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항의 힘-
환대라는 무언의 투쟁력

-클레어 키건, 홍한별 역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24. 다산책방,

by 푸른킴
“‘글’은 사회적 생명체다. 역사 기억으로 오늘의 삶에 저항한다.
환대를 기억하는 그 저항은 샬롬, 인간다움을 향한 투쟁의 순례다.”



“나무를 보이게 하라”

유럽의 섬나라 아일랜드 공화국(이하 아일랜드). 한때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로도 불렸다. 스러져가는 듯했던 국가 살림이 1990~2010년대에 이르러 폭발하듯 성장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분석가들은 그 성장 요인으로 화합의 정치 개혁과 미국 같은 경제 풍요 국가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들었다. 하지만, 최근 이 작은 나라가 다시 침잠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이런 생존 질곡사(史) 이면을 살펴보면 이 작은 나라가 척박한 땅을 버텨내는 한 그루 나무 같아 보인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버릴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 역설적으로 깃들어 있는 듯하다. ‘격동하는 초록 나라’라는 별칭도 어울릴 것 같다.


아일랜드의 작가 패트리샤 버크 브로건(Patricia Burke Brogan, 1926~2022)은 슬프면서도 수치스러운 조국 아일랜드의 한 역사를 세상으로 끄집어냈다. 2009년 3월 세계여성의 날에 Make Visible the Tree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의 한 소절에는 이런 싯구가 있다.

“뻔질거리는 기도/웅얼거리는 찬송을 지나/그늘 드리워진 지하 묘지로부터/엔진 두드림 너머로/나무를 보이게 하라, 말라버린 그 가지들/색바랜 수의의/탈색된 린넨으로”(전문 중 일부, 개인 번역).


이 시의 후렴처럼 반복되는 ‘나무를 보이게 하라’는 말 뒤에 뭔가 스산한 종교적 위선이 감지된다.


알려진 대로, 이 시는 1996년 문을 닫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음침한 폭력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탁소의 기원은 17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미혼모, 매춘부를 보호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들을 강제 감금하고, 노동을 착취하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보호소는 1922년 무렵 본격적으로 세탁소를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불법이 묵인되었다. 그 후 숨겨진 폭압이 드러나 운영된 지 74년 만에 중단되었다(2013년에야 완전히 폐쇄되었다). 브로건은 이 치욕 사건을 Eclipsed(1992)라는 글(희곡, 1994년)로 처음 세상에 폭로했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고백하며 성찰하는 카오스모스 문학

최근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1968~)은 브로건이 들춰낸 이 수녀원의 폭력사를 자기 문학의 배경으로 삼은 듯하다. 2021년에 출판한 Small Things Like These(홍한별 역,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 2023. 이하 『이처럼』)에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작품 이력은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1999년 Antarctica(미번역본)를 시작으로 2007년 『푸른 들판을 걷다』(다산책방, 2024), 2009년 『맡겨진 소녀』(다산책방, 2023), 2019년 So Late in the Day(미번역본), 2022년 Foster 등이다. 그의 책들은 대체로 거대한 자연 속에서 개인적, 사회적 사건에 직면한 개인의 내면을 관찰한다. 표면적으로는 안정되어 보여도 그 이면은 감춰진 채 썩어가는 사회, 힘겨운 투쟁을 불사해야 하는 개인의 내면을 조명하려 한다.


특히 『이처럼』은 감춰진 뿌리가 썩게 되는 핵인(核因)으로 사회, 국가의 치부를 묵과하는 개인의 ‘사소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한다. 이를 통해 세계와 사회가 표리부동한 방식을 유지하는 데 개인의 위장된 정의가 한몫한다는 것을 문학의 눈으로 들춰낸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최종 목적은 아니었다. 궁극적 의도는 인간의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이질적인 상태에 문학의 시선을 두고, 그 유약한 인간의 내면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려는 것이었다. 불안하고 갈라진 정서를 따뜻하게 보듬으려는 것이다. 부패한 사회로부터 개인의 내면에 이르는 고뇌의 여정을 관찰하면서 ‘비틀거리면서도 정의의 길로 걸어가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추동하려고 애쓴다. 그런 점에서 『이처럼』은 저자의 문학적 의지와 전망이 도드라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섬세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고요하면서도 요동치는 강처럼 흘러가는 인간의 내면을 주밀하게 조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의 갈등과 혼돈이 마침내 선한 행위로 마무리되는 일종의 카오스모스(Chaosmos) 문학 특징을 견지한다고 볼 수 있다. 혼란스러운 전개를 거쳐, 소설의 끝에 이르러 안정되게 평안한 주제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서술 기법 역시 주목할만하다. 저자는 시적 운율을 가진 적절한 단어를 선택한다. 간결한 문장,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세심하고 생생한 묘사를 활용한다. 등장인물들의 조용한 대립, 독백과 대화, 내면과 실제 현상의 갈등과 조화의 관찰 등을 적절하게 구사한다. 또한, 두 개의 도입구와 제목의 중의적 서술도 눈에 띈다. 『이처럼』은 그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적 산문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번역도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낭독하기에도 알맞다). 김도영은 『이처럼』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다.”(유레카, 제484호, 2024.3)라고 적절하게 평했다.


