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 살아나는 이야기 —
우연히 책을 읽는다는 것

by 푸른킴


황현산, 글쓰기 자신을 넓히는 ‘잡다한’ 지혜

그게 문제였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잠들기 직전, 문학비평가 故 황현산(1945~2018)의 『현대시 산고』(난다, 2020)를 뒤적였다. 읽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한 가벼운 독서였다. 아무 데나 펼쳐 든 페이지, 우연히 마지막 단락이 눈에 들어왔고, 그 몇 줄 때문에 잠들 시간을 훌쩍 지나치고 말았다. 그 글은 2014년 <21세기문학> 봄호에 실린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이었다.


처음엔 ‘잡다한’이라는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었더라면 편히 잠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읽어갈수록 그 단어가 조금씩 진동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그중 비평가의 의미에 대한 글이 있다. ‘비평가는 자기 앞에 놓인 텍스트를 가능한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읽어낼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사람.’ 이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잡다한’은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었다. 평생 글을 업으로 삼아온 노비평가가 이제 막 등단한 젊은이들에게 남기는, 담담하고도 절절한 조언, 거의 유언에 가까운 지혜의 말이었다. 내 몸에도 생기가 돌았다. 과하게 말하자면, 그 글은 평론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명심(明心)’해둘 만한 ‘보감(寶鑑)’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글이 오히려 저자 자신에게 남겨둔 메모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평생 글쟁이로 살았다. 이 글은 자기 젊은 날을 돌이켜보며 조용한 자기반성으로 적어둔 것처럼 들렸다. 자기 고뇌의 기록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그가 남긴 인터뷰도 떠올랐다. 그는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넓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글쓰기란 결국 자기 세계에 대한 가장 검소한 확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비평가였지만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의 문장에는 세계와 나와 우리를 부드럽게 엮어주는 시인의 철학이 배어 있다. 오늘 다시 읽은 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조언이 내 마음을 다시 흔들어 깨웠다. 책을 펼칠 때만 해도 스르르 잠들 것 같았는데, 그 뜻깊은 조언 때문에 모든 잠이 달아나버렸다. 어느새 나는 철학가 故 박이문(1930~2017)의 산문집 『길』(미다스북스, 2003)을 다시 꺼내 들고 있었다.


박이문, 길을 지니고 사는 사람

박이문은 시인이며 철학가이다. 그가 남긴 낡은 에세이 모음집은 겉보기에는 평이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진진한 철학적 사유가 깊게 깔려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문장인가 싶었다. 그런데 갈수록 오묘한 사상이 길처럼 드러났다. 저자는 그 길들을 단정하게 갈무리해 삶의 지혜로 들려준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붙잡게 된 이유를 떠올려보면, 머리말의 첫 문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고, 누구나 길을 지니고 산다… 이 길 위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간다.”(4쪽)


18년 전 초판본을 사서 읽던 당시, 나는 솔직히 이 문장에 적잖은 거부감마저 느꼈다. 특히 ‘길을 지니고 산다’는 표현에서 괜히 거북하게 덜컹거렸다. 그때의 나는 ‘길’은 주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그날을 돌아보니, 나의 생각이 철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멀리 둘 수 없었다. 틈만 나면 꺼냈다 덮었다, 펼쳤다 다시 읽었다를 반복했다. 살갑지는 않았지만, 곁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친구 같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길을 지니고 산다’는 말의 의미가 시나브로 체감되었다.


