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환, 『우리 하늘 아버지』를 다시 읽으며 —
책을 만나다
새벽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 불쑥 일어나면 당황하듯, 설익은 잠이 한밤중에 몸을 먼저 깨우는 일도 그런 것 같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해 보다가도, 대개는 자리에서 그냥 일어난다. 정신은 흐릿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가만히 있다가 불쑥 마음에 떠오르는 일을 하기도 한다. 잠들기 전 멈춘 일을 천천히 이어가거나 쓰다 만 문장을 다시 붙여 보기도 한다. 읽다 덮은 책을 처음부터 펼치기도 한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수첩의 빈칸만 바라볼 때도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기도 한다. 적막한 시간이라 불러도 될 순간인데, 실은 쓸쓸한 기운이 더 짙게 내려앉을 때가 많다.
오늘은 책상 한쪽에 쌓인 책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위에, 미처 읽지 못한 신간이 깔판처럼 포개져 있었다. 어떤 책은 읽어야지 하는 마음만 무성한 채 반납 기일에 쫓겨 떠나고, 어떤 책은 사둔 지 오래되어 다시 펼치려니 이미 낯설다. 멋쩍음을 가리려는 듯, 나는 책등의 제목들만 가볍게 훑는다. 놓인 책의 등판만 보더라도 요즘 나의 독서 편력이 드러난다. 나는 기독교 서적을 예전만큼 꾸준히 읽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다른 분야의 책들 사이에서 기독교 신간은 자주 뒤로 밀린다. 애써 고른 책조차 제목과 목차만 확인하고 넘기는 날이 많다. 알다시피, 세상에 나오자마자 회자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출간과 동시에 잊히는 책도 있다. 그 사정을 아는 바 없지만, 모든 책의 운명을 일일이 좇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늘 유쾌하지 않다. 그 사이에 나는 습관처럼 내 독서 태도가 더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조용한 자책을 내뱉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잔상이 오래 남는 기독교 관련 서적이 한 권 있었다. 잠이 덜 깬 나른한 손으로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집어 들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며칠째 천천히 읽던 책이었는데도 새벽에 낯선 문장들이 새로 떠올랐다. 두껍지 않아 손에 알맞게 잡히는 그 책은 『Our Father in Heaven 우리 하늘 아버지』(이하 『우리 하늘 아버지』, 이상환, 학영, 2025)였다. 읽는 동안 나는 우연찮게, 평소 품어온 한 궁금증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무엇을 읽었는가
저자의 필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글은 담백하다. 주장은 명료하며, 전개는 유연하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사례 제시, 특히 성서 내외적 관련 1차 문헌 활용이 능숙하다. 읽는 이가 어렵지 않게 책의 논지 안으로 스며들도록 이끈다. 나 역시 그의 이전 저작들을 출간에 맞춰 읽었던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항간의 평판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내 문체 취향과 결이 달라 낯설게 읽히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대중 친화적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그의 장점은 분명하다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가지 다른 문제가 마음에 조금 걸렸다. 사실, 이 문제는 내가 기독교 서적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이유와 맞물려 있다. 물론 이 책의 장점은 이미 여러 리뷰와 서평을 통해 입증되었다. 나도 충분히 동의한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은 책의 내용이나 호평의 이유를 거스르려는 비평이 아니다. 이 책의 서술 방식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글쓰기와 나아가 기독교 서적의 '독특한' 특징에 대해 평소 내가 가졌던 질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기독교 서적을 잘 읽지 못하는 이유를 다시 검토해 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이 책의 서술 방식의 특징 중 내가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점을 정리해 보려 한다.
우선, 이 책의 장르가 불분명하다. 즉, 장르가 혼용되는 인상이 짙다. 평소 나는 이 점이 기독교 서적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학술서가 아닌 평신도를 위한 대중서이자 성찰 에세이”라고 단단히 규정한다. 얼핏 이 선언은 이 책의 독자가 누구든지 책을 읽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사전 안내 기능을 한다. 저자가 사용한 ‘대중서’는 아마도 출판 대상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가 보이고, ‘성찰 에세이’는 이 책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른바 묵상과 같다는 것을 일러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의 장르가 불분명해지는 현상이 생기는 것 같다. 이 책의 텍스트 전체를 읽다 보면, 이 책은 대중을 위한 성찰 에세이로 보기에 어려운 부분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의 주장이 강하게 배치되어 있고, 각 장에는 다양한 논지가 폭넓게 인용된다. 문체 안에는 독자를 설득하려는 의도를 배제하지 않는 것 같다. 요컨대, 이 책은 학술서의 성격이 선명하다. 성찰 에세이라는 점에서는 주관적 신앙 고백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의지가 강하게 들어있다. 따라서 일종의 설교와 강해집 같은 인상이 짙다. 특히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주관적 설명과 선언적 어조가 단락 사이사이에 자리한다.
달리 말하면, 학술적 논증을 이어가다 신앙고백적 주관으로 선언하듯(설교체라고 해야 하나?) 글의 길을 급전환한다. 심지어 학술적 관점을 무색하게 하는 단도직입적 선언으로 글을 이끌어 간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책에는 학술적 논증과 신앙적 선언이 경계 없이 섞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서라는 점에서 독자가 각 주장에 대한 전문적 판별 기준이나 학계에서 통용되는 비평적 근거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저자의 신앙적 확신을 수용하거나 비판해야 하는 장르 혼종성(Genre hybridity)을 유의해서 읽어야 하는 인문학적 '강해서'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왜 저자는 학문적 장치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스스로 비학술의 위상을 미리 언급했을까?”
