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귀
멀리 소각장
쏟아지는 뭉특한 연기
잔향
버려진 사물들―
고요한
너의 귀천
1. 배경
온몸이 시렸다. 발끝은 땅에 닿아서, 손끝은 공중에 풀어져서, 머리끝은 부는 바람에 가까워서 차가웠다. 날이 추운 것인지, 내 몸이 추운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이 살을 에는 느낌이 뒤섞인다. 한 달에 한 번 집을 나와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몸을 맡긴다. 이번 주는 가장 추운 날이라는 예보에 잠깐 멈칫했지만, 달리 보니 고요한 시간을 독차지할 것 같았다. 이런 날이면 야외에서 숙박하는 이가 거의 없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거친 바람이 텐트를 흔드는 한밤이 지났다.
다음 날 아침, 매서운 공기가 오히려 상쾌해졌다. 따듯한 차 한 잔 끓이고 김민기 님의 ‘바다’를 곁들여 듣는 동안, 멀리 소각장에 연기가 계속 피어오른다. 요 며칠 끊이지 않는다. 태워지는 것들 중에 나의 물건도 있을 것이라 상상하니 마음이 물컹해진다. 카메라를 들었다. 바람이 가볍게 불어 연기가 왼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싱그럽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적한 산책로로 나섰다. 까치 두 마리가 나를 반긴다.
2. 사진
사진의 구도는 단조롭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모든 것을 말한다. 멀리 보이는 소각장 굴뚝과 연기를 X2로 끌어당겨 담았다. 사진 한가운데는 역광을 받아 검게 바랜 기둥 하나 하늘 향해 서 있다. 그 꼭대기에서 검붉은 연기가 뭉특하게 치솟는다. 굴뚝 주변으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이 굴뚝으로 몸을 기울여 늘어서 있다. 굴뚝의 끝은 정확히 사진의 중심점에 위치한다. 가까이 가면 불타는 소리가 거대하겠지만, 사진에 모든 소리는 소거되었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는, 고요한 아침 풍경이다.
3. 시어
간결한 사진은 그 자체로 메시지다. 시어는 그 메시지에 옷을 입히는 정도다. 하지만 이번 디카시는 좀 긴 설명을 덧입히고 싶었다. 우선 나는 이 디카시의 제목부터 고민했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텐트 밖에 까치 두 마리가 날아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열심히 찾다 날아가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저 멀리 굴뚝의 연기와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이 어우러지는 장면에서 ‘회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동시에 모든 회귀는 각각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또한, 수직으로 뻗은 굴뚝을 보고 있으니 마치 지상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그 길 끝에 피어오르는 뭉툭한 연기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수거된 온갖 폐기물들이 불타며 마지막으로 내뱉는 숨결 같았다.
겨울 청명한 아침,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는 검붉은 연기가 하늘로 흩어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붉그스름한 색채는 어떤 사물이 뜨거운 연소 과정을 거친 잔재가 분명하다. 땅에서보다 하늘에서 바람이 약간 거칠게 부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난만히 흩어지진 않는다. 조금 기울어진 모습이 오히려 시각적으로는 평온해 보인다. 그렇게 폐기물의 소멸은 끝이 아니었다. 연기가 하늘로 오르는 찰나, 그것은 또 다른 생성의 시작이었다.
어떤 회귀: '어떤'은 모호함을 함의한다. 특정되지 않은 그 무엇이다. 굴뚝 아래 소각로에서 불타는 것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겨우 내가 쓴 것 정도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 불타기 직전 모든 사물은 평등하다. 따라서 ‘어떤’이라는 모호함은 역설적으로 굴뚝 끝에서 하나처럼 뒤섞여 하늘로 흩어질 것이다. 귀천의 보편성이다. 버려진 모든 피조물, 인공적 사물은 예외 없이 어딘가로 돌아간다. 그것이 세계의 섭리다.
멀리 소각장/쏟아지는 뭉특한 연기: 내가 사는 도시 근교에 위치한 소각장은 꽤나 유용한 시설이다. 물론 늘어나는 쓰레기 양을 점점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유해시설이 아니라 유익시설이라 해야 한다. 마음에 선입견이 달라져서인지 도시 변두리, 숲 속에 자리한 소각장이 가깝게 보인다. 그렇게 이 시어들은 나와 소각장 사이의 공간적 거리와 정서적 거리를 동시에 구성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멀다. 시어 ‘멀리’는 내가 가닿을 수 없는 거리이며, 정서적으로 멀어지고 싶은 공간의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소각장’은 그런 곳이다. 알다시피 소각장은 회피하고 싶은 시설로 소비 사회 전체를 환유한다.
