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단상-무명유절(無名有節)의 단시

by 푸른킴

또 다시 돌아온 설날

또 설날이 가까이 와 있다. 이 새로운 날은 계절이 지나가는 물길의 여울목 같다. 무상하게 흐르는 세월 속에 한 번씩 덜컹거리는 개여울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세월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나이가 들수록 설날이야말로 오가며 스치는 장삼이사(張三李四)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생각과 달리 이 계절만 되면 온몸이 반가운 사람을 만나듯 살가워진다. 날이 서서히 풀려 가는 즈음, 싹이 나고 풀이 자라 가지를 뻗어 나무가 되고, 그 가지에 꽃이 피고 지며 다시 씨앗이 죽어 나무가 살아나는 그 평범한 일관성처럼, 신선한 바람이 내 푸석한 삶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설날, 새로울 것 없는 새로운 날이다. 새롭다는 뜻을 덧붙인 것은 아마도 이날이 오면 어제의 기억이 오늘처럼 새롭게 슬며시 끼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일 없는 것 같았던 지난 세월, 내 삶을 휘젓고 지나간 작고 미미한 일들이 때로는 거대한 폭풍처럼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이 날이 오면 몸 아래 침잠했던 묵은 기억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다.

평범한 일관성-허공에 남겨진 기억

가장 흔한 기억이라면 단연 집안 어른들에 대한 추억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분이 여기보다 좋은 세상으로 훌쩍 떠나가셨다. 그분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을 뿐이다. 살갑게 지낸 시간이 아무리 길고 좋았다 해도, 그들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깊고 크다. 그날, 그때 함께 머물며 손길이 닿았던 자리, 그 삶의 공간에 지금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허공을 가르듯 기억만 허우적거린다. 문득 그 공허한 손짓 앞에서 마음이 빠르게 비워져 간다. ‘텅텅’ 하는 소리만 무심하게 내 느려진 몸을 관통해 간다. 하지만 손끝에 닿아 지문처럼 새겨진 몸의 촉감은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빈자리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공중을 가르는 그 헛헛한 손길마저 ‘부질없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그래, ‘부질없지 않다.’


평범한 삶의 지혜, 그 부질없지 않음

‘부질없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아쉬움이 가득 담긴 말이다. 애를 써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대장장이가 이 마음을 가장 많이 겪었던 모양이다. 매일 ‘불질’이 제대로 닿지 못한 쇠붙이를 두드리다가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푸념만 남았을 때, ‘부질없었군’ 했을 것이다. 뭐라도 만들어 내려면 불길에 자신을 완전히 담갔어야 하는데, 겁내고 움츠리다 그만 불길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부질없음’은 대장장이의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쇠붙이 자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 손길이 닿지 않았는데 어떻게 쇠가 움직일 수 있겠는가. 당연히 쇠붙이의 일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부질없음’이 인간사에 적용된다면 의미는 달라진다. ‘부질없음’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상황이라도, 그 자체로 삶의 의미가 지극히 웅장하게 퍼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부질없음’마저 하나의 삶의 경각(警覺)으로 받아들일 지혜가 있다면 말이다.


보잘 것 없던 샌드위치의 힘

설 명절이라고 오래된 드라마나 영화를 방영하는 방송사의 관습은 부질없다. 그런데 아주 우연히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눈에 띄는 소리를 들었다. 한 노인이 임종한 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난다. 그를 만나는 순간, 아주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샌드위치가 있다. 한 아이에게 나눠 준 샌드위치, 그 샌드위치를 받아 든 어린아이는 그날 이후 변호사가 되어 멋진 인생을 살다가 삶을 마감한 것이다. 비인간 존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그러나 그대처럼 나아가는 이는 드물다. 보통의 사람은 기적의 순간에 멈춰 서서 한 번 더 도와 달라고 하지.”


그 아이는 자기 삶에 기적을 바라기 전에 진실된 방법을 고스란히 지켜 가며 살았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 것은, 이 아이가 ‘부질없어 보이는 샌드위치’를 기적의 상징이 아니라 그저 ‘부질없는 샌드위치 그 자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 샌드위치는 배고픔을 달래 주던 것이었기에, 나아가 자신도 누군가에게 샌드위치를 나눠 주고 싶었기에, 가르쳐 준 정답 ‘4’를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오답 ‘2’를 고수했던 것 아닌가. 사실 명절에도 모든 사람이 정답을 일러 준다. 그러나 정작 내가 생각한 답을 결정하는 일만큼 이 명절을 잘 보내는 일이 있을까 싶다. 물론 틀렸다는 평가를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명절 속으로 난 나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날마다 새겨진 부질없지 않은 추억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그 일을 그 일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부질없음’을 그저 부질없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 가벼워 보이는 일이 삶의 속살을 따스하게 해 주는 모닥불 같을 때가 많다. 일상이 기적이라는 말이 과도하다 해도, 어쩌면 가장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 부질없음이 부질없지 않은 일 중 하나가 바로 설날 같은 명절에 되살아나는 부질없는 추억일 것이다.


