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책 너머를 읽다], 마틴 부버. 복있는 사람. 2025.
“변하는 세계에서 한 걸음 비켜서는 철학”
“신은 죽지 않았다. 인간이 가렸을 뿐이다.”
“부재 아닌 관계의 붕괴…비켜섬과 신존재”
“검푸르고 넓은 바다 곳곳에 섬들이 떠 있다. 그 섬들은 무인도처럼 적막하며, 가끔 작은 배들이 스치듯 드나들 뿐이다. 그중 어느 한 섬에는 등대가 서 있다. 등대의 불빛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지만,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기보다 오히려 어둠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빛이 반짝이는 순간마다 바다는 역설적으로 더 검게 느껴진다. 잠시 빛이 드러낸 수평선 너머로 건너편 육지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은 누릇한 노란빛이 감도는 항구다. 배들은 밀려나듯 바다로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섬 주변을 배회할 뿐 육지에 좀처럼 닿지 못한다. 겨우 한두 척의 배에서만 사람들이 오르내릴 뿐이며, 내린 이들이 다시 돌아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등대는 어둠의 윤곽만 드러내 준다. 오늘의 세계에서 빛도 삶의 경계를 조금 보여준다. 차단된 세계는 생각보다 넓다. 나는 이런 상상 속 차단을 현실에서도 체감한다.
최근 갑작스럽게 세계를 덮친 폭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질서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하얗게 덮인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기보다는, 거대한 자연의 변화 앞에서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무력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가시적인 도로의 뒤엉킴이 아니다. 눈 내리는 풍경 속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 내면의 뒤틀림이 더 본질적인 문제다. 오늘날 인간 사회는 진리가 어그러지고 정의와 공의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심하게 왜곡되어 가고 있다. 눈이 내릴 때 잠시 아름다웠다가 이내 길이 헝클어지는 것처럼, 마땅히 지켜져야 할 가치들의 질서가 빠르게 붕괴하는 것 같다. 인간은 그 균열 사이에 빠져 깊은 회의감에서 힘겨워하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세계를 지탱할 절대적 기준이나 보호자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서서히 절망한다.
신의 침묵, 죽음과 부재 사이
전통적으로 신(神)은 세계의 질서와 정의를 보장하는 존재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신은 오직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땅히 개입하여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존재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인간의 고통은 탄원으로 변한다. 탄원은 곧 신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이 빚어낸 오래된 질문이다.
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후, 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니체로 대표되는 ‘신의 죽음’이다. 이 흐름은 신이 더는 인간 삶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며 인간의 능력을 부각한다. 다른 하나는 ‘신의 부재’다. 이는 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시야에서 ‘숨어 버렸다’라고 단정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단절된 비극적 상태를 강조한 것이다.
결국, 현대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이 죽었다는 부정과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부재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린다. 부버는 1952년, 『신의 일식』(Eclipse of God: Studies in the Relation between Religion and Philosoph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2; 독일어판 Gottesfinsternis, Zürich: Manesse Verlag, 1953.)을 출간하며 이 흔들림의 본질을 깊이 다뤘다.
『신의 일식』: 표지에 담긴 ‘탈색’된 시대의 시선 훑어 읽기
이 책은 2025년 국내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특히, 책의 표지가 눈길을 끈다. 샤갈의 <창조 creation>(1960)로 알려진 작품이다. 표지 상단에는 햇빛이 번지고 그 아래로 검고 푸른빛이 뒤섞이며, 맨 아래와 뒤표지는 노란색으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 노란색 부분에는 흐릿한 형체의 한 사람이 눈을 뜬 채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림이 새로 추가되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인터넷에 공유되는 원본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색조인 것 같다. 표지의 그림은 원본의 파란색과 흰색 중심의 색감이 빠지고 노란색이 스민 혼합색으로 변모하면서, 원색의 선명함이 바랜 듯한 강렬한 ‘탈색’이 감지된다. 특히 표지 아래 노란 띠지에 새겨진 오른쪽 위를 응시하는 인간의 모습은 당대의 차가운 이성이 내려앉은 듯한 서늘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제목도 주목할 만하다. 독일어 원제에 쓰인 ‘Finsternis’는 단순한 어둠(Dunkelheit)을 넘어 칠흑 같은 암흑, 뚫기 어려운 완전한 어둠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의미가 천문학적 현상인 ‘일식(Eclipse)’이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일식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끼어들어 해를 가리는 현상이다. 여기서 가림의 주체는 달이다. 그렇다면 번역본의 ‘신의 일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신이 달처럼 무언가를 가리는 주체로 행동한다는 가설이다.