관찰문학 장르의 서술 효과-사회적 폐해에 대한 계속되는 내적 갈등의 의의

최근 영화로도 개봉되기도 한(감독 팀 밀란츠, 주연 킬리언 머피, 2024) 『이처럼』의 문학적(紋學的) 장르는 관찰문학이라 할 만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제와 그것을 서술하는 기법이다. 저자의 섬세하고 미시적 관찰 태도가 두드러진다. 표면적으로는 글의 흐름은 느린 듯하다. 무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무게가 지나치게 돌출되진 않는다. 절정, 파국, 전환적 사건이 선명하진 않다고 해도 주인공을 둘러싼 평범한 일상이 그 삶의 한복판을 시나브로 관통한다. 표면적으로는 고요한 일상일지만 그 이면에서 점차 뒤틀려가는 사회 사건이 조명된다. 주인공은 이 사건에 연루된다. 그 와중에 개인의 내면 변화를 겪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주제를 구성한다. 이처럼 ‘내면 관찰문학’으로서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평이한 서술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기법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紋) 내면의 역동적인 변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펄롱의 보편적 삶과 그가 우연히 직면한 사건이 집중 다뤄진다.


한편 작가는 이 사건에 대응하는 주인공의 내면 변화를 따라가며 그 관찰 결과를 시간 흐름으로 서술한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일종의 관찰에 근거한 일기문학처럼 읽힌다. 일기문학은 일반적인 일기가 내면의 관찰을 기반으로 문학화된 결과다. 이미숙은 “일기문학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여 기록한 ‘회상의 문학’이며 작중 화자의 ‘독자적인 인생 인식’이라고 할 정도로 ‘내면 표출의 문학’이라는 두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라고 정리한다(“일기와 일기문학의 경계-『도사 일기』와 『가게로 일기』를 중심으로-,” 「일어일문학연구」 110권 (2019), 229~249.). 이 주장에 따르면, 일기문학은 자신과 사회의 사건에 대한 한 개인의 주관적 내면을 스스로 관찰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관찰문학과 연동한다. 따라서, 내면 관찰문학으로서 『이처럼』은 자기 내면을 관찰하고 그 내적 갈등을 몸 밖으로 드러내 준다. 독자는 저자의 안내를 따라 주인공의 복합적이며 거시적인 관점을 뒤따라갈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의 내면이 어떻게 가라앉고 상승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태도를 함께 추적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인공의 거시적 관점보다 작가의 미시적 시선이 우세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소설에서는 관찰문학을 반영하듯 주인공 펄롱 개인의 성장 배경과 정보가 상세히 소개된다.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15면).
일머리가 있었고, 사람들하고 잘 지낸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건실한 개신교도 특유의 습관을 들여 믿음직했다. 일찍 일어났고, 술을 즐기지 않았다(17면).


어려웠지만, 무난하게 자란 청소년기를 거쳐, 보통 시민으로 원만하게 성장한 모습과 평범하면서도 가정적인 소시민적 특징이 뚜렷하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주인공의 삶을 위협할만한 구체적인 사건이 소개되지 않는다. 개인 성격과 가정사, 성장 배경이 소설 전반에 걸쳐 서술된다. 평범한, 아무 일 없는 일상이다. 이를 반영하듯 소설 속 시간은 연대기적으로 현재-과거-미래를 자연스럽게 아우르며 흘러간다. 그러다 저자의 시선이 급선회한다. 과거-현재, 미래-현재가 뒤섞인다.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펄롱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펄롱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어디가 되었든 나는 데려갈 수 없어.”
펄롱은 손을 들어 텅 빈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51면).


크로노스(kronos)라는 시간 흐름에 순응하는 주인공에게 카이로스(kairos, 특정 사건의 시간)가 발생했다. 우연한, 그러나 운명 같은 만남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작가의 시선은 주인공의 내면으로 좀 더 파고든다.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이동한다. 다시 말해 사소하고, 미시적이며, 평범하며, 그저 흘러가는 것 같았던 일상에서(크로노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주인공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시간으로 밀착 이동한 것이다(카이로스). 그의 가족과 이웃을 거쳐 점차 개인의 표면을 뚫고 뿌리까지 세심하고 현미적(顯微的) 태도로 움직인다. 거시적으로 흐르는 수평적인 외부 일상과 또한, 미시적으로 파고드는 수직적인 내면 관찰이 주밀하게 직조된다. 이런 시선의 전환으로 이 소설의 서사는 더 긴박하게 전개된다. 결론적으로 이런 관찰 시선의 다양한 변화는 펄롱의 내면 가장 밑바닥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반등한다. 이후 주인공 펄롱은 이전과는 달리 점차 그것을 해결해 나갈 의지와 용기를 끄집어내면서 성숙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선한 길’을 선택하면서 새롭게 전진한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중략)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1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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