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변화의 축적,”
시간의대중적 철학과학(2)

-C.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쌤앤파커스, 2019)

by 푸른킴
“시간은 관계의 축적,” 시간을 깨우는 대중적 철학과학서


시간을 담아두고 싶은 인간의 소망

다시 가을이다. 씨앗이 열매로 변화하는 계절이다. 뿌린 씨앗을 열매로 거둬들이는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변화의 척도다. 이 시간 안에서 만물은 생멸의 순환을 겪는다. 이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면 시간은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전통적으로 시간은 흘러가는 어떤 것이었다. 실증하기는 어려웠지만, 관념 속에서나마 시간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선형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누구도 ‘과거, 현재, 미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간의 정체를 파헤쳐 아예 붙잡아두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1970년 싱어송라이터 짐 크로체는 「Time in a Bottle」을 발표했다. 아내의 잉태를 기뻐하며 지은 이 노래는 “만약 시간을 병에 담을 수 있다면 / 매일 모아두겠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노래에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질문, 즉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둘 수 있는지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소망이 담겨 있다. 다른 면에서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 이론물리학센터 교수인 이론 물리과학자 카를로 로벨리도 이런 문제에 답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그는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인간의 정서를 물리학의 언어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런 소망이 실현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답을 제안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시간의 질서’를 탐구하며, ‘시간은 흐르지 않고, 관계 안에서 여러 층으로 이어진 공간처럼 머문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고대로부터 철학이 추구해 온 시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과학에 근거한 사유의 언어로 인식하여 다시 묻고 답한다. 이른바, 철학과학을 시도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과학철학이 “과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이라면, 철학과학은 ‘철학을 과학처럼 수행하려는 사유의 실험’이다.


로벨리의 철학과학 정의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The Order of Time)라는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시간을 새롭게 해석한 철학과학서다. 그는 일상적 사례와 철학을 과학 원리와 교직 하며, 시간이 단일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의 얽힘 속에서 형성된 관계망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순간조차 관계적이며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즉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여러 층위와 관계가 얽힌 느슨한 장(場)이다. 따라서, 이 책은 ‘과학철학’이라기보다 ‘철학과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 과학을 분석하는 철학이 아니라, 과학 자체를 철학적 사유와 연동하여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며, 현재 삶을 성찰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 철학 과학서로서 로벨리의 책은 이중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즉 물리학 대중서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성찰서라는 것이다. 그는 상대성이론·양자역학·열역학이라는 과학적 이론을 설명하면서, 곧바로 철학적 의미(과거-현재-미래의 무의미, 시간의 실재 여부)를 함께 사유한다. 저자는 시간에 대해 단순한 과학 해설을 넘어, ‘시간은 존재하는가?’, ‘현재란 무엇인가?’ ‘인간 경험 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드러나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이런 관점에서, 로벨리의 책 역시 고대부터 철학의 핵심 문제였던 시간의 ‘본질’을 주제로 삼아 물리학적 성과로 설명한다.


이런 서술 방식은 이 책이 철학과 과학이라는 두 영역의 접합점을 정확히 포착하면서 철학에 좀 더 방점을 찍는 장르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일반적으로도 로벨리의 책을 ‘과학철학서(philosophy of science)’와도 결이 다른, 물리학적 세계관을 대중적으로 ‘철학화’한 책으로 규정한다. 이런 흐름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책을 ‘시간 철학 과학서’라 부른다. 물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시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중심축, 시간의 해체와 재구성

책은 세 부분으로 전개된다. 1부는 우리가 믿어온 ‘절대적 시간’을 해체한다. 시간은 균일하게 흐른다는 관점이 환상이라는 것이다. 2부는 시간이 사라진 미래의 세계를 묘사한다. 황량하지만 원초적 아름다움이 있는 장(場), 공간이다. 그는 시간 없는 세계를 묘사하며, 사물 대신 사건(event)과 그 관계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본다. 끝으로 3부는 시간의 원천을 찾아간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시간이 엔트로피의 확산과 관련 있다는 점이다. 이런 확산의 결과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생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비가역적 흐름을 만들고, 이로써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은 엔트로피를 일으키는 사건의 관계 아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 있다. 이 단락에서 로벨리는 시간의 질서체(time as an emergent order)를 탐색하고 그것으로 시간을 재구성한다는 두 축을 제시한다. 시간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적 경험의 질서임을 보여준다.