둘째, 신이 일식의 대상이 되어, 신과 인간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어 신을 가려버렸다는 이해다.
부버가 말하는 의미는 후자다. 즉, 신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무언가가 신을 짙은 어둠 속에 가두어 버렸음을 함의한다. 결국, 책의 제목에서 ‘신의 가림’이 드러난다. 부버는 신이 인격적인 ‘너’가 아닌, 하나의 ‘그것’으로 대상화되어 인간의 인식 속에 갇혀버린 결과를 탄식한다.
이 책은 부버의 강연과 저술을 엮은 것이다. 1929년부터 1952년까지 부버가 천착해온 사유의 집약체다. 특히 1950년대 이전은 인간 중심의 사상이 거대한 물결로 출렁이던 시기였다. 이 즈음에 부버는 예루살렘을 떠나 미국의 여러 대학을 여행하며 강연했다.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부버가 포착한 시대적 징후를 담고 있다. 그 징후는 종교가 현실과 분리되는 방식, 그리고 철학과 윤리가 서로를 오해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부버는 이 책에서 종교를 축으로 삼아 현실, 철학, 윤리, 정신과의 관계를 다룬다. 책 중에서 ‘신을 향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관념’(87쪽 이하)과 마지막 글 ‘신,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라는 두 글이 전반적으로 견고한 기둥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가볍게 지나갈 수 없는 것은 부록에 실린 ‘융의 반론에 대한 응답’(211쪽 이하) 일 것이다. 부버는 시종일관 신을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칼 융의 주장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반박을 이어간다. 부버에게 신은 ‘내 안의 투영’이 아니라, 외부에서 나를 부르는 실재로서 ‘너’ 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속도를 내어 읽기보다, 문장 사이에서 부버가 제기하는 논쟁의 심연을 살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독법이 좋을 듯하다.
책의 핵심 질문과 인간이 만든 벽
그런 읽기 끝에서 우리는 부버가 단도직입적으로 던지는 질문에 마주한다.
“세계가 어두운 것은 신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을 향한 길이 막혔기 때문인가.”
사실, 이 질문은 책의 머리말에서 부버가 자기 경험을 통해 구체화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단지 가설이다.’라고 말한 어느 노동자의 목소리와, ‘초월적인 것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에 담을 수 있느냐?’라고 묻는 노(老) 철학자의 질문에 대해 변증 한다. 이를 통해 1930~50년대의 회의주의와 신 부재론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는 신은 인간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에 의해 ‘가려진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그 벽을 구성하는 세 가지 재료를 다음과 같이 지목한다.
① 지성의 습관: 설명하려는 욕망
근대 이후 지성은 세계를 분석하고 통제하는 데 탁월한 성취를 거두었으나, 그 성취가 관계의 언어를 대체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신을 ‘만나는’ 대신 ‘설명’하려 하고, ‘경청’하기보다 ‘정의’ 내리려 하는 습관에 빠진 것이다. 부버는 철학이 설명을 지향할 때, 오히려 종교는 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본질적 인식’의 영역으로 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성이 등대의 빛으로 항로를 찾는 대신 등대의 구조를 해부하느라 정작 바다 위에서 방향을 잃게 될 때, 지성은 신을 가리는 첫 번째 ‘달’이 되기 때문이다.
② 심리적 환원: 내면의 감옥에 가두기
부버가 보기에 심리학은 신을 인간 심리 구조 안으로 회수해 버릴 위험을 내포한다. 신이 ‘자율적인 심리적 내용’으로 축소되는 순간, 신은 외부에서 나를 부르는 ‘너’가 아니라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투영물이 된다. 결국, 인간은 신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심리와 독백하게 된다. 부버는, 인간은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단’할 뿐이라고 일갈했다.
