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김인순역. 열린책들, 2014.
사라지는 그리고 살아지는 삶에 관한 자기 성장소설
“뿌리로 향하는 인간의 성장과 성숙의 계절
소설 너머 나에게 닿기”
사라지는 것과 살아지는 것―완벽한 심포니
가을 끝, 햇볕이 따사로워 청명하다. 다행히 오전 9시 한 라디오 음악방송의 여는 곡이 여전히 ‘가을’답다. ‘퍼펙트 심포니 Perfect Symphony.’ 곡명이 인상 깊다. '빈틈없이 잘 어우러진 노래?'. 노래를 들으며 원두커피를 내린다. 디카페인 시다모(D-Sidamo)다. 상큼한 향기가 좋다. 불볕과 처서가 만나 마시기에 딱 맞는 온도가 되었다. 창밖을 내다본다. 지난봄, 새하얗던 아카시아 꽃잎이 빛바래진 오래다. 자유롭게 떨어져 잎만 무성해졌다. 지난여름, 무더위가 몇 달 사이에 기억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커피가 줄어드는 시간, 나는 음악과 함께 지난여름의 어느 숲을 걷는 나를 가볍게 상상한다.
나에게 숲은 언제나 ‘살아지는’ 은총의 토포스다. 적절한 습도, 나뭇잎들의 살랑거림이 어우러져 바람이 불 때마다 상쾌한 기분이 든다. 한여름에는 숲마저 헐떡였으나 새들의 소리는 생기 차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고, 가냘픈 비가 내리면 습관처럼 숲을 걷는다. 그것은 사라지는 계절의 끝에서 살아나는 숲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사라지는 자연을 응시하며 나는 소설 『데미안』을 다시 생각한다. 책을 떠올리며 걷는 평화로운 순례다. 몸은 가벼워진다. 생각도 자연스럽게 껍데기를 깬다. 하지만, ‘껍데기를 깬다.’라는 말속에는 근접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 ‘아브락사스(Abrasax)’와 함께 걸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안한 실존이 담겨있다. 자연스럽게 이는 지난날 나의 내면을 깨뜨리며 일어난 어떤 변화와 겹쳐진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면 습관처럼 나의 성장, 성숙을 일으키는
내면의 변화가 몸을 두드린다.
신,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가는 새의 분투
1919년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는 소설 『데미안』(Demian)을 발표했다 [번역본. 세계문학 222, 김인순 역 (서울: 열린 책들 세계문학, 2014)]. 최근 내가 참여하는 어느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함께 읽고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오래전 읽었던 책이라 해서 식상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양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다. 나도 오랜만에 상상력을 덧붙여 천천히 읽을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어릴 적 내가 걸었던 여러 길들, 도로와 숲길들이 떠올라서 좋았다. 그리고 요즘, 다시 길을 걸으며 그 시절 헤세가 환생시킨 창의적 신 ‘아브락사스’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모인 사람들에게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마치 보는 듯이 만나보라고 강조해서 소개했다. 이 신이 등장하는 문장도 다시 기억하자고 말했다. 누구나 알고 있을 저 유명한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 이어진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제5장, 127쪽) 하지만, 앞 문장보다 뒤따르는 신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의외로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 『데미안』의 또 다른 핵심 존재가 보이지 않는 신, 아브락사스라 생각했다. 신화 속 선-악 신(善-惡 神)이고, 실존하진 않는다. 인간의 사유 속에서 환생할 뿐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존재 그가 바로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다. 소설 안에서 뿐 아니라 소설 밖에서도 그 신은 보이지 않게 상재(常在)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존재하기에 생각한다.’라는 실존의 가치가 이 전설적 신에게 투영되어 있다.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아브락사스라는 신은 선과 악의 두 세계 사이에서 분투하는 ‘새’가 날아가 깃드는 안식처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비행하는 새는 경계에 선 인간을 함의한다. 여기서 경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드러나지 않게 가르는 선이다.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어린 싱클레어는 이 궁극적 ‘신’을 향해 투쟁하며 나가는 역경의 순례를 감수하는 순례자 같다. 