그런데 문득, 나는 이런 서술 방식의 혼용이 어쩌면 이 책의 핵심적 서술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그동안 일반적인 기독교 서적에서 내가 발견했던 공통적인 서술 방식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다.
나는 이 점에서 『우리 하늘 아버지』에 대한 호평 뒤에 비평적 독자로서 이 책에 대한 독서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향은 두 갈래다. 하나는 저자의 ‘학술적 논점을 따라가는 것’이다. 논지와 논거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읽는 것이다. 그가 활용한 다양한 자료들이 예수가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이해하는 데 적절하게 이바지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곧 낯설게 읽기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신앙적 주관으로 제시하는 단락들을 중점적으로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술적 주장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저자의 확신을 통해 평소 습관적으로 암송했던 주기도문의 속뜻과 내 삶의 의의를 깊이 묵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에 이 두 영역이 구별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있는 경우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결국, 장르의 혼용은 읽기의 섞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다룬 주기도문은 일반적인 인문학 관련 주제와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을 텐데, 끝내 개인적인 묵상, 강해로 매듭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인문학적 의의를 스스로 점검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토대로 이 책 너머를 내다보며 나의 글쓰기와 주기도문에 대한 나의 사유를 좀 더 다듬어보려 한다.
책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논지와 논거
우선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나의 비평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즉, 『우리 하늘 아버지』는 주기도문을 여섯 청원으로 나누어 학술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저자의 신앙적 선언이 전체의 리듬을 주도하는 혼종적인 서술 방식을 취한다. 이는 기독교 서적의 일반적인 특징인 대중서의 형식을 취하려는 외적 의지와 학술적 입증을 지향하는 내적 태도 사이에서 발생한 문체적 ‘수사적 충돌’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우리 하늘 아버지』에서 혼종적 장르를 주목했다. 이런 장르들로 인해 책의 문체는 ‘수사적 충돌’을 일으킨다. 수사적 충돌이란 장르와 저자의 문체 사이에 배치되는 서술적 비일치이기도 하다. 이것이 의도적일 수 있겠으나 수사적 충돌이 텍스트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학술적 전거를 통해 본문의 의미를 정밀하게 밝히는 대목이 이어지다가도, 어느 순간 신앙적 확신이 논증의 간극을 메우며 결론을 선도한다.
물론 이런 충돌은 책 전반에 걸져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 주장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나는 이 책에서 ‘주기도문에 반영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거룩한 삶으로 이 땅에서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독려하겠다’는 주장을 적극 받아들인다. 주기도문의 신앙의 ‘아드 폰테스’를 자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명확한 주장이 문체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면 문제는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요컨대, 이 책 역시 다른 기독교 서적들의 특징처럼 신앙적 선언으로 시작해서 학술적 논증을 거쳐 결국에는 신앙적 결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서술적 전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는 기우가 사라지지 않는다. 논증과 확신의 문체 섞임은 신학 텍스트 특유의 문체의 진자 운동을 재현하는 것 같다. 그 운동의 강약이나 경계가 독자에게 선명하게 의식되지 않거나 책의 주조음을 혼용해 들려줄 때, 나 같은 독자는 ‘에세이’와 ‘학술서’ 사이에서 장르적 좌표가 희미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뿐만 아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기독교 인문학의 깊은 사유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다소 손상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 이 책에서 나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비학술적이라는 선언과 학술적 글쓰기의 병치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비학술성을 선언한다. 그런데도 실제 본문 서술에서는 명확한 문제의식·체계적 논증·풍부한 전거로 논증을 이어간다. 이처럼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이 책은 전체적으로 저자가 ‘비학문적이다’라는 자기규정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논증과 신앙적 선언’이라는 수행 방식 사이의 명백한 긴장을 만든다.
둘째, 정경적 읽기의 활용과 정경 외 문서의 적극적 인용이다. 저자는 주기도문을 창세기 1–3장뿐 아니라 정경 외 문서까지 호출하여 신선하게 해석한다. 그런데 이는 대중적 성찰 에세이라는 글의 성격을 고려할 때, 오히려 학술적 독해가 주기도문에 적극 반영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창세기 1-3장은 물론이고, 천상회의 전승, 위경인 『아담과 하와의 생애』(=그리스 판본 『모세의 묵시록』)를 적극 활용한다.
셋째, 논리적 설명과 주관적 선언의 복합이다. 청원의 의미가 마태복음의 직접 문맥을 넘어 성경 전체, 나아가 조직신학적 개념 체계와 개인 신앙의 경험과 확신으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해석은 논리적 전개를 뛰어넘어 종종 주관적 설명과 권고와 결국, 신앙의 회심을 촉구하는 선언의 형식을 취한다.