③ 자기-믿음: 불확실성을 가리는 성벽
인간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신을 알려고 하기보다, 자신을 믿는 믿음으로 신의 의의를 밀쳐낸다.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신을 성벽으로 삼고 그 안에서 안전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 견고한 자기 확신은 타자의 고통이나 신의 음성이 들어올 틈을 지워버린다.
해법으로서 비켜섬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벽’ 앞에서 부버가 제시하는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세워 둔 벽을 옆으로 조금 옮기는 ‘비켜섬’의 결단이다. 이는 더 큰 지식의 체계를 쌓는 대신 자신의 점유를 줄이고, 성급한 해석을 내리기보다 침묵 속에서 경청의 자리를 남겨두는 일이다. 그 작은 자리 이동이, ‘가림’을 ‘만남’으로 바꾸는 마중물이 된다. 그런데 부버는 이런 해법의 끝에 아예 희망까지 선언한다.
“내일이라도 그사이에 끼어든 것이 물러설 수 있다.”(210쪽)
따라서 부버의 주장은, “장벽을 쌓은 주체가 인간이기에, 그것을 옮길 수 있는 권한 또한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의 희망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실천 윤리와 단호한 희망을 동시에 함의한다.
부버의 논지와 핵심 논거들
부버의 대전제는 명확하다. 흔들리는 세계와 불안한 실존을 여전히 신의 관점 아래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사유는 ‘현실(reality)’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절대화하며 신의 빛을 가리는 왜곡된 관념으로 고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부버는 이 책에서 1950년대 전후를 휩쓴 ‘신은 죽었다’라는 실존주의적 관념이나, ‘신은 인간 내면의 투영이다.’라는 융의 심리학적 사상은 모두 신을 ‘너(Thou)’가 아닌 ‘그것(It)’으로 환원해 버린 인간 자신에게서 기인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이를 종합하여 부버의 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을 가려 어둠 속에 가둔 원인은 신에게 있지 않다. 인간의 자기 사유(thought)에서 발원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인간의 ‘무사유(thoughtlessness)’도 문제지만, 마틴 루터와 본회퍼로 이어지는 ‘자기 안으로 굽어진(cor curvum in se)’ 사유도 신과 인간관계에 심각한 오류를 일으킨다는 비판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그것(It)’으로 환원될 위험이 짙기 때문이다.
부버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요한 논거를 여러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제 그 흩어진 세부적인 논거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나-그것’ 대상화
부버는 ‘나-너’ 관계의 붕괴를 주목한다. 신과의 관계가 ‘나-그것’으로 미끄러질 때 신은 인간 내부로 내면화되며 인격적인 ‘너’로서의 지위를 잃는다. 철학이 설명하려는 욕구로 신을 자기의식 속에 가두려 할 때, 대상을 소유하고 조작하려는 대상화의 결과에 이른다. 나를 지켜주는 줄 알았던 보호막이 실제로는 신의 빛을 막는 차단막이 되는 것이다. 이 장벽들이 겹치는 지점에서 신은 드러나지 않는다.
② 융(Jung)과의 대결: ‘차단’의 문제
부버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칼 융의 심리학과 논증한다. 부버가, 융이 종교를 ‘인간 영혼 내부의 정신적 과정’으로 정의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이 종교를 ‘내면의 정신적 과정’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을 심리적 내용으로 고착시키는 순간 신은 외부에서 말을 거는 ‘너’가 아니라 ‘내 안의 무엇’으로 굳어진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여기서 부버는 신의 ‘부정’이 아닌 신의 ‘차단’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한다. 융의 도식에 따르면 인간은 신을 굳이 부정하지 않고도 소통의 문을 닫아버릴 수 있다. 이 책에서 융과의 논쟁은 ‘일식=가림’이라는 명제를 선명하게 입증하는 부버 주장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③ 시대적·공간적 배경: 가림을 필연화한 20세기 초 정치 사회적 장소성
신의 가림은 관념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굳어진 결과이다. 1,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 이념 갈등, 실존적 불안 속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기 확신과 내면의 사유를 절대자로 세웠다. 이처럼 1930~50년대 유럽의 파국과 미국의 불안, 그리고 이념과 소비가 지배하던 시대적 조건 속에서 신의 부재라는 주제가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 까닭이 있다. 당시의 사조는 초월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밀어냈고, 파편화된 현실과 자기 확신을 절대적인 가치로 세웠기 때문이다. 그 시대가 필연적으로 ‘신은 죽었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주장은 매우 손쉬운 결론으로 유통되었다. 그 결과 초월자는 추상으로 밀려나고 ‘신의 죽음’이라는 결론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부버가 이 강연을 예루살렘이 아닌 미국의 대학에서 행했다는 사실은 이런 시대적 사유가 당대의 전 지구적 혼란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신의 일식은 신의 ‘부재’로 인한 어둠이 아니다. 인간의 ‘자기 소외’로 인해 신의 세미한 음성을 경청하지 못하게 된 밤의 풍경이다. 그러므로 그 회복 역시 새로운 신 논증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신과 타자를 다시 ‘너’로 맞이하는 관계의 자리를 복구하는 일로 족하다.