그의 문장은 지금 다시 봐도 매력적이다. 특히 ‘지니고’라는 단어는 절묘하다. 철학이 문학으로 옷 입고, 문학은 다시 철학을 떠받치는 견고한 도구가 되는 순간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단어 안에 그 만남의 길이 숨어 있다. 길을 ‘지닌다’는 표현은 너무 적확했다. 세계의 모든 길이 곧바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걸어야 비로소 길이 된다는 사실을 기막히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박이문의 문장은 단아하지만, 건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건조함 속에 묵직한 강직함이 있다. 그의 글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노학자가 자기 인생을 ‘길’이라 칭했고, 자신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고독한 존재로 명명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학문의 정상에서도 그는 여린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으려 긴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삶에 대한 당당함보다 두려움과 불안이 그의 문장에 고요하게 배어 있다. 아마 그는 ‘경외(敬畏)’와 ‘불안(不安)’이야말로 인간을 나이 들어서도 겸손하게 만드는 미덕이라는 사실을 생의 끝자락까지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분명 철학자였다. 그러나 시인이었다. 나는 그를 정의하길, 삶을 경외하며 침잠하는 문학인, 곧 ‘시인’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미미한 것을 품고도 가장 넓은 세계의 길을 펼쳐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생각이 이어지자, 내 손은 자연스레 또 다른 책을 향했다. 황대권(1955~)의 『야생초편지』(도솔, 2002)다.


황대권, 감옥에서도 생명의 길을 찾은 일초야생(一草野生)의 결의

황대권은 1985년 조작된 구미간첩단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복역했다. 그가 교도소 안에서 만든 야생초 화단은, 억압된 공간 속에서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바깥’이었다. 그는 하루하루 야생초 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록했고, 출소 후 그 글들을 『야생초편지』라는 제목으로 묶어냈다.


책 속에는 그가 직접 그린 야생초 그림도 실려 있다. 소박하면서도 기이한 생명감을 품고 있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실 나는 출간 직후 이 책을 읽고도 한동안 책꽂이에 ‘잡초’처럼 내버려 두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야생초’라는 말이 당시의 나에게는 그리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고 피었다 지는 풀의 운명에, 괜한 아쉬움과 쓸쓸함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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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주 가끔 그 책을 다시 꺼내 본 적은 있다. 길을 걷다 눈에 밟히는 어떤 야생초가 책 어딘가에 묻혀 잠들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의 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황대권에게 야생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안동교도소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이유 없이 생멸을 두려워해야 했던 그가 살아낼 수 있었던 최소한의 토대, 생의 버팀목이었다. 야생초가 살아 있으면 그도 살았다. 야생초가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지면, 그에게도 그런 소멸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한다.

잠들기 전, 나는 다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야생초 뿌리를 캐어 만든 ‘십전대보잼’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보약도 아니고, 명품 요리도 아니다. 그저 출소 후에 맛있게 먹어보고 싶은, 조금은 우스울 만큼 소박한 상상이 담긴 글이다. 장사를 할 생각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문득 이 마지막 이야기를 굳이 배치한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편집이 글쓴이의 마음 어느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나도 헤아려보고 싶었다.


아마도 황대권은 출소 후 투옥 중 가꿨던 야생초를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세상으로 나아 보니, 갇힌 그 공간에서 야생초에 의지해 살아냈던 자신의 ‘생’이 떠올랐던 것 같다. 잉어의 몸이었지만, 사실은 그곳에서 삶이 ‘일초야생(一草野生)’, 즉 들풀 한 포기의 생처럼 질기고 고요했던 삶의 형식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 깨달음이 새로운 야생초처럼 마음 한편에 크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한 가지를 확신한 사람처럼 보였다. 삶을 떠받치는 힘은 대개 그 야생초 같은 끈질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든 자신의 생이 들판의 야생초처럼 이름도 없이 스러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인도 모른 채 삶의 무너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상황에서 야생초의 의미는 적지 않다. 야생호는 화려한 꽃은 아니다. 그저 생을 근근이 버티게 하는 조용한 생명력이 전부다. 그러나 그 힘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성비 좋은 삶’을 살아가는 진짜 토대라고 그는 믿었던 듯하다.


그의 글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또 한 사람의 시인이 떠오른다. 나는 나희덕(1966~)의 산문집 『반통의 물』(창작과 비평사, 1999)을 꺼내 마시듯 펼쳤다.