책의 이해-논거에 대한 나의 검토
앞서 개인적 견해로 밝혔지만, 이 책은 저자 스스로 ‘학술적이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불가피하게 ‘학술적 서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서술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이런 서술 방식에 대한 저자의 의도는 전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텍스트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러한 수사적 진자 운동이 이 책의 결함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기우는 그동안 나의 독서에서 경험했던 대로, 이 책마저도 주기도문에 담긴 예수의 의도를 신학 너머 인문학적 세계관으로 수평 이동하여 그 외연의 확장을 이루기 전에 서둘러 내부의 문법으로 회귀한 것 같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나는 이 책에서 추론할 수 있는 수사적 충돌 양상이 어떤 것인지 부연해보려 한다. 앞의 나의 논거를 한번 더 정리하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비학술 표방과 학술 수행의 병치, 둘째, 정경과 정경 외 문서의 적극적 활용, 셋째, 논리적 설명과 주관적 선언의 복합 등이다.
첫째, 비학술적이라는 선언과 학술적 글쓰기의 병치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비학술적’이라고 명시한 것은 자신의 주기도문 해석이 독자들에게 ‘새로우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은혜롭게’ 납득되기를 기대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출판 후 반응을 보면 이런 의도는 어느 정도 성취된 듯하다. 하지만, 다음 몇 가지 예를 보면 이 책의 학술적 성격은 오히려 더 뚜렷해지는 것 같다.
우선 저자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의 해석 방법을 제시한다. 이른 바 학술적 의미에서 ‘공시 비평적 읽기’를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의 방식은 정경적 방식이다. 단순하게 말해 ‘거대한 맥, 하나님의 계시(13쪽)’—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안에서—라는 틀에서 읽으려 한다. 그런데 이 방법론 자체가 이미 학술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제시한 이 책 읽기의 길라잡이를 보면, 학술적 성격이 오히려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고대 세계의 다양한 배경 지식을 고려한 해석, 주기도문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행동 강령의 집합체”로 권면, 자신의 해석이 여러 해답 중 하나라는 태도는 그 말 그대로 고스란히 학술적 태도를 반영한다.
한편, 저자는 주기도문을 분석하며, “주기도문이 형성되고 전승되던 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전통, 곧 예수님과 마태복음의 저자, 그리고 주기도문을 들었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청중이 알고 있었을 법한 전통과 대화하며 텍스트에 접근했다.”라고 부연한다.
결국, 이런 제안은 자신의 주장이 단순히 기독교적 해석에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의 문헌학적 자료와 비교 연구한 결과라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는 서술의 예이다. 그런데도 저자가 자신의 저술을 ‘비학문적’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의도를 좀 더 차분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둘째, 정경적 읽기의 활용과 정경 외 문서의 적극적 인용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주기도문 해석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정경, 또한 정경 밖의 관련 자료로 확장하는 태도다. 이것은 저자가 여러 논문에서 보여준 평소 연구 주제와 방법론과 일치하는 태도인 것 같다. 저자는 창세기 1–3장의 원형적 서사부터 그리스-로마 신화, 나아가 정경 외 문헌인 『아담과 하와의 생애』까지 호출하며 해석의 틀을 구축한다.
예컨대 주기도문의 첫 구절에서 ‘하늘들’이라는 복수형을 강조하는 대목이 그렇다. 히브리 성경의 ‘샤마임’이 지닌 쌍수형(dual form)의 전통을 고려할 때, 이를 굳이 복수형의 특수성으로 치밀하게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학술적 논쟁을 전제한 것이다.
결을 좀 달리해 보면, 정작 예수 자신이 ‘하늘’을 ‘삼층천’이라는 구도로 이해하고, 우리가 멀리 있고 별개의 하늘에 ‘거주’한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궁금하다. 어쩌면 코헬렛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5:2)’라는 구도나, 시편의 시인처럼 “하늘에 계신 이”(시 2:4), “하늘에 계신 주여”(시 123:1–4)가 유대인의 머릿속에 선명히 담겨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간구에서 ‘악’을 규명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생애』를 대폭 인용한 부분은 이 책의 ‘장르 혼종성’을 잘 드러낸다. 저자는 이 문헌을 근거로 ‘악’을, 인격화된 ‘악마’에 대한 저항으로 치환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핵심 동기어인 ‘하나님의 형상’ 및 ‘용서’의 주제와 빠르게 연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을 주기도문이라는 압축적인 텍스트에 투사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증이 남아있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의 행간 어디에서도 창세기의 전통을 의도적으로 계승했다는 명시적 흔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시대가 1세기 초반, 그리스-로마 문화권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나로서는 예수의 다른 가르침들을 살펴보아도 그가 그러한 이방 문화와 직접 접촉하거나 인용했다는 단서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문헌적 접촉 가능성은 제자 요한과 같은 후대 기록자들에게서 더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수의 기도를 정경적 관점과 정경 외 문헌들 속에 배치해 읽으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탁월하지만 이미 논쟁적인 영역에 서 있다는 것을 함의하지 않을까. 이는 저자의 주장이 단순한 에세이적 감상을 넘어, 설득 가능한 학술적 전거를 통해 입증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실제적인 의문은 주기도문이 들려진 현장성에 있다. 산 위에서 예수를 둘러쌌던 청중들이 주기도문을 듣는 순간, 저자가 제시한 복잡한 배경 지식을 즉각적으로 가동해 그 깊은 의도를 구체적 현실 아니면 현실에 대한 상징체계로 바로 이해했을지는 의문이다. 설령 그들이 당대 지식에 능통했다 하더라도, 주기도문 텍스트 자체가 그러한 다층적인 의미를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저자의 논점이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 있는 주장’이라는 겸손한 말은 그 자체로 이미 학술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근거이다.