앞서 본 대로, 특히 이 책의 중핵인 칼 융과의 논쟁은 이런 복구 작업을 위한 부버의 핵심 논증이다. 환기해 보면, 부버의 관점에서 융의 주장은 신을 심리적 내용으로 환원하여 ‘내 안의 무엇’으로 고착시키는 순간, 인간은 신을 직접 부정하지 않고도 조용히 차단하는 전형적 벽이다. 살아있는 관계는 죽고, 신은 타자성을 잃은 채 인간의 내면 구조물로 굳어 버린다. 그러나 부버가 보기에, 그 주장은 신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기능화되고 내면화된 ‘그것’으로 축소된 결과일 뿐이다. 이 책에서도 그의 주장이 관계 철학에 근거하여 시대의 사유를 재해석하는 논조를 띠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정리하면, 이와 같은 부버의 논지와 논거는 세계에서 신의 은닉은 신이 스스로 숨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가 신의 가린 것임을 입증하려는 시도이다. 부버는, 신은 부재하지 않는다. 먼저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확신의 장벽에서 한 걸음 물러나 ‘너’를 향해 자리를 내어줄 때, 신의 현존은 온전히 선명한 빛으로 우리 삶에 회복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책의 의의
첫째, 이 책은 시대적 질문과 사유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부버는 ‘어둠과 일식’의 은유를 통해 질문의 패러다임을 시대적 주제와 연동시킨다. 이 은유를 통해 부버는 신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무엇이 빛을 가로막고 있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으로 논의의 자리를 옮겨 놓았다.
둘째, 이 책의 의의는 추상적 주제를 객관적 실체로 적시했다는 점이다. 부버는 인간이 공들여 쌓은 사유의 성벽, 진실한 관계를 대신하는 체계, 그리고 만남을 대체해 버린 기술적 합리성을 모두 소환한다. 이를 통해 현대인이 신을 ‘너’로 마주하기보다 ‘그것’으로 처리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일깨운다.
셋째, 관념을 실천 윤리와 함께 희망의 언어로 제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버의 실천 윤리는 곧 가역적 희망을 향한 결단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되돌릴 수 있다는 의미다. 일식은 영구한 밤이 아니며, 인간이 세운 장벽은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언제든 변화시키고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신을 가리던 ‘그것들’을 걷어내는 자리 이동에서 희망은 스며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 부버 주장의 의의는 21세기에서도 현대적 가치로서의 윤리를 재배열할 수 있다. 소음과 다성의 시대에서도 ‘나-너’의 시력을 살려 그 소리를 경청하는 힘으로 고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윤리가 청취 능력의 회복과 이어진다. 오늘날 침묵과 굉음의 구분이 무너진 시대에 미세한 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현대 사회의 윤리적 붕괴는 규범의 약화 때문이 아니라, 진실한 음성을 듣는 ‘청취 능력’ 자체의 손상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부버는 인간의 ‘새로운 양심’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이 혼란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결국, 비켜섬은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윤리가 성립할 시공간을 확보하는 결단이다. ‘나-그것’의 회로가 만드는 굉음에서 물러나 침묵을 다시 침묵으로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명령은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시 삶에 닿는 윤리로 실현된다.
