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문학함에는 세계에 대한 에크프라시스(ekphrasis)가 필요하다.
이것은 사물이나 사건을 예술 작품을 대하듯 세심히 관찰하며
상상하듯 생생하게 묘사하는 시적 기법이다.
신학함도 마찬가지다.
어느 산책길에서 찾은 선물 같은 책
가을 분위기가 물씬하다. 어느 늦은 오후, 느긋하게 서울 북촌길을 걸었다. 그날 길 걷기가 끝날 즈음, 중고물건 판매가게에 들렀다. 매장 한 편에 헌책 코너가 있다. 둘러본다. 소설가 최인훈의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 1981년 초판본을 찾았다(이 책은 이후 그의 전집 4권에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제목이 되었다.
같은 제목의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은 이 책의 열다섯 편 중 첫 번째 글이다). 작가의 이름값이나 세월의 축적 비용을 고려하면 거저 얻은 선물 같다. 좋은 기분에 바람막이 옷 하나와 유기농 간식 하나를 더 샀다. 가게를 나섰다. 길에는 바람이 차다. 하늘엔 흐릿한 구름이 가득하다. 곧바로 비라도 내릴 기세다. 그 틈에 손바닥만 한 파란 하늘이 호수처럼 듬성듬성하다. 섬사람들에게는 이런 날에 대한 속설이 있다 한다. 거친 바람과 흐린 구름과 작은 햇살이 어우러진 날이면, 내일은 아주 맑은 날이 될 것이라 한다. 부디 내일은 그 햇살에 가을 낙엽이 화사하게 물들면 좋겠다.
이 소설의 서술특징은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유로운 글쓰기라는 점이다. 소설가 그 예는 이 소설의 첫 단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단락은 이 소설의 특징과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1969년이 다 가는, 동짓날 그믐께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소설가 구보 씨는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는 참에 그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두루마리 같은 것이 두르르 펼쳐졌다가 곧 사라졌다. 구보 씨는 그것을 곧 알아보
았다. 그것은, 오늘 하루 그가 치러야 할 일과였다. 다른 누구도 알아보랄 것 없고 구보 씨만 알면 그만 이었던 만큼 그 두루마리는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구보 씨는 잠에서 깬 다음에도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7면, 굵은 체 옮긴 이 강조. 이하 전집 4권에서 인용)
소설의 주인공 구보 씨는 문학가이다. 주로 소설가라 불리는 그는 ‘자기를 다스리면서 화해에 가득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9면) 사람이다. 글을 쓰기도 하고, 강연하기도 하며,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다. 무엇보다 그저 자신만 알면 그만인 일과를 사는 것이 전부인 소시민이다.
이 글의 구성은 단순하다. 그가 마주하는 소소한 일상(日常)과 그 사이사이에 그의 사소한 생각을 길게 끼워 넣는 형식이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들’ 사이에서 구보 씨는 뭔가 거창한 ‘관념(觀念)’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다. 예를 들면, 한 대학에 강사로 초대받아 ‘인간의 연대’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그러나 ‘인간은 연대하며 산다.’라는 말과 자신의 ‘선택적 연대의식’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를 장황하게 반추한다. ‘할 수 있는 테두리에서의 정의(正義)’(15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고뇌한다. 그리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정의는 ‘시(詩)’에서 찾아보자며 에둘러 다독인다. 자기 말과 행동의 모순을 문학으로 도피시켜 위안하는 상상에 빠진다.
소설의 끝 장면도 그렇다(41면). 구보 씨는 우연히 길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떤 여자를 만난다. 잠시 상상에 빠진 구보 씨는 자기도 모르게 ‘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주었다. 죄인처럼’. 그러자 그 여자는 ‘고마워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구보 씨는 그녀가 ‘비웃음처럼’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버스가 왔고 구보 씨는 황황히 이십 원 길의 나그네가 되어 밤 속으로 외마디 소리처럼 사라져 갔다.’
이 마지막 서술에서 구보 씨의 관념이 함축되어 빛난다. ‘죄인처럼’과 ‘비웃음처럼’이라는 표현이다. 구보 씨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배려를 ‘죄인의 태도’처럼 이해한다. 또한, 상대가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음처럼’ 이해한다. 누가 보더라도 괜한 생각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그저 스쳐 가도 괜찮은 이런 순간을 그의 관념으로 다시 붙잡아 되새긴다. 미미한 일상과 과도한 관념의 ‘연대’를 매일 습관처럼 이어 붙인다. 물론 그 관념 끝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진 않는다. 그 자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과 일상회귀의 반복은 시나브로 자신과 세계 연대를 자기 삶에 더욱 깊게 뿌리내리게 하고, 또한 그 연대하는 삶의 가치를 단단하게 축척해 나가도록 추동한다.