물론 저자가 자신의 논증적 주장 너머로 독자들에게 결단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당위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비학술적일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선언적 태도는 이 글이 ‘하나의 가능성’에 그친다기보다는 확고한 자기 신념에 근거한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저자는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태도를 논증의 방식으로 유지한다. 동시에 선언적으로, 하나의 확고한 답을 제시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정확한 잣구로 표현하지 않기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저자의 글은 곳곳에서 주기도문의 모든 청원을 하나의 윤리로 재구성해 독자의 행동을 촉구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논증적 서술이 급격히 주관적인 확정적 선언으로 전환하는 특징이 선선명하다는 나의 생각은 좀 더 이어진다. 나아가 이런 윤리가 독자를 항해 자기 책임적 윤리를 독려한다는 것에도 더 생각이 닿는다. 우리 삶을 하나님의 형상답게, 거룩한 삶으로 견인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그것이 꼭 학술적 논거를 거쳐야만 나올 수 있는 주장일지는 별개의 문제일까?
이처럼 나의 두 번째 논거는 저자의 글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이 해석의 진위라기보다 서술 방식이라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한편, 무엇보다 주기도문에 반영되었을 예수의 사고가 이토록 파편화된 다양한 자료들을 경유해야만 그 신학적 논제를 찾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여전히 남는다. 또한, 그것이 하나의 윤리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은 일반적인 주기도문 해석에서 이미 충분히 다뤄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작 예수가 주기도문을 통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당대 세계와 맞닿게 하려 했는지에 관해, 이 책을 토대로 독자의 다른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하면, 이 논거는 저자가 정경 안의 자료와 정경 외적 자료를 적극 활용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다. 이 점은 그가 학술적 논증을 지향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선언에 기댄 결론을 맺음으로써, 텍스트 안에서 수사적 충돌을 반복하는 인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적절한 근거다. 요컨대 ‘비학술성’을 표방하면서도 정경과 관련된 자료를 토대로 한 글쓰기는 실제로 철저히 학문적 논증의 노정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 있는 흔적이다. 동시에 비평적 읽기를 통한 긴 논증 뒤에 주관적 자기 선언으로 마무리하는 서술을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셋째, 논증적 설명과 주관적 선언의 복합
이 논거는 앞서 다룬 두 번째 근거와도 이어진다. 다른 점은 이 근거는 하나의 단락이나 장(章) 안에서 사용된 특징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글 중간에 논리적 설명을 이어가다가 자신의 주관적 신앙 고백을 폭넓게 삽입한다. 아마도 자기 논증의 실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서술은 체계적으로 단락이 구분되거나, 구획된 결론의 메시지가 아니라 글 중간의 문장, 단락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글의 흐름이 멈칫해진다. 예를 들어 이 점은 다섯 번째 청원에서 좀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죄’와 ‘빚’이라는 단어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예수가 ‘빚’이라고 사용한 단어에 담긴 함의를 밀도 ㅣ있게 탐구한다. 그리고 그 빚을 ‘거룩의 빚’이라는 용어로 명명한다(164쪽). 그와 함께 저자는 이 ‘거룩의 빚’에 담긴 의미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로 부연한다. 다시 말해, 저자에 따르면, 본래 예수는 주기도문에서 ‘빚’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 빚의 의미는 사람들 사이의 채무 관계를 말하면서도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빚’의 문제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165쪽 이하), 이 ‘빚’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고 확신한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형상으로서 책임'을 방기 했기 때문이다. 그저 죄가 아니라 빚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 거룩의 빚’을 진다는 논리다.
특히 이 다섯 번째 청원을 언급할 때 다수의 학자가 ‘세족식’과 연관 지어 해석한다는 것을 끌어온다. 하지만, 이 언급 자체가 이미 논증적이면서 주관적 선언이 복합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직접적으로 논증의 결 너머를 바라보며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했던 적을 떠올려 보라’고 제안한다(175쪽).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시 이 ‘빚’의 문제를 곧 자기 인식의 주제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청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지극히 관계론적 ‘용서’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못 박는다.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때, 단지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사람의 삶과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길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191쪽)
이처럼 저자는 첨예한 논증을 이어가다 개인적 신앙으로 급선회한다. 하지만, 나는 ‘빚진 자의 용서’는 ‘용서보다 빚’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대목에서, 나는 왜 예수가 그 많은 덕목 중에서 —특히 사랑과 하나 됨 같은 주제—‘빚을 기반으로 한 용서하고, 용서받는’ 주제를 가르쳤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왜 유독 타인과 ‘용서’의 문제를 선별해서 핵심 가르침으로 강조했을까 말이다. 나아가 나는 이런 권면이 예수께서 앞서 가르친 청원 항목들과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심지어 이 ‘빚의 용서’가 은유일 수 있다면, 이 점이 여섯 번째 청원인 ‘악’의 문제와도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결국, 이런 혼종 양상이 저자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별개 문제로, 그가 생각하고 설명하고 논증하는 주기도문 이해는 독자에게 한 가지 과제를 제안한다. 과연 예수가 처음 말했을 당시 예수의 인문학적 관심(신학적 관심이 아니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부여된 이 과제에 대해 나름대로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이 책을 계기로, 내가 오래 붙들어온 더 큰 질문으로 시선을 옮길 수 있다는 기대감도 은근히 생긴다.