이제 명절은 과도하게 포장된 기쁨 뒤로 씁쓸한 세계에 잠식되는 것 같다. 세계는 갈수록 발달하지만 그 속으로는 핍절의 길이 이어진다. 누구나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족한 물건이 진열되어 있지만, 손에 넣기는 언감생심이다. 겉모습은 모두에게 화려해졌지만 주머니는 뚫려 버린 형국이다. 하여 싱숭생숭한 마음이 이 절기를 휘감는다. 그럼에도 이 명절이 명절인 이유는 누구에게나 지나온 세월의 추억을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 쌓인 먼지를 털어, 다시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그 일이 부질없지 않은 순간이다.


그러니 누구나 자기 추억만큼은 부유하다. 이 명절에 나에게 건네졌던 수많은 ‘샌드위치’는 배고픔을 달래 주기도 했고, 고갈된 웃음을 다시 채워 주었으며, 말랐던 손끝의 촉촉함을 다시 적셔 주었다. 그것은 기적도 아니었고 신비로운 경험도 아니었다. 그저 나의 이야기였고 나의 일상이었으며, 눈뜨면 사라지는 안개 같은 허무한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되돌아와 나를 다독인다. 부질없던 그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나이가 되어 가는 나를 격려한다.


나의 단시-「나의 명절(名節)」

나는 이런 마음을 담아 단시(短詩)를 하나 남겼다. 「나의 명절(名節)」이다.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 주머니만 싱숭생숭―
문명의 선물, 무명유절


나의 단시는 대체로 세 줄로 이뤄진다. 여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부사어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만의 철학을 담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삶의 작은 경험을 서른 글자 내외로 적는 것이다. 이 단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사어는 ‘싱숭생숭’이라는 의태어이고, 철학이라면 ‘허무의 의미’이며, 경험이란 해마다 겪는 ‘설날’ 풍경이다.


이미 말한 적도 있지만, 단시가 짧은 것은 단순히 글을 생략하기 위함이 아니다. 글과 글 사이에 생긴 문장의 크레바스는 위험한 늪이 아니라 여백을 만들어 내는 길이다. 그 여백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의 토대가 넓고 탄탄하게 스며 있다. 내가 단시에서 여백을 자주 남기는 이유는, 쓰는 이는 물론 읽는 이가 마음껏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단시에서의 여백은 글자와 글자 사이에 보이지 않게 놓인 사건의 흐름에 있다.


단시 자세히 읽기-제1구절: 설날의 중의성

잠깐 나의 단시를 자세히 읽어 보려 한다. 자세히 읽는(close reading) 것은 글의 흐름과 단어 사이의 관계, 문맥 안에서 특징적인 표현들에 주목하는 문학적 해석 기법이다. 특히 이 단시에서 내가 천착한 서술 기법은 중의법(重義法)이다.


이 시의 소재는 제목에 명시된 것처럼 ‘명절’이다. 명절에 담긴 중의성을 고려하면, 한편으로는 명절이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질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질없음조차 오히려 새로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용된 시어에도 중의적 기법이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있어도’, ‘없으면’이라는 표현 속에는 상반된 두 주체가 있다. 단순화하자면 명절은 ‘어른’과 ‘아이’의 입장에서 의미가 확연히 달라질 때가 있다.