나희덕, 반 통의 물이 흘러가는 길의 가치

솔직히 이 책은 썩 유쾌한 문학은 아니다. 물이 반 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밀치지 않고 틈만 나면 잊지 않고 꺼내 읽는다. 오늘 앞서 펼친 책들을 생각하다 보니 또 자연스레 한 문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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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 책의 제목인 수필 ‘반통의 물’에 나오는 문장이다. 솔직히 처음 읽었을 때는 조금 식상한 미사여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농사일에 여념 없는 이들에게는 철없고 한가한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농사는 지난한 땀의 결실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는다.


물통을 들고 걸어갈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집 가까운 텃밭을 일구는 한 할아버지인데, 한쪽 몸이 마비된 상태로 성한 팔 하나에 물통을 들고 절뚝이며 걸어간다. 물은 걸음마다 찰랑거리며 바지를 적시고 길로 흘러내려 결국 반 통도 채 남지 않는다… 그 젖은 길은 이내 말라버렸지만, 나는 그 길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길을 별로 보지 못했다… 반통의 물을 잃어버린 그 발소리. 절뚝거리면서도 남은 물을 살아 있는 것들에게 쏟아붓고 싶은 마음, 그런 게 아니었을까.(27–28쪽)


‘반통의 물’은 결국 식물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어떤 ‘농부의 발자국’에 닿아 있다는 이야기다. 절뚝이며 흘린 물이 채소를 살리고, 채소는 그 발자국을 기억한다. 생명은 종종 결핍된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잔잔하게 드러낸다.


요즘 시대라면 이런 이야기는 신파극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은 장면을 지나치게 포장한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이 산문은 과장되거나 지나친 문학적 수사에 기댄 글이 아니다.


비록 낡아버린 감성에 연결되었다 해도, 이 글에서 나는 여전히 내 삶을 깨우는 어떤 문학적 지혜를 듣는다. 그 소리는 ‘잡다하고 야생초 같으나 마음에 지니고 살 만한’ 조언 같은 것이다. 문학의 조언이란 문학이 건네는 따뜻한 권면이다. 문학의 관점에서 삶을 살아가는 힘은 결국 인간이 세계와 이어져 만들어내는 고유한 자기 이야기에서 창발 한다.


이처럼 문학은 그 자기 이야기를 비추는 작은 등불이며, 우리가 자기 길에서 겪는 미미(微美)한 순간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돕는다. 결국 나희덕의 산문은 그 미미한 이야기에서 철학을 잉태하고, 철학은 다시 문학을 거쳐 생의 한 모퉁이를 지탱하는 힘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일상의 이야기에서 보여준다. 이 철 지난 산문집은 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우연한 독서, 검은 안식의 철학으로 가는 징검다리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잠을 밀어내던 문장들이 어떻게 가라앉았을지 궁금해 창문을 열어보니, 밤새 내린 서리가 창밖 나무 위에 고요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황대권의 글을 떠올려보자면, 햇살이 서리 위에 스며들며 야생초 한 줄기마다 작은 꽃망울 같은 빛의 결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어둠의 시간은 이렇게 사물을 새롭게 한다. 어젯밤 책들이 내 마음속에서 일으킨 변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천천히 길로 나섰다. 공기에 남아 있는 서늘함은 밤의 잔향을 품고 있었고, 들판은 이미 투명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휑한 들판 위에 밤새 떨어진 낙엽이 숲길을 살짝 덮고 있었다. 이 조용한 풍경은 미미한 것들이 어떻게 세계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고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어젯밤 내가 읽었던 책들이 다시 한 가닥 줄처럼 이어졌다. 황현산의 ‘잡다한 조언’, 박이문의 ‘지닌 길’, 황대권의 ‘일초야생’, 나희덕의 ‘반통의 물’—네 이야기는 각기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 듯하지만, 결국 한 가지의 진실에 수렴한다. 삶을 지탱하는 힘은 거대함이 아니라, 미세하고 비가시적인 세계의 진동에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이 진동을 듣는 사람들—젊은 비평가, 고독한 철학자, 교도소의 야생초를 돌보던 이, 반통의 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농부—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자기 길을 찾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검은 안식(Black Sabbath)의 철학’을 떠올린다. 검은 안식은 어둠의 시간에 서는 법, 즉, 생의 표지들이 모두 사라진 까만 순간에도 내면의 가장 조용한 리듬을 감지하는 수행이다. 야생초 위의 서리처럼, 반통의 물이 적신 길처럼, 잡다한 조언들 사이에서 번져 나온 미세한 울림처럼, 검은 안식은 삶을 멈추고, 비워두고, 들숨처럼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늘 걷기와 독서라는 두 방식으로 나의 몸을 자극하며 찾아온다.