이제 내가 다루고 싶은 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저자가 보여준 혼종의 글쓰기, 문체의 수사적 충돌이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글쓰기에도 반영되었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이 글을 토대로 주기도문에 대한 나의 새로운 독법이다.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글쓰기의 문법의 확장 필요성
나는 오래전부터 기독교 서적에 대해 한 가지 궁금증을 벗어나지 못했다. 왜 기독교 서적은 종종 “읽히지만 그 세계관이 다른 세계로 퍼지지 않고,” “개인적으로 공감은 얻지만 기독교 너머로는 확장하기 힘든” 양상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왜 신앙 공동체 내부에서는 깊은 반향을 일으키는 텍스트가 기독교 바깥의 인문 독자에게는 문턱 높은 장르로 인식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이 특정 저자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진즉 알았다. 오히려 오늘의 기독교인의 글쓰기 관섭, 나아가 기독교 서적의 출판문화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서술 습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선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글쓰기 관습을 포함하여 기독교 출판의 문법을 생각해 보려 한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개의 방향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하나는 기독교의 독자들을 배려해 쉽고 친근하게 말해야 한다는 방향이다. 읽기의 편의성이다. 쉽고 단순하며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선호한다. 다른 하나는 신학적 고밀도의 논증을 확보하기 위해 엄밀하고 권위 있는 문체로 서술되어야 한다는 방향이다. 학술적 무게감과 새로운 신학의 소개다.
문제는 이 둘이 늘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대체로 한 텍스트 안에서 경계 없이 뒤섞이는 양상이다. 앞에서는 에세이의 얼굴로 독자를 초대하고, 갈수록 학술적 논증의 문법으로 속도를 바꾸기도 한다. 혹은 촘촘한 주석과 새로운 신학 사조를 전거로 전개한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신앙적 선언으로 급침한다. 아쉽게도 의도하지 않은 논증의 무력화가 일어난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인문학 주제와 변증적 대화를 성취하는데 주저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이 전환이 성공할 때는 ‘신학과 신앙의 통전성’이라는 미덕이 되지만, 실패할 때는 장르 혼선과 설득력의 비약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법이 다른 인문학 분야보다 기독교적 글쓰기에 자주 반복되는 것 같은가. 추론이긴 하지만, 나는 그 배경에 기독교 서적이 놓인 현실적 문제와 이상적 추구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생활에 직접 몸담은 독자들은 자기 신앙에 곧바로 적용 가능한 즉시적 유익을 요구할 것이다. 난해한 주제보다는 쉬운 설명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책은 술술 잘 읽혀야 한다. 결국, 쉽게 적용 가능해야 하며, 동시에 “가볍지 않다”라는 신학적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서적의 글쓰기가 선택한 가장 지혜로운 전략은 아마도 ‘대중적 형식 + 학술적 장치 + 신앙적 결론’의 결합인 것 같다. 주제의 진입은 평이하게 하고(에세이), 서술은 촘촘히, 단단히 하며(논증), 결론에 상응하는 출구는 고백과 확신, 다짐으로 닫게 하는(선언) 방식이다. 이 구조는 기독교 글쓰기의 관점에서 내부 독자에게는 분명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기독교 밖의 외부 독자에게는 오히려 “이 텍스트는 결국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 돌아간다”는 인상을 남길 위험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내가 제기하고 고민하는 기독교 글쓰기가 지닌 문제의 핵심은 신앙적 언어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언어의 배열이다. 만약 주관적 신앙적 확신이 객관적 논증의 결과와 인문학적 철학의 주제로 제시될 때와, 치밀한 논증의 결론으로 주관적 신앙의 재진술되는 경우 독자가 체감하는 독서의 감각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독자는 저자가 주도하는 판단의 과정을 따라가며 동의하거나 반박하며 독서에 참여할 수 있다. 단지 기독교적 용어나 의미가 아니라 그 고유한 용어들의 인문학적 ‘번역’을 공감하거나 반론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텍스트는 객관적 설명 형식을 띠고 있다고 실질적으로는 그 결론이 기독교적 주장의 재확인이나 단순히 윤리적 권면으로 흐른다면 그 순간 비기독교 독자는 책이 건네는 주제에 대해 토론의 파트너가 아니라 제3의 청자의 위치로 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의 글쓰기, 기독교 서적 출판이 인문학 담론과 접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이 지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화의 문법보다 증언의 문법이 앞설 때, 텍스트는 널리 읽히기보다 수구적으로 닫힐 수 있는 위험은 어느 분야에나 도사리고 있다.
나는 성서 해석의 층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고 생각한다. 아쉽지만, 『우리 하늘 아버지』의 경우도 어느 정도 이런 문체적 특징이 나타난다. 실제로 예수가 가르쳐준 주기도문이 이후 공동체 안에 깊이 스며든 텍스트라면, 독자는 먼저 그 말의 최초 발화자인 예수의 말하기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떤 사상적 배경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쳤는지, 그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에 앞선 과정으로 나는 그의 말씀을 하나의 덩어리로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절하기보다 통째로 이해하는 것이다. 반복 낭송은 예수의 말을 내 몸으로 재현해 보려는 시도이다. 예수가 던진 말의 결을 내 몸으로 느끼고, 그가 어디에 강조점을 두었는지 반복해서 찾아내려 애쓰는 노력이다. 무한한 반복을 통해 점차 그 말의 속을 체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기도문 이해의 첫걸음은 주기도문에 담겼을 최초 발화자 예수가 담았을 언어의 숨결을 뒤따라가보는 것일지 모른다.