‘비켜섬’의 확장
윤리라는 점에서 부버가 제시하는 ‘비켜섬’은 구체적으로 다음 네 가지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① 주체적 안식의 향유 (아브라함 J. 헤셀의 안식 윤리)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공간이다. 이런 ‘안식’의 관점에서 비켜섬은 자아의 팽창을 멈춤으로써 ‘너’가 나타날 수 있는 공간적 여백을 창조하는 가장 강력한 주체적 결단이 된다. 이는 시간을 점유하고 공간을 지배하려는 본능을 거스르는 고통스러운 일이며, 어둠 속에서도 등대 빛을 신뢰하는 자만이 감행할 수 있는 신앙적 실천이다.
② 사회적 질서로서 환대 (룻기의 헤세드)
히브리 성서의 룻기 서사에서 환대는 보아스가 자신의 밭(기득권)에서 비켜나 이방인(노크리) 룻을 친절하게 배려하는 일로 나타난다. 이는 부버의 비켜섬을 사적인 덕목을 넘어 혐오와 배제의 구조를 타파하는 정치적 환대로 나아가게 한다. 사회적으로 번역한 관계론은 체제 안에서 쉽게 ‘그것’으로 환원되는 존재를 ‘너’로 복권시킨다.
③ 사회 변혁을 향한 실천 (동학의 대동세계)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은 모든 인간이 하늘과 인격적 관계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하늘을 지배하려는 태도에서 비켜설 때 비로소 일식의 원인이 제거됨을 시사한다. 부버가 관계의 ‘순간’을 강조했다면, 동학은 그 순간이 사회 구조로 정착되는 대동세계를 지향한다. 신과 인간 사이를 가리는 부조리한 체제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사회적 변혁까지 끌어내는 것이다.
④ 존재론적 카오스의 수용 (존 D. 레벤슨의 혼돈 잔존)
존 레벤슨에 따르면 창조는 일회적 완결이 아니라, 침범해 오는 혼돈의 바다를 끊임없이 다스리는 과정이다. 우리가 타자를 ‘그것’으로 대하며 자아의 영토를 확장할 때 창조 질서 내부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따라서 신의 일식을 걷어내는 비켜섬은 단순한 개인적 경건을 넘어, 선과 악의 혼돈이라는 존재론적 질서를 적극 수용하며 재배열하는 우주적 투쟁이 된다.
이 연동된 관점들은 부버가 던진 한 문장, 즉 “그사이에 끼어든 것이 물러설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오늘의 어휘로 되풀이한 것이다. 요컨대, 21세기의 실천 윤리로서 ‘비켜섬’은 신의 길(神路)을 열어주어 ‘그것’으로 전락한 존재들을 다시 ‘너’로 불러주는 철학신학에 기반한 실천윤리이다.
부버 주장의 한계와 비판적 성찰
부버가 이 책에서 제시한 풍성한 관점들은 현대 사회의 관계 회복에 큰 유익을 주지만, 동시에 그 사유의 한계도 드러낸다.
첫째, 부버의 사유는 끝내 ‘나-너’라는 실존적·인격적 관계의 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개인의 문제에 좀 더 집중한 것이다. 그는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문제를 사회적 구조나 제도, 법적 틀 안으로 확장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즉, 개인 간의 만남을 넘어선 강력한 사회관계적 시스템으로서의 확장이 약하다는 점은 구조적 한계로 지적된다.
둘째, 해법으로 제시된 ‘비켜섬’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인간 사유로 환원될 위험을 안고 있다. 신의 일식을 초래한 원인이 인간의 사유라면, 이를 해소하려는 결단 또한 결국 인간의 사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시작과 끝이 맞물린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다시 인간의 의지로 되돌아오는 ‘환상방황’의 굴레에 빠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부버는 칼 융의 심리학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정작 이 책 안에서 독립된 장으로 그 쟁점을 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록에서 자신의 응답만 다룬다. 이는 텍스트 전체 구성에서 조금 기울어진 편집처럼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이 점에 대해서는 해설자의 설명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런 한계는 어쩌면 레비나스의 관점을 통해 좀 더 보완되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완개념은 상호성을 넘어선 사회적 정의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부버의 대등한 상호적 만남을 넘어, 타자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비대칭적 책임(Asymmetrical Responsibility)’을 강조하며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주제를 제시한다. 그에게 타자는 내가 선택하거나 비켜서 줄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다. 존재 자체로 나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얼굴’이다. 이러한 타자의 외재성은 부버의 ‘비켜섬’이 가질 수 있는 주관적 결단의 한계를 깨뜨리며, 타자의 부름에 의해 자아가 강제로 자리 이동을 당하는 강력한 윤리적 동력을 제공한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불균형적 상응’으로도 뒷받침된다.