책의 주된 내용과 함께 주목할 것은 글쓰기 방식이다. 그의 글은 생활에서 우주의 철학을 발견하고, 그 철학 주제를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생활 속 경험을 꺼내 독자의 감각을 열어두고, 그 위에 과학적 설명을 덧입힌 것이다. 이처럼 저자에 의해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철학을 이해하는 도구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이 보여주듯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이때 시간은 우주 전체에 단일하게 작용하는 절대적 흐름이 아니라 관측자의 위치와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국소적 현상이다. 이제 그는 시간의 문제를 넘어, 과학적 언어가 어떻게 철학적 사유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결국, 우주의 근본 법칙 차원에서는 ‘시간’이라는 틀이 사라지고 관계적 상호작용만 남는다. 로벨리의 논지는 일상의 직관을 낯설게 하는 데서 나아가 우주와 인간을 잇는 전망을 제시한다. 이제 그는 그 전망 속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온 시간 개념을 근본부터 다시 묻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철학과학적 함의

전통적으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선형이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현재이다. 더군다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랜 시간 철학자들은 이 세 개의 단위를 어떻게 이해할지를 고심해 왔다. 여전히 답은 요원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공유했다. 바로 ‘시간은 흐른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로벨리의 관점은 이른 ‘시간 흐름의 당위성’을 전환한다. 바로 양자역학에 힘입어 삶의 반경을 우주로 확장한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로벨리의 관점은 일단, 고전적 시간관—뉴턴이 말한 ‘절대 시간’—을 해체하는 것이다. 시간의 존재론적 해체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상대성이론과 양자 중력이 제시하는 시간관을 종합하여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첫째, 로벨리에 의하면 시간은 독립적으로 흐르는 실체가 아니라, 물질과 사건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우주 전체의 공통 시계”는 존재하지 않고, 국소적 상호작용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정의된다. 그의 주장은 시간의 비대칭성(“흐름”)이 물리학의 근본 법칙에서 나오지 않는다는데 근거한다.
둘째, 시간은 사건성(eventhood)과 긴밀해진다. 시간에 대한 결정론적 관점은 가역적 특징이다. 하지만, 로벨리에 의하면 시간은 여전히 비가역적이다. 엔트로피 증가라는 열역학적 현상 속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주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그물망이 된다. 시간은 사건들 사이의 상대적 질서를 표현하는 하나의 관계적 구조다. 로벨리의 견해는 시간을 열역학적 질량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특히 그의 시간 화살 이론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엔트로피의 증가와 연동된다. 엔트로피는 물리적으로 상태 변화의 무게감을 수치화한 것이다. 따라서 “변화의 질량”을 엔트로피와 연결해 해석한다면, 시간은 단순히 ‘변화의 순서’가 아니라 변화가 쌓아 올린 물리적 불가역성의 무게라고 설명할 수 있다.
셋째, 시간은 변화와 연동한다. “변화 자체가 시간”이다. ‘시간은 변화의 질량’이라는 관점은 ‘시간=변화’라는 동치 관계 때문에 로벨리의 관점과 친연성을 갖는다. 여기서 ‘질량’은 물리학의 관점에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관성 질량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성질이다. 다른 하나는 중력 질량으로 시공간 곡률과 상호작용하는 성질이다. 이들이 시간과 연결되면, ‘질량’은 변화의 저항성 또는 무게감을 상징한다. 즉, 변화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일정한 “물리적 실재”를 지니고 있다는 은유다.

시간은 ‘변화의 질서’이며, 그 변화에는 물리적 불가역성의 무게—엔트로피—가 내재한다. 이 명제는 물리학적 관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현상학적 견해에 가깝다. 즉, 시간은 본래 변화의 질서이고, 변화에는 물리적 ‘엔트로피의 무게’가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량’은 변화가 가지는 저항성 또는 무게감을 상징한다. 즉, 따라서 변화는 단순한 사건의 연쇄가 아니라, 일정한 “물리적 실재”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려는 은유다. 따라서 이 명제는 은유적 표현이지만, 엔트로피에 근거한 물리적 실체성을 암시한다. 결과적으로, 이 명제는 고전적 시간 관점인 ‘흐른다.’라는 개념을 넘어, 시간의 실재를 ‘변화의 누적된 무게감(엔트로피)’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이는 로벨리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한 단계 더 확장될 가능성을 포착한 것이다. 이처럼 로벨리의 『시간의 질서』에서 보듯, 시간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변화의 질서이자 사건의 관계이다.


요컨대 “시간은 변화의 질량이다”라는 명제는 과학적으로 엄밀한 정의라기보다, 엔트로피를 ‘변화의 무게’로 이해하는 시적·철학적 표현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변화 그 자체이고, 변화에는 엔트로피라는 ‘질량적 성질’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이 명제는 로벨리의 관점을 더욱 심화한다. 결국, 시간은 ‘변화의 질량’으로 읽힐 수 있다.




코헬렛, 장자, 그리고 로벨리, 공통점과 차이점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푸른킴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멀리, 사람 틈에서 오래 걷길 즐기고, 특히 한 산의 모든 길을 걷습니다. 매일 글쓰기를 즐깁니다.

7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39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3화모든 삶은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