이어서 좀 더 지적 호기심이 발생한다면, 예수의 말을 인문학적 공론장으로 번역하기 위한 ‘공부’를 시도하면 좋겠다. 공동체적 수용의 역사, 역사적 맥락(Sitz im Leben), 문학적 구조, 수사적 기능, 수용사적 변형을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 그때 예수의 말은 그 처음 숨결이 어떻게 신앙 내부의 언어를 넘어 공적 언어로 이동했는지 추적할 수 있다. 역사적 층위를 압축하고 규범적 적용만 앞세우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예수의 말은 공동체 내부의 신앙 훈련서로는 강력해지지만 사회적, 세계적 공론장과의 접면은 얇아질 수밖에 없다. 해석의 초점이 너무 빨리 ‘텍스트가 처음 왜 말해졌는가’에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로 이동할수록, 신앙 바깥의 인문 독자가 개입할 질문의 틈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지적 탐구의 과정을 거친다 해도 불확실한 해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중에는 많은 주기도문 해설서가 출판되어 있다. 이미 보편화된 것이긴 하지만, 주기도문이 처음 발화되어 마태복음에 수록될 당시의 고유한 사회적 정황(Sitz im Leben)을 충분히 고려한 해석도 있다. 그 반대로 사회적 맥락을 상대적으로 소거하고, 그 자리를 신앙적 당위가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 시민 사회에서 일반 독자들이 주기도문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글쓰기는 빈약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일반 독자들이 주기도문이라는 장르에 담긴 인문학적 사유에 동참할 사유의 공간도 좁아진다.
이런 상황은 나에게 오늘날 기독교인의 글쓰기나 저술이 더 넓은 인문학 담론에서 왜 여전히 한쪽으로 밀려나듯 ‘비켜 서 있는가’에 대해 좀 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다만, 이런 글쓰기 문법이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장점—이론과 실천, 지성과 경건, 해석과 삶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의지—우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텍스트가 지금 어느 층위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논증과 선언이 어디서 교차하는지, 설명과 권면이 어떤 순서로 결합되는지를 충분히 표지만 해준다면 그것은 독창적 장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표지가 생략되면, 독자는 논리의 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낯선 신앙 결론 앞에 도착한 듯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위험성도 여전하다.
결국 이 질문은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되돌아오는 생각이다. 이를 잘 고민한다면, 기독교적 사유에 근거한 글쓰기는 신앙 내부의 확신을 강화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밖의 외부 독자와도 공유 가능한 공적 문장을 마련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고유성을 보존하되, 그 고유성이 왜 타자에게도 사유의 가치가 되는지 보여 주는 번역의 윤리를 고양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신학적 깊이와 대중적 전달, 공동체적 고백과 공론장적 논증은 서로를 가리는 선택이 아니라 더 넓어진 세계관과 더 투명한 사유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갈 것이다.
정리하면, 나의 글쓰기와 관련해서 『우리 하늘 아버지』의 가치는 기독교 글쓰기의 좌표를 인묵학의 관점에서 모색하는 데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출판이 가진 힘—읽히는 문장, 선명한 확신, 넓은 자료 동원—과 한계—장르 전환의 급격함, 선언과 논증의 경계 혼선—를 성공적으로 성취했다고 보인다. 나는 이 책의 완성도 높은 글쓰기를 발판 삼아, 오늘의 기독교 글쓰기에 대한 나의 비평 거울을 다시 닦아 보려 한다. 이 책을 토대로 인문학에 기반한 기독교적 글쓰기를 점검하고, 탁월한 저자들의 기독교 서적이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적 사유를 떠받치는 질문의 동반자가 되도록 나의 방식으로 애써 보려 한다. 이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주기도문의 이해를 잠깐 덧붙여보려 한다.
주기도문에서 강조되었을 예수의 말들
나는 주기도문을 읽을 때 두 가지 방식을 우선 적용한다. 첫째, 읽기다. 둘째, 도석(道釋)이다.
읽기
가장 먼저 가장 먼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당시 예수의 말로 누군가에게 낭독하듯 읽어 본다. 그 본문을 천천히 읽다 보면, 가장 강조되었을 말이 궁금해지고 점차 뚜렷해지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말을 통째로 무한히 나의 말로 말하고 듣는다. 그리고 그때 말을 쏟아내던 예수가 어떤 말에서 주춤하고, 어떤 표현에서 울컥했는지, 어떤 구문에서 숨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았는지, 힘주어 핵심 단어, 키워드를 강조하며 가르치고 싶었는지를 상상한다. 물론 요원한 과정이다. 여전히 답을 확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추론의 결과 가장 강조되었을 핵심 키워드가 눈에 선명해졌다. ‘엘테토 바실레이아 투 테우(eltheto Basileia tou Theou)’이다. ‘온/오는(come) 하나님의 나라’다. 이와 함께 예수가 강조했을 핵심 표현이 다음 세 단어이었을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나라(Basileia)였을 것이다. 예수 사역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언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주기도문에서도 예수는 “와 있는,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라고 촉구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가르침은 당시 로마의 제국적 질서(Pax Romana)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샬롬(=Pax Dei)이 지금 여기, 이 땅의 현실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담아낸 정치·사회적 갈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둘째, 예수는 오늘(semeron)이라는 말을 강조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말이다. 번역 논쟁에서 보더라도 핵심어는 ‘양식’보다 ‘오늘’에 찍힌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예수의 말은 ‘내일을 기약하기보다 내일의 양식을 오늘 너희의 양식으로 요청하라’라는 현세적 굳거한 신뢰의 청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는 미래에서 얻는 막연한 양식이 아니라, 오늘 그 양식을 받아 누리는 현세적 관심이 우세한다.