내 몸으로 즐기는 길 걷기와 독서

걷기는 몸으로 하는 ‘검은 안식’이다. 걸음은 삶의 리듬을 가장 단순한 단위로 쪼개어 다시 듣게 하는 철학이다. 일상의 소음에서 벗어난 작은 틈 속에서 세계가 나에게 들려주는 가장 원초적 음향을 포착하는 신학이다. 걸음은 세계를 향한 나의 가장 오래된 기도이자, 내가 만들어가는 ‘지닌 길’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철학의 사건이다.


반면 독서는 마음과 몸으로 하는 ‘검은 안식’이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세계는 조용히 멈추고 타인의 사유와 나의 내면이 서로의 숨을 맞춘다. 독서는 세계에 내리던 빛을 잠시 끄고, 어둠 속에서 다른 구조물을 더듬듯 나의 삶을 다시 읽게 한다. 그 어둠은 바로 검은 안식이 살아 움직이는 삶의 터전, 고요한 심장이다.


걷기는 검은 안식의 리듬을 ‘몸’으로, 독서는 그 리듬을 ‘의미’로 드러내는 길이다. 둘은 결국 동일한 수행의 두 얼굴이며, 삶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재배열하는 이중의 형식이다. 야생초와 같은 삶을 지나며 나는 다시 깨닫는다. 세계는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아니라, 들판의 가장 변두리에서 질긴 생을 이어가는 미세한 존재들로 견고해진다는 것을.


검은 안식의 철학도 결국 그 미세한 존재들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는 활동, 그 ‘작음의 윤리’를 다시 붙잡는 사유에 다름 아니다.


걷다 보니, 이 아침의 길이 어젯밤의 독서와 이어진다. 책은 어둠 속에서 나를 흔들었고, 들판은 새벽의 빛 속에서 그 흔들림을 다시 정리해 준다. 독서가 삶을 내부에서 흔드는 일이라면, 걷기는 그 흔들린 마음을 세계와 나란히 정렬하는 일이다.


그들이 걸은 책의 길을 나도 함께 걷는 밤

검은 안식은 이 둘 사이에서—밤과 새벽, 책과 길, 어둠과 빛 사이에서—비로소 생성된다. 야생초 같은 나는 이 논둑길 같은 나의 삶을 걸으며 세계에 나를 잇댄다. 어젯밤 책 속에서 들려오던 조언들은 이제 바람과 서리의 소리로 다시 들린다. 잡다한 말들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고, 지닌 길이 하루를 붙잡아주었으며, 야생초의 생이 나를 돌아보게 했고, 반통의 물이 내가 남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따뜻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울림은 검은 안식의 공간에서 다시 연결되고, 다시 해석된다.


책을 읽는 일은 가장 미미한 습관이다. 하지만, 그 미미함 속에서 우리는 검은 안식의 어둠을 기어이 통과하고, 지식 너머의 삶을 부감하는 힘을 얻는다. 우연한 독서는 세계를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일이며, 걷기는 그 멈춤을 다시 세계 속으로 데리고 나오는 일이다. 그리고 이 두 움직임 사이를 잇는 것이 바로 검은 안식이라는 또 하나의, 가장 깊은 길이다. 그래서 뜻밖의 독서는 곧 알 수 없는 길을 걷는 일이다. 하지만 검은 안식의 어둠을 지나 의식의 항구에 안착하는 길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유하는 도석(道釋)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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