소시민의 사소한 관념과 세계 연대의식
이 소설은 사소한 일상을 ‘관념’하는 소시민을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구보 씨는 ‘생각 없는’ 하루를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는 자기가 직면한 현실에서 관념이야말로 소시민의 거창한 책임이자 문학의 사명이라는 신념을 견지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소한 일이지만 구보 씨에게는 인간의 호흡처럼 중요하다. 그의 생존 도구이자 생존 이유라 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소시민이 이 세계와 ‘연대’하는 거대한 방식이기도 하다. 미미하고, 먼지 같은 자기 삶이 세계 역사와 이어지는 공감 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관념’은 그 자체로 철학적 사유이면서 문학적 책무이다. 세계에 대한 치밀한 인식을 제 몸에 각인하는 숭고한 종교적 의식(ritual)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글 곳곳에서 소설가 구보 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생뚱맞게 괜한 생각에 빠지는 순간을 에크프라시스 기법으로 묘사한다. 그리하여 구보 씨의 관념은 어떤 위대한 사유에도 뒤지지 않는 세밀한 생(生)의 철학이라는 것을 은근히 내비친다.
이런 점에서 소설가 구보 씨는 마치 지혜추구자 같다. 그는 그 관념을 디딤돌 삼아 마침내 자기도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를 탐험해 나가도록 향도하는 지적 탐구자 같다. 그는 소소한 일상을 치열하게 사유하는 삶은 당연히 인간과 인간이 연대하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사실을 옹호한다. 사실 철학의 관점에서 ‘관념’에 관한 이론(idealism, 관념론)은 이런 구보 씨의 행적에 잘 어울린다. 즉 관념의 정의는 이렇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체는 근본적으로 정신적으로 구성되었거나 혹은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사고이다.’
이 정의에서 ‘관념’은 역동하는 세계를 직시하며 ‘잠시 멈춰 서는 행동’에 상응한다. ‘사물이나 사상에 관해 멍하게 생각하기’를 함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철학적 정의에서 ‘관념 행위’는 빗자루로 자기 마당을 쓰는 정도의 미시적 삶으로 보인다 해도 실제로는 자기를 초월하여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대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세계 어디선가 발생하는 사건, 들려오는 소문을 바로 여기에서 경청하는 거시적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달리 보자면, 산과 바다와 길과 나무를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럽게 거대한 세계 질서유지와 그 윤리적 책임을 철학으로 사유해 내는 삶의 태도이다.
이처럼 작가는 소설 속 구보 씨를 급변하는 시대의 상징으로 삼아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려고 시도했다. 작가에 의하면, 구보 씨의 소소한 일상과 사소한 관념은 인간 삶과 세계의 삶을 이어내는 보이지 않는 토대를 굳건하게 형성한다. 물론 그것은 곧바로 생산적인 삶의 결실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관념이 뒷받침된 행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가다 마침내 뜻하지 않은 순간, 기대하지 않은 찰나에 정의로운 삶을 견인하는 결과에 ‘우연히’ 가 닿는다.
이 글이 1969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도 이런 작가의 논지에 적합하다. 시기적으로, 1970년대로 진입하는 즈음에 한국 사회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했다. 근대화와 물질문명에 대한 지대한 욕구가 삶의 터전을 흔들었다. 우리가 경험했듯이, 이 시기는 경제적 근대화를 추종하며 급변하는 격변기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공동체의 삶은 나와 타인의 삶으로 점점 더 분리되고, 개별화된다. 어떤 배려도 괜한 ‘비웃음’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타인의 세계를 안정되게 다독여주려는 나의 포용을 이 세계는 무심하게 무시할 때가 많다. 삶이 부유해질수록 역설적으로 개인은 점점 고립된 사회로 끌려들어 갈 것이라는 예견도 적지 않았다. 사회는 부해지고 있지만 인간은 개별화되고 있었다.
사유를 잃어버린 채, 문학은 그런 삶의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그 처방을 위해 분투했다. 시와 소설의 역할은 탁월했다. 이런 시대에 최인훈의 이 소설은 당대 시대에 대한 문학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분투한 흔적이 오롯하다. 특히 작가는 ‘자기반성으로 관념 하는 인간’이라는 해법을 천착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문학적 제안은 사소한 일처럼 보인다. 작은 관념의 중요성에 몰두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소설에서 한 개인이 스스로 붙잡은 관념의 시간은 곧 자기반성의 수련을 함의한다는 점이다. 지속적이고 치밀한 반성의 관찰과 그에 상응하는 관념은 개인뿐만 아니라 이 세계가 올바르게 진격하는 데 단단히 한몫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감지된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이자, 추천 등단작인 「라울전」(1959)에서도 서술했듯이, 그는 인간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자기도 모르게 고립되고, 왜소해지는 인간의 자기 번민을 ‘신학의 소설’로 서술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피폐해지고 자기중심적 삶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그 평범한 사실을 문학적으로 항변한다. 비록 세계를 뒤바꿀만한 업적은 분명히 아니라 해도 관념 하는 삶은 멈춰서는 안 될 문학의, 시와 소설의 숭고한 사명이라는 말이다.