셋째, 빚(ophileima)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죄’를 말하기 전에 ‘경제적 부채(debt)’를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기도에 담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은, 다분히 경제적·채무적 관계를 희년처럼 회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가르친 기도는 사람 사이, 세계의 관계 안에서 경제적 결박이 풀린다는 실제 현상을 은유로 삼는 것 같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해방을 기도의 핵심으로 일깨우려 했을 것이다.
정리하면, 나는 예수가 산 위에서 이 기도를 직접 낭독했다면 그것은 개인 영성의 경건한 독백이 아닐 것이다. ‘와 있는/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매일 되새기라’는 권면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쳤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골목 어귀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적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의 불의(부채, 굶주림, 압제)를 몰아내기를 간구하는 저항적이고 희망적인 어조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기도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이러한 ‘사회적 정황(Sitz im Leben)’이 도드라진다. 어쩌면 이런 사회성이 주기도문에 반영된, “기독교 글쓰기가 흔히 놓치거나 신앙으로 환원해 버리는 인문학적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석
도석은 길을 걸으며 진리를 해석해 본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암송’이 필수적이다. 주기도문을 하나의 덩어리로 듣는 것은 곧 그것을 암송하겠다는 의지다. 암송은 온몸으로 그 본문을 새기겠다는 결심이다. 암송을 토대로 도석은 길을 걸으며 주기도문의 처음과 끝을 발걸음에 맞춰가며 나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즉, 암송하고, 온몸의 오감으로 상상하며 체감하여 ‘그의 말을 리듬을 따라 떠올려 마침내 자기 언어로 최적화하여 변환한다. 이른바, 도석은 주어진 말을 하나의 사건으로 ’뒤따르는 해석’이다. 그것은 문자, 단어 분석이 아니라 그의 말, 이야기 전체를 통째로 내 몸의 혈로를 따라 흘려보내는 일이다.
이런 나의 방식을 따라 아주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나는 잠정적으로 주기도문에 실린 예수의 감정을 아주 조금 이해한 것 같았다. ‘그 나라의 전격적인 도래’를 간구하는 제1·2 청원에서 예수의 감정이 솟구친 것이다. 이것이 대전제다. 이어지는 간구들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삶의 양식에 대한 구체적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즉, 예수는 경제적 차원에서 ‘내일의 양식을 오늘로 당겨 오는 나눔’을, 관계적 차원에서 ‘내가 용서받은 농도만큼 타인을 용서하는 파격’을, 그리고 윤리적 차원에서는 ‘선과 악이 뒤엉킨 세계에서 악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자기 경계’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기독교적 글쓰기가 추구해야 할 장르의 외연 확장과 긴밀하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이 대선언의 선명함과 소선언들의 구체성으로 구성된 듯하다. 대선언은 앞서 말한 대로 ‘엘테토 바실레이아 투 테우’ 일 것이다. 특히 이 구문에서 나는 3인칭 명령형의 의미를 맴돈다. 히브리어 문법처럼 ‘기원과 희망’의 명령, 즉 지시법(jussive)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동사 ‘엘데토’는 역동적 표현이다. 이미 와 있는 결과보다 ‘오도록 간청’하는 동작과 관련 있다.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을 향해 역동적으로 이동하여 침노하는 상황이 떠오른다. 이 말속에는 공간적·시간적 거리를 좁혀 가는 운동성이 선명하게 들린다.
아마도 이런 표현은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선포했던 ‘엥기켄’(가까이 와 있다. 엥기조의 직설법 완료 3인칭 단수)의 의미를 기도의 어투로 바꾼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나는 길을 걸으며 이 구문을 “나라를 가까이 오게 하시며”로 재생한다. 이 표현은 나라 자체인 야훼가 그 나라를 막연한 미래에 보내주는 사건이 아니라, 야훼 스스로 지금 당장 우리의 현실 속으로 육박해 들어오시기를 바라는 긴박함을 더 잘 살려 낸다. 다시 말해, 이런 번역은 주어의 주체성과 간구의 방향을 명확히 한다. 만약 예수가 “나라를 가까이 오게 하시며”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이 ‘오게 함’의 주체가 당연히 하나님임을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오게 하시며”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이 땅의 불의한 통치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와 달라는 강력한 요청(사역적 의미)을 담을 수 있다.