이 시어들 중에서 “쏟아지는 뭉특한 연기”는 역설적 감각을 의도한 것이다. 굴뚝 연기는 대체로 하늘로 올라가다. ‘쏟아진다’는 동사는 아래로 떨어진다는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도 나는 ‘쏟아지는’을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과 중력과 낙하의 이미지가 교차하게 만들었다. 모든 피조물은 땅으로, 흙으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귀천한다는 것을 사물에도 적용했다.
따라서 이 시어는 소멸의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그것의 질감을 표현한다. ‘뭉특한’은 모호한 질감이다. 연기는 고체로 버려진 사물이 불을 거쳐 기체로 이행한 결과물이다. 며칠 불태워지는 시간, 연기가 끝없이 하늘로 오른다. 밤낮없이 흩어진다. 바람이 거칠 때는 정신없이 휘날리지만, 오늘처럼 바람도 고요하고, 맑은 아침 햇살이 따스한 날에는 뭉특한 모습으로 하늘로 오른다. 나는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쏟아지는 것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잔향: 이 시어는 이 디카시에서 장면 전환의 경계를 보여준다. 모사적(模寫的)인 기능도 한다. 이 독립된 명사는 연기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감각, 즉 냄새이자 기억이며, 존재의 흔적이다. 앞선 물질적 이미지에서 비물질적 정서로 넘어가는 문턱 역할을 한다. 한 단어의 독립은 앞선 시어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다음 시어로 그 의미를 내어준다. 시어에서 독립 명사의 역할은 의미보다 위치가 중요한 이유다. 흘러오고 나아가는 사건의 지속성을 매개한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이 단어를 중의적으로 사용했다. 하나는 잔향(殘香)이다. 다른 하나는 잔향(殘響)이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는 멀리서도 온갖 삶의 향기가 남아있을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삶에서 실려 온 온갖 소리의 여운도 실려있을 것 같다. 살아있을 때 유용하게 쓰였을 테지만, 이제 그 쓸모가 끝나, 버려져 가루로 돌아간다 해도 향은 남아있고 생존의 소리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각되는 동안 여러 소음이 뒤섞였다 해도 그것이 멈춘 자리에는 잔존재가 하늘에 연기처럼 새겨진다. 그것은 흔들리면서도 운명적 공간까지 이르려는 스퍼트일지 모른다.
버려진 사물들―: 저 연기는 쓰이고 버려지는 모든 것들의 최후의 문연(紋燃)이다. 나는 상상한다. 버려진 사물들이 끝내 하늘로 돌아가 다시 만들어갈 세계를 말이다. 버려졌으나 완전히 폐기되지 않은 존재, 그들이 생존한다는 것은 솟아나 흩어지는 연기로 입증된다. 나는 그 잔존하는 생의 연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동시에 그 연기가 쏟아내는 생의 소리를 청각적으로 치환하려 했다. 태워진 후, 아니 죽음 이후에 더 진하게 남겨지는 고요한 울림을 마음에 둔 것이다.
사실, 버려졌다는 것은 용도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버린다는 것은 윤리가 수반되는 행동이다. 아무리 쓰레기라 해도 그것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 적절한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려진’은 어떤 소비의 결과이자 관계의 단절을 허용하는 행위다. 인간에게 사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과 배제의 대상이다. 물론 인간도 인간에게 사물처럼 대해지는 일도 허다하다. 나는 이 시어에서 ‘사물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다. 버려지는 것들은 개별성이 아닌 집단적 운명을 짊어진 ‘그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버려진’이라는 말속에는 도덕과 윤리로까지 확장되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 스며있다. 이 시어에서 마지막에 사용한 대시(―)는 말의 여운을 통해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 그 침묵을 시각화한다. 버려진 것들이 남기는 울림이 퍼져가는 기표이다.
고요한 너의 귀천: 나는 이 대목에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렸다. 소풍이라는 삶의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이의 가벼운 모습이 생생하다. ‘고요한’이라는 표현은 바로 다 비워버려 홀가분한 몸을 상징한다. 나는 그 버려진 폐기물들의 삶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나에게 ‘너’의 관계로 치환된다. 어떤 연관도 없겠지만, 연기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너’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네가 연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은 과한 상상이 아닌 것 같다. 타버려 재가 남고 검붉은 연기로 귀천하는 이 사물에게 소각은 죽음 같은 단절이 아니라 가장 '고요한' 상태로의 원형 복귀인 셈이다. 특히, 나는 이 시어에서 의인화를 시도했다. 사물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너’는 인격화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각되는 물건들이 인간으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의 연기는 마치 인간처럼 ‘귀천’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도 삶이 끝나는 곳에서는 어디론가 ‘돌아가는 절차’가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각은 소멸이거나 종결이 아니다. 되돌아감이다. 이 시어는 죽음에 대한 나의 재의미화를 반영한다. 특히 ‘고요한’이라는 정서적 배경은 이 디카시 전체의 기조와 시의 감정적 음률을 죽음 앞에 말을 잃은 침잠함에 대비한 것이다.