부와 가난도 중의성의 핵심 요소다. 부한 이들의 명절과 가난한 이들의 명절은 같은 ‘해 아래서’ 목격하는 가장 부질없는 상황이다. 한때 부했던 이들, 혹은 한때 가난했던 이들이 그 순간에 겪는 ‘명절’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도 가능하다. 부와 가난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인데, 바로 ‘추억과 기억’이다. 부한 이도 ‘기억 가난’에 허덕일 때가 있고, 가난한 이라 해도 상다리 부러지는 넉넉한, 차고 넘치는 ‘추억 부자’가 되는 날도 있다. 써도 써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누린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단시를 통해 명절을 ‘설령 이름이 없더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날(無名有節)’로 재정의했다. 다시 말해 풍성하고 유용한 물질적 풍요 때문에 행복한 날이 아니라, 부질없음마저 내 삶에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그로부터 행복을 만끽하는 날이라는 의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정이 나를 일깨워 주는 은총임을 깨닫는 날이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시의 첫 행에서 내가 체감하는 명절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요컨대 “있어도 없는 것 같고”라는 말속에는 지난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 있다. 부질없음은 곧 무상(無常)함이며, 평범하지 않은 듯 평범하다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명절은 분명 요즘과 달랐다. 하지만 그 다름은 추억의 차이일 뿐이어서, 지금 그 추억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의미도 없을뿐더러 할 필요도 없다. 아쉬움이 새로움이 될 리도 없다. 그러니 이 시어는 나의 노스탤지어적인 감상을 적은 것일 뿐이다. 나 홀로(혹은 또 어떤 분이 느낄 수도 있겠지만) ‘유사동무(有似同無)’의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명절(名節)을 찬양하거나 폐기하려는 생각이 아니다. 필요하지 않은 듯해도 버릴 수 없는, 평범한 보물 같은 날이라는 의미다.


제2구절-주머니 속 빈 충만

두 번째 구절 “없으면 주머니만 싱숭생숭―”은 명절이 사라진 날의 풍경을 그려 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년부터 ‘설 명절 연휴’를 폐지한다고 한다면 나의 기분은 어떨까? 평생 그날이 내 삶에 스며 있었는데 이제 그날이 사라진다면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본 것이다. 솔직히 ‘없으면’ 좋아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없어지면’ 아쉬워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머니’가 싱숭생숭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연륜이 깊은 사람이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일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삶의 수준이 높아지고 문명이 발달하는 동안 사회·경제는 비약적으로 확장했지만, 이제는 삶의 질이 급격히 갈라져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명절이 불편한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주머니’에 관한 시 중 인상적인 것이 있다. 바로 윤동주 시인의 「호주머니」이다.


먹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겨울 한 철, 어느 날 비어 버린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한 어린아이가 그려진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하릴없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그 사이에 신비로운 촉감이 손끝에 닿는다. 풍성해진 주머니의 따뜻함이다. 빈손이 빈 주머니에 들어가자 생각지도 못하게 가득 찬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빈 충만’이 동시 전체에 흐른다. 이렇게 보면 부재는 ‘없음’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라 할 수 있다. 결핍은 그저 ‘가난’이 아니라, 또 다른 결핍과 만나 새로운 충만을 만들어 낸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이 두 번째 구문에서 ‘싱숭생숭’한 마음을 문명과 윤리 사이의 간극을 응축한 심정의 의태어로 표현하려 했다. 그리하여 ‘싱숭생숭’이 불편한 어색함을 말하면서도, 마침내 깔끔한 느낌으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의 교두보가 되길 기대했다.


제3구절: 설날의 새로운 이름-무명유절(無名有節)

세 번째 구절 “문명의 선물, 무명유절”은 명절의 새로운 이름이다. 비록 명절이 문명에 휘둘려 버린 선물처럼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그 명절은 내 삶에 평범한 일관성으로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이 옛 절기를 순식간에 제거해 버릴 힘은 없다. 하여 나는 이 절기를 ‘이름을 잃어버린다 해도(無名) 절기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有節)’는 뜻에서 ‘무명유절’이라 새롭게 이름 붙였다.


돌이켜 보면 수십 번의 설 명절을 보내는 동안 시큰둥하게 보낸 적도 많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절기가 오히려 커다란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이름 붙이고 나니 이청준의 소설 『축제』가 떠오른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족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이렇듯 명절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치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날을 기억하고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문명의 시대는 인간의 그런 평화로운 화해의 기회마저 앗아가 버려, 오히려 갈등의 불씨만 키우고 돌아서는 날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이 날의 의미가 퇴색될 리는 없다. 어쩌면 그런 갈등을 조장하는 문명의 오기(惡氣)를 인간다움으로 격파해 나가는 일이 더욱 필요할 뿐이다. 하여 나는 이 시를 통해 명절의 이름을 새롭게 정의하며 나의 ‘검은 안식’ 철학을 떠올렸다. 명절의 어두운 실재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 비치는 작은 빛을 따라가는 윤리를 모색하고, 동시에 이 시의 여백에 담긴 말해지지 않은 부분까지 읽어 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명절이 가져다준, 인간을 아름다운 길로 이끌어 주는 손끝의 촉감을 어둠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일깨워 보자는 것이다.


