 사회적 불균형이 구조화되는 한계에 직면한다.


비판적 읽기: 의의와 한계

위화의 글(소설이든 에세이든)은 체험된 현대사에 대한 해석이다. 즉 해석된 현실이다. 사실이라는 재료를 가져오되, 그것을 자신의 가치 판단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요리한다.


그는 책의 구성 원리로 ‘단어’를 택한다. 단순한 낱말이 아니라 중국을 이해하는 개념사의 장이다. 이 단어들은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흐르는 가치 개념의 역사로 기능한다. 위화의 공헌은 중국을 통시적으로 읽으면서도 동시에 공시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비극적 현실을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비극 속에서 인간성을 보존하며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문학으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묻는다.


다만 개념들이 중국 특유의 가치들을 잘 집약한다 해도, 문학의 토대 위에서 그 개념들의 현실 적합성을 되묻는 과제는 남는다. 오늘의 보편 가치에 어떤 도전을 가하는가,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가. 내가 앞서 ‘문학적 해석’을 “사실을 의미로, 의미를 미래 전망으로 확장하는 글쓰기”라 정의했듯, 위화의 사상은 ‘망각에 맞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해 미래를 재구성하려는 서사적 책임’에서 때로 과거 해석에 더 기운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다수 소설에서 반복되는 ‘살아 있음/살아 내기(活着)’의 윤리는, 비판이 미래 전망으로 이행할 토대를 충분히 마련한다.


그의 열 단어와 나의 단어들: 과거에서 미래로

위화의 열 단어는 현대 중국사회의 아픈 현실을 비춘다. 더 나은 세계로 이행하려면 반드시 수정·개정되어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단어들에 내가 지향하는 보편 가치를 대응해 본다.


1. 인민 = 시민 중심 사회

2. 영수 = 낮아지는 지도자

3. 독서 = 상식과 보편 윤리 지침의 공유

4. 글쓰기 = 사상의 자유로운 실현

5. 루쉰 = 역사의 중심을 지키는 인물

6. 차이 = 균형 잡힌 질서

7. 혁명 = 반성과 개혁

8. 풀뿌리 = 올바른 부의 향유

9. 산채 = 공의와 정의의 공동체

10. 홀유 = 표리일치의 말과 삶


물론 이 상관성은 더 면밀한 논증이 필요하다. 다만 이런 대조를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정치·사회 개념을 재고(再考)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깊이 되돌아보는 문학(과 신학)의 인문학적 책임을 상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위화의 개념이 더 미래지향적 전망으로 이행하길 바란다.


우리 사회의 산채와 홀유

위화의 글에는 소설이든 수필이든 무거운 위트가 깔려 있다. 폭우 뒤 개울물처럼 거칠게 흐르지만, 끝내 웃음을 남기는 위트다. 그의 글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미해결 비극을 다시 살피게 한다. 특히 산채와 홀유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산채(山寨)는 모방과 창조의 경계에 선 개념이다. 본래 산속 요새나 아지트를 의미했으나, 오늘날에는 ‘짝퉁’이나 모방품의 생산·유통을 가리킨다. 공식 규범과 시장 질서가 완전하지 않을 때 비공식적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기술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때로는 모방이 원본을 능가하는 창의력으로 호도되며, 표준과 비표준, 규범과 무규범의 경계를 흐린다.


홀유(忽悠)는 기만과 과장을 통한 생존 기술이다.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교묘하게 설득해 이익을 취하는 행위다. 위화에 따르면 이는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 규범 없는 시장의 생존 논리와 맞물린다. 악의적 사기만이 아니라 정보의 과장과 포장 속에서 표리부동을 감내해야 하는 체제가 낳은 생활 기술이기도 하다. 위화는 ‘홀유’를 통해, 공의와 정의가 희미해진 공동체에서 말과 행동의 표리일치가 포기되는 현실을 풍자한다.


이 두 개념은 한국 현대사에도 또렷한 시사점을 준다. 왜 유사 현실이 범람하는지(산채), 왜 기만적 소통이 횡행하는지(홀유)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결국 위화의 비판은 국경을 넘어, 정치의 삭아가는 뿌리를 드러내고 인간 본연의 태도를 재구축하도록 독자를 촉구하는 문학적 해석자의 작업이다. 그의 작품군을 돌아보면, 그는 거시사(문화대혁명)에서 출발해 미시사(함께 사는 이들의 일상적 인간성)로 수렴한다.


결: 문학적 해석자로서 위화

내가 이해한 위화는—최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밖으로 향하는 거창한 역사 인식과 안으로 집약되는 미세한 인간 인식을 교차시키려 노력한 작가다. 그를 현실 참여 문학가로 부르는 것도 타당하다. 그렇게 보면 그의 글은, 이 땅의 독자들에게 시대적 책임을 글로써 상기시키는 문학적 해석자의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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