알다시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실시간으로 평화로운 삶이 공유된다는 세계는 다시 전쟁의 공포로 가득하다. 언제 끝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쟁 여파가 곧바로 나에게 밀려온다. 나와 아주 상관없을 것 같은 옛 소련 제국재건을 위한 무력정치 야망은 끝없고, 열국의 정치 저항은 속절없어 보인다. 하지만, 싸움은 사상이나 이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총과 무기로 결정 날 것이다. 또한 전선의 위험을 가중시킬수록 이 세계는 경제 정치 실이익을 계산하며 정신없이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은 아니다. 가깝게는 내 삶을 흔드는 정치가 나의 민주적 한 표로 결정되지만, 늘 그 결정은 실패의 연속이다. 나의 삶은 지극히 실패의 정치이며, 문학일 수 있다. 그러나 구보 씨는 들려준다. “누구라도 아직 절망은 이르다.”라고.
일상의 관념으로 거대한 비전을 추동하는 미시적 사유의 소중함
나는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며 문득 사유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소소한 일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관념 하기’, 그리고 글쓰기의 중요성이다. 작은 것들에 관한 관심과 관념은 그 자체로 소중한 철학, 신학 행동을 추동할 수 있다. 의견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철학 관념과 사유에 근거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삶으로 실현하는 행동일 때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장(場)인 이 세계는 곧 경계 없는 수도원과 다르지 않다. 자기 성찰적 사유는 자기 앞에서 펼쳐지는 평범한 일상을 통한 ‘거룩함의 수도(修道)’라고도 할 수 있다. 에크프라시 기법으로 신의 통치를 치밀하게 관찰하여 그림처럼 묘사하는 행위 같은 것이다. 이 기법은 그림 같은 묘사적 글로 서술하여 마치 눈앞에 펼쳐진 사물을 직접 바라보듯 서술하는 방식이다. 깡그리 하여 이 세계 질서를 끝없이 미분하면서 동시에 하늘의 뜻을 쉼 없이 적분하는 지혜자의 순례와 같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사소한 일상 앞에서 냉정한 마음으로 잠깐 ‘멈춰 생각하기’와 동의어다. 아무리 작은 것도 지나칠 수 없다. 익숙해져야 한다. 지적 사유는 어떤 경우에도 작거나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거대한 물리적, 물량적 업적 만이 그것의 성패, 결실의 질(質)을 결정짓는 척도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개념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미미한 일상에 대한 관념, 철학, 신학적 사유의 깊이로써만 그 의의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삶은 무엇을 어떻게 이뤄내는가를 관념치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일상’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왜’를 질문하고 철학하며 궁극적으로 ‘신학함(doing theology)’을 향도하는 것에 존재의의가 있다.
개인적이지만, 나는, 1세기 청년 예수가 ‘삶을 관찰하며, 관념 하며, 사유하는 행동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일상을 구원한 분’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는 현실 속에 머물면서도 현실에 침몰하지 않는다.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삶의 이면을 습관적으로 멍하게 들여다보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인간의 삶을 통전적으로(holistic) 구원한다. 그 자신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스스로 소소한 사유의 자리로 자신을 이끈다. ‘한적한 곳’(참고. 막 1:45)을 찾아 머물기를 즐겼다. 그가 일으킨 기적이 두드러지지만, 오히려 그는 답답할 정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 사소한 일, 아무도 관심 없다고 할 만한 일상의 사람과 사건을 관찰하며 인간다움을 회복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인간의 소소한 일상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철저히 사랑하는 데 몰두하는 야훼의 헤세드를 재현하려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예수야말로 일상의 치밀한 관념자이자, 행동자이며 미시적 사유의 모범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야훼가 매일 자기 피조물인 인간을 위한 애틋한 고민에 자신을 가둔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인간의 미미한 일을 관찰하며 자기를 ‘멍하게 생각하는’ 골방으로 밀어 넣는 일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예수는 일상의 관념으로 거대한 비전을 추동하는 미시적 사유와 행동의 소중함을 자기 삶으로 일깨운다. 예수는 다가오는 날에 자기 관념이 무르익어 마침내 행동으로 세계에 드러날 일을 완전히 확신했다. 절대 절망하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미미하지만 올바르게, 인내하며 행동으로 촉발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는 그의 길에서 관념 하며 쉬지 않고 걸었다. 그저 길만 걷다 하루가 다 지나갈 수 있어도 그는 내일 다시 그 길을 습관처럼 걷는다
그의 길을 따라 함께 걷는 순례자
나도 오늘 그의 길을 따라 걷는다. 발아래 펼쳐지는 작은 세계를 크게 보며 걷는다. 그리고 이 짧은 소설의 끝에 이르러 순례자로서 중요한 다짐을 생각한다. 어느 땅, 어느 상황에서나 소소한 일상은 모두 신학함의 대상이며 관념의 주제라는 것. 세계의 어떤 미생(未生)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사건의 주체라는 것, 그리고 나는 그의 하늘길을 이 땅에서 함께 걷는 소소한 순례자라는 것.
가을을 지나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꽃은 살고 죽고 다시 피고 진다. 그렇듯 굳은 땅 위에도 구름이 덮였다가 하늘 햇살이 쏟아진다. 매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 ‘자신만 알면 그만인 일과’에도 고군분투하는 나의 삶은 하늘에 계신 이의 수첩에 손글씨로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이 세계 모든 이들이 아침에 나왔던 자기 본향으로 안전하게 귀천하는 가장 소소한 행복을 안전하게 만끽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