단시와 검은 안식의 시철학-어둠과 빛 사이의 여백

한편 이 단시를 구성하는 철학은 앞서 말한 대로 ‘검은 안식’ 철학의 좌표 위에 있다. 그 좌표를 관찰해 보면, 시대의 삶을 지배하는 어둠을 극복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공존해야 할 관계의 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밝음과 화려한 수사가 지배하는 일정한 시간표 아래에서 개인은 오히려 공허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시대적 공허마저 병리 현상으로 결론 내리지 않는다. 은폐하지 않고 직시하는 태도 자체를 안식의 출발점으로 세워 두는 것이다. 검은 철학에서 안식은 빛만의 충만이 아니라 어둠과 빛의 공존이라는 역설로 형성된다.


또한 검은 안식의 관점에서 보면 ‘싱숭생숭’은 이 단시에 담긴 철학의 핵심을 함축한다. 이 말은 공황이나 비탄 같은 강한 정념 대신, 현대인이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미세한 불안의 파동을 정교하게 포착한다. 여기에 문장 부호 대시(―)를 결합함으로써 문장을 끝내되 감정은 이어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검은 안식의 철학에서 이 대목은 형식적 미완을 통해 현실의 미해결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나의 태도를 잘 드러내 준다. 마침표의 유보는 아직 끝나지 않은 희망, 무언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여지를 고스란히 남기는 기능을 한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문학에서 흔한 서술 기법이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은 쉼표로만 이어지는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 주지 않는가.


끝으로 검은 안식의 철학에 근거할 때, 셋째 행 “문명의 선물, 무명유절”은 시대에 편승하려는 나 자신을 스스로 반박하는 표현이다. 또한 ‘무명유절’은 화려한 이름을 잃어버렸다 해도 기억과 추억으로 유지되는 명절의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 과시되지 않아도 지속되는 ‘평범한 일관성’이 명절을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덧붙여, 단시론의 관점에서 보면 여백의 의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여백은 존재들 사이에 잠재된 촉감의 간극이다. 1행은 명절이라는 존재에 대한 체감이고, 2행은 정서를 지배하는 경제적 의미의 부조화이며, 3행은 문명이 남긴 선물의 허구성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이 간극들을 서둘러 해설로 봉합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단시는 결론을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긴장을 솔직하게 여백으로 남겨 두어 독자에게 사유의 잔여를 위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명절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허무로 물러나지 않는다. 문명이 생산한 피로를 받아들이되, 그 피로 속에서도 최소한의 절제를 찾아내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마무리-물질의 풍요 너머 기억의 부유함으로

「나의 명절(名節)」은 다시 돌아온 설날을 어떤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민낯으로 마주해 보자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우리는 흔히 명절이라 하면 눈에 보이는 풍요와 떠들썩한 화제들을 떠올리지만, 진정한 명절의 품격은 결핍 속에서 피어나는 ‘기억의 부유함’에 있다. 경제적으로 조금 가난할지라도 지난 세월의 온기가 담긴 추억을 꺼내 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상다리 부러지는 명절을 누리는 ‘기억 부자’다. 반대로 손에 쥔 소유가 아무리 넘쳐난다 해도, 그 속에 사람의 체온이 담긴 기억이 메말라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기억 가난’이 아니겠는가.


문명이 가져다준 편리와 이기(利器)는 끊임없이 나를 현혹하며 본질적인 기억을 상실하게 만든다. 반짝이는 새 물건과 화려한 숫자로 구축된 허상 속에서 정작 ‘나’라는 존재의 뿌리를 놓치곤 한다. 이제 그 허상을 잠시 허물어 보자. 멋진 차를 타고 면제되는 통행료에 안도하는 소소한 행복도 소중하지만, 가끔은 두 발로 묵묵히 땅을 딛고 걸으며 자기 몸에 지문처럼 기록된 옛 추억을 복원해 보는 즐거움을 누려 보자.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문명이 가르쳐 준 정답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고수한 오답 ‘2’ 속에 숨겨진 진실한 자아를 되찾게 될 것이다.


비록 세상이 변하여 명절의 형식은 희미해지고 ‘무명(無名)’의 계절이 온다 해도 결코 슬퍼할 일은 아니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히려 지워지지 않는 절기의 감각, 즉 ‘유절(有節)’의 생명력이 더 선명하게 고동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내 온몸의 세포마다 촘촘히 축적된 기억의 힘은 그 어떤 문명의 위기보다 강하다. 부질없어 보였던 그 숱한 샌드위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듯, 몸에 각인된 추억의 힘으로 해마다 새로운 무늬를 그리며 명절의 즐거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이 명절, 부질없는 것들에 담긴 ‘평범한 일관성’을 소중하게 껴안으며 우리 안의 가장 따뜻한 손의 촉감을 지금 여기에서 되살려 보자.


“나의 생애가 전환된 그 명절의 순간을 오늘도 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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