4. 의도
나는 맹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캠핑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소각장 굴뚝은 나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디카시는 그 쓰레기 소각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통해 나의 오늘 하루의 의미를 되새겨보려는 일기 같은 것이다. 도시 근처 소각장의 연기는 단순한 산업 사회의 진풍경이 아니라, 소비되고 사용된 뒤 버려진 사물들의 마지막 귀환을 보게 만들었다.
‘버려진 사물들’은 인간의 편의 속에서 자기 역할을 다한 존재다. 나는 특히 연기의 상태를 주목했다. 그 연기는 뭉게구름 같은 덩어리였고,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삶이 겪어야 할 최후의 태도인 것처럼 보였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하지만, 결국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삶으로 마감될 것이라는 어떤 예감 말이다. 나는 그 기울어짐을 비난하거나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삶도 의미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배웅하려는 것이다.
한편, 내가 ‘너의 귀천’에서 말하는 ‘너’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이라는 불특정 다수다. 한때 요긴하게 쓰였고, 이름을 가졌으며, 결국 버려지고 잊힌 모든 사물을 향한 집단적 호칭이며 애도의 방법이다. 생각해 보면 사물만 그럴까. 무연고 죽음, 고독한 죽음, 화려한 청춘을 뒤로하고 쓸쓸하게 퇴장하는 사람들의 삶도 이와 같다고 말하면 과장된 것일까?
또한, 나는 이 디카시에서 내가 천착하는 ‘검은 안식의 미학’을 적용해 보았다. 소각-연기-귀천은 삶이 불확정한 상태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나는 여러 이야기를 제거하고 단지 ‘버려진 것,’ ‘연기’와 ‘귀천’이라는 요소만 주목했다. 버려진 사물들을 죽은 자의 유품이나 소멸해 가는 존재로 치환할 수도 있다. 그들이 불길(고통)을 통과한 뒤 맞이하는 귀천은 전형적으로 ‘검은 안식’의 사유 패턴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사물에게 소멸의 장소인 소각장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헤테로토피아일 것이다. 비극의 장소가 아닌,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낯선 공간인 것이다. 짓눌렸던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형이상학적 해방의 공간인 것이다. 결국, 이 디카시에서 나는 ‘버려진 것들’에게도 귀천이라는 최후의 자유가 남아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싶었다.
5. 총평
이 디카시에서 사진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해준다. 겨울철, 도시 전체에서 모아 온 폐기물을 몇 날 며칠 동안 소각한다. 우연히 나는 그중 한순간을 만났다. 마침 의미 있게 보이는 연기구름이 눈에 띄었고, 나는 그 장면을 시어로 남겼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디카시는 오랜 숙고가 아니라 짧지만 깊은 사색의 결과일 때 의미 있다.
오늘날 소각장 문제는 정치사회적으로 가볍지 않다. 삶에서 배척할 수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 혐오 시설이라며 멀리한다. 나는 소각장의 현실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이 내 삶의 현실을 고요한 언어로 감싸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 디카시에서 그 문제를 설득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사물도 사람같이 자기 생을 마치고 나면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사람처럼 사물의 연기도 그런 상징이다. 잔향도 오래간다는 것도 생각해 두려 한다.
한편, 이 디카시에서 나는 사진의 간결한 메시지를 시어로 심화하는데 어느 정도 도달했다. 심화의 방향은 사물의 마지막을 환대해야 하는 인간다움의 윤리다. 사물도 사람처럼 최후에는 애도의 대상이며, 존중되어야 할 삶이다. 소멸을 축복하는 시학이다.
이 시학은 곧 나의 ‘검은 안식의 시학’이다. 이 관점이 사물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나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오염을 넘어 ‘귀천’을 읽어내려 했고 다행히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시선은 파괴 안에 이미 들어있는 평화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어에서 보여준 것처럼 언어를 절제하면서도 그 여백 안에 삶과 죽음의 순환 구조를 담아냈다. 특히 검은색은 모든 색을 삼킨 색이자, 모든 색이 휴식을 취하는 색이다. 소각되어 재가 되고 연기가 되는 과정은 존재가 자신의 색을 버리고 가장 본질적인 '무(無)'의 상태, 즉 안식으로 돌아가는 피조물의 예식이다.
이 디카시는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상적인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상이라도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의 소멸’이라는 묵직한 주제가 담겨있다. 이 주제를 통해 나는 소멸은 끝이 아니라 가장 가벼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회귀(回歸)를 포착했다.
결과적으로 이 디카시는 삭막할 수 있는 산업 현장의 풍경을 따스한 철학적 시선으로 어루만지려는 나의 의도가 잘 담겼다. 가장 추웠다는 캠핑장의 아침, 멀리서 뭉툭하게 쏟아지는 연기를 보며 가볍게 '귀천'하는 어느 사물의 모습이 미래의 나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