헤세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는 이 인물은 새라는 이미지로 분투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그 ‘새’는 껍데기를 깨고 나와 신에게로 날아가는 지적 투쟁을 감당한다. 이 새가 경계에 선 투쟁자 싱클레어, 곧 헤세 자신이라면, 나는 그것을 혼돈의 시대에 휩쓸려 사라지는 인간 자신이며 동시에 ‘살아지게 하는 타인’으로서 자신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미안』에는 투쟁하는 새만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새의 투쟁을 일으키는 기제도 함께 있다. 새를 둘러싼 숲이다. 앞서 말한 대로, 싱클레어를 함의하는 새는 숲이라는 기제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에 연결된다. 이 새와 숲들은 ‘완벽한 심포니’를 이룬다. 이 음악 같은 상호 연대의 분투를 마치고 알에서 깨어난 새는 마침내 이 세계에서 자유한다. 행복하게 비행한다. 요컨대 그 숲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치열한 투쟁을 위한 소음(騷音)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하고 행복한 소음(笑音), 웃음소리다. 이 웃음 끝에서 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뚫고 나와 마침내 이 세계에 던져진 자신에게 닿는다. 성장의 절정은 바로 자기 안을 향할 때 이뤄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설 『데미안』은 성과 속의 경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온몸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순례하는 인간으로 전진하는 성장소설이며, 동시에 어른에게는 재성숙을 촉구하는 성숙소설이라 규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서술―에크프라시스(ekphrasis)의 문학적 기능
『데미안』의 세부적인 장르는 ‘자기-성장 소설 Selbst-Bildungsroman’에 가깝다. 이 소설에서 성장의 방향은 높이, 위로, 하늘로만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내면, 저 아래 뿌리로 하향한다. 따라서 그 성장은 보이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세계다. 다소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런 성장은 마치 라디오 속에서 밖으로 쏟아지는 소리의 존재와 같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그 심연에서 존재하고, 살아있는 세계로 표출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마치 무엇인가를 눈으로 보듯 그려내는 다양한 소리가 존재한다. 이는 고대 문학적 수사 기교의 하나인 ‘에크프라시스(ekphrasis)’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말해, 소설 『데미안』은 이 에크프라시스 기법을 찾아가며 읽을 때 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 기법은 기원전 8세기에 발흥하여 기원전 2~3세기에 활발하게 교육되었다. 이 고대 수사학적 기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생생하게, 생동감 넘치게, 상상하듯 서술’했다. 이 기법의 효시는 호머의 일리아드의 제18권 478~608행에 소개된 ‘아킬레우스의 방패’다. 이 중에 방패를 묘사하는 부분(478~487행)인데, 바로 이 대목이다.
478 제일 먼저 그는 거대하고 견고한 방패를 만들었는데,
구석구석 세심히도 다듬어가며 둘레에는
찬란한 빛을 뿜는 세 겹의 테두리를 쳤고, 은으로 끈을 달았다.
방패 판은 다섯 겹이었고, 그는 능수능란한 구상을 펼치며
그 위에 수많은 장식을 새겨 넣었다.
거기에 그는 대지와 하늘과 바다를 만들고,
지칠 줄 모르는 헬리오스와 보름달을, 그리고
하늘이 제 머리에 두른 모든 성좌를 만드니
플레이아데스와 휘아데스, 그리고 오리온의 힘,
487 또 사람들이 ‘마차’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큰 곰이었다.
[출처:호메로스, 『일리아스 ILIAS』 이준석 역 (서울: 아카넷, 2024), 572-573.]
글을 읽다 보면, 존재하지 않는 방패가 내 눈앞에 화려한 문양으로 바로 나타난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만드는 에크프라시스 기법이다. 그런데 현대적 의미에서 에크프라시는 대체로 “예술 작품을 글로 묘사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그리스어로서 주로 ‘에크프라시스 적이다’라는 형용 어귀는 예술 작품을 시적 표현을 통해 상상하듯 생생하게 묘사한다.”라고 풀이한다. 핵심은 구체적인 조형물을 마치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글로 재서술하는 것으로 변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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