또한, 레비나스는 ‘제삼자’라는 개념을 통해 인격적 대화를 법과 정치라는 사회적 정의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부버의 관계론이 사적인 영성에 머물 위험이 있다면, 레비나스는 수많은 타자 사이의 정의를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제도의 토대를 마련한다. 결과적으로 신의 일식을 해결하는 길은 보이지 않는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에 남겨진 ‘흔적’을 발견하고 고통받는 타자를 환대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부버의 영성적 회복은 배제된 타자가 복권되는 정의로운 환대의 윤리로 승화될 여지를 확보한다.
책이 남긴 질문과 과제: 모순의 진실—AI의 시대, 다시 ‘너’에게로
오늘날 부버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새로운 시대에는 과연 새로운 물결이 오고 있는가. 현재 우리를 덮친 물결은 자명하다. 그것은 데이터와 알고리즘, 최적화된 설명, 그리고 세밀하게 분류된 자기 확신들이다. 이러한 도구들은 우리에게 유용하다. 하지만, 유용함이 커질수록 관계의 샘은 역설적으로 메말라간다는 아이러니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더욱 고립되고 원자화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오늘의 일식’이다. 신의 가림은 인간, 어떤 이들에게 그 원인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전 부버는 오늘 우리에게 마치 ‘메시아의 시간’처럼 준엄한 책임 윤리를 희망처럼 남긴다. 끼어든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면, 그 장벽을 물러나게 하는 것 또한 인간의 몫이다라는 자각으로 나를 찌른다.
따라서, 이 글의 서두에서 그려보았던 바다와 등대의 이미지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지금 진정으로 항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확신이라는 좁은 섬에 정박해 있는가.”
이에 대해 부버의 초대를 따라가며 의외로 단순하고도 명료한 항구에 이른다. 분석을 조금 덜어내고 만남을 조금 더 하라는 것, 설명을 쌓기보다 자리를 비워내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견고한 ‘그것’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너’의 세계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우리에게 정답을 써주는 대신 단 한 가지 행동을 요구한다.
“한 걸음 비켜서십시오.”
그 한 걸음은 신을 위한 자리를 확보하는 종교적 몸짓이기 전에, ‘너’가 다시 들어올 여백을 만드는 존재론적 관계의 윤리다. 바로 그 윤리적 실천 위에서만, 세계는 그 윤곽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비켜섬은 회피가 아니라, 만남이 성립할 좌표를 다시 확보하는 적극적 자기 이동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시작되었고, 신은 여전히 우리 사이에서 활동한다. 부버의 주장에 담긴 이 마지막 권고처럼, 오늘 당신의 일상에서 ‘너’가 비켜설 수 있는 한 걸음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 물음에 스스로 답해본다.
칠흑 같은 암흑(Finsternis) 속에서 깜박이는 등대 빛이 오히려 어둠을 뚫고 윤곽을 선명하게 보이게 하듯, 신과 세계 사이의 인간은 이 뒤엉킨 땅에서 지성의 논리로 신을 가리는, 즉 자아의 완고한 사유의 벽을 한 걸음 비켜 세워 신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결단의 윤리를 응답해야 한다. 하얗게 길을 지운 폭설이 일상의 질서를 무너뜨릴지라도, 우리가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가리지 않고 그 본연의 마주침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는 자기 확신이라는 폐쇄된 섬에서 물러나 그 비워진 여백 속으로 타자의 근원적인 숨결이 스며들도록 허용하는 윤리적 개방성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