다시 『우리 하늘 아버지』로 돌아가 보자. 저자가 이 책에서 ‘하늘 아버지’의 관계적 측면을 강조하며 신앙적 선언에 집중한 것은 주기도문 제2청원이 담고 있는 “나라가 오게 하시며”는 역동적이고 사회적인 부르짖음을 연상하게 한다. 그의 서술에 힘입어 이 “오게 하시며”라는 운동성이 현세의 고통받는 이들이 로마의 질서 너머 하나님의 통치를 희구하는 사회적 의지에 관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예수가 선제적으로 간파한 흔적이라는 것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결국, 도석은 텍스트를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경계하여 주기도문이 본래 지녔던 세밀한 숨결을 오감으로 느끼고, 나아가 그 기도문이 뻗어나가는 세계 윤리를 뒤따라가보려는 것이다. 내적 다짐을 넘어 사유의 외연을 더 넓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평소 공부한 지식과 선이해에 앞서 주기도문의 속살을 먼저 체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삶의 방식을 기독교 신학/신앙 너머 인문학—특히 문학과 철학과 사회학의 범주—로 확장하는 기틀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단 한마디의 신앙적 언어 없이도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일반 독자를 끌어들이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이 점은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기독교 ‘작가’로 자기 좌표를 확보한 분들에 대한 나의 기대이기도 하다. 바라기는 예수의 주기도문에 대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해석을 세계에 제시하면 더욱 좋겠다.
결: 다시, 기도의 세계를 실현하다.
어느새 새벽을 깨워 아침 햇살이 스민다. 창밖의 어둑한 기운은 가시고 밝아졌다. 몇 시간 전, 설익은 잠을 깨워 나를 책상 앞에 앉혔던 그 을씨년스러운 적막은 이제 명료한 사유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다시금 책상 한쪽에 놓인 『우리 하늘 아버지』를 바라본다.
이 책 『우리 하늘 아버지』는 저자가 선언한 ‘비학술적 태도’와 달리 실제로는 ‘학술적 서술’의 형태를 유지한다. 따라서 끝내 자신의 ‘신앙적 선언’으로 회귀했음을 증명한다는 비평이 불가피하다. 주기도문이 지녔던 세밀하고도 치열한 세계 윤리는 ‘관계’라는 이름의 내면화로 환원됨으로써, 오히려 저자가 주장하는 강력한 논증이 폭발력을 잃고 희미해지는 것 같다. 특히 저자가 희망했던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과 거리가 생겨 아쉽다. 하지만 이는 단지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적 글쓰기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서술 문화에 잇대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온 우주를 포괄하는 하나님을 깊이 사유할 줄 아는 기독교 지성이 시민 사회의 인문학적 독자들에게—그들이 스스로 책을 선택하고 그 책과 호흡하기 위해서—다가갈 수 있는 ‘거룩한 빚’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서술에서 보이는 문체의 수사적 충돌이 학술적이고 논쟁적인 주장들을 통해 인문학적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저자가 지속해서 자신의 논의가 학술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인문학적 논증과 대응할 수 있는 주제들을 이어간다. 그 결과 이 책은 한편으로는 주기도문이 가진 인문학적 가치-인생 향유(까르페 디엠), 자기 용서, 정의와 공의 등-를 탐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여 사회학적, 인문학적 사유로 확장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에둘러 그 길을 스스로 꺾어 주기도문의 외연을 기독교 안으로 국한된 개인 영성의 덕목으로 축소시키는 묵상 에세이라는 자기 검증의 태도를 고수하려 애쓴다는 것도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이 책의 서술 방식을 통해 앞으로 더욱 천착해야 할 기독교적 글쓰기도 명료해졌다. 예수의 말은 개인의 영성을 곧 ‘사회적 정황(Sitz im Leben)과 연동한다. 마침내 ’사회적 영성‘으로 나아가야 할 당위성이 항상 배어 있다.
나는 이 점을 철학하는 글쓰기에 천착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저자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거룩의 빚’은 대사회적 선언일 때 의미 있다.
그렇지 않고, 주기도문의 선언이 개인과 개인, 하나님과 한 사람의 개별 관계의 언어로 텍스트를 내면화할 때, 어쩌면 주기도문이 드러내는 ‘거룩의 빛’은 초점이 희미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틈새에 로마의 경제적 압제에 신음하던 민중들의 정치적, 사회적 ‘짐’이 있고, 그 짐이 마치 부채를 탕감하듯, ‘죄’를 용서받듯 가벼워지기를 기대하는 예수의 절규를 들었다. 저자가 ‘하늘 아버지’라는 관계 속으로 자기 사유를 확장해 나갈 때, 나는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외치며 이 땅의 불의한 질서를 거부했던 예수의 저항적 어조에 몸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나의 이 글은 이 탁월한 책에 대한 논증적 서평만을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수사적 충돌에 주목하여 나 자신에게 글쓰기의 새로운 과제를 각성시키기 위한 자기 성찰적 시도였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성찰 에세이’라고 말한 것은 곧 독자의 고백을 대신해 준 것 같다.
어쨌든 이번에 다시 읽은 주기도문은 기도가 골방의 독백이 아니라 광장의 삶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주조음이라는 것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책상 위에 멈춘 사유를 넘어 더 넓은 하나님의 세계, 삶의 현장으로 나아갈 용기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양식과, ‘오늘’ 우리가 탕감해야 할 관계의 빚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서적들이 흔히 범하는 ‘신앙으로의 급격한 환원’이 독자에게 그저 안도감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사유를 품고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기독교인에게 세계는 배려와 환대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하나님의 터전이다. 기독교적 글쓰기가 알게 모르게 인문학적 가치와 신앙적 확신 사이에서 쭈뼛쭈뼛 진자 운동을 멈추지 못하는 일은 극복되어야 한다. 수사적 충돌을 방임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 점이 오늘날 기독교 지성이 우리 세계 안에서 직면해야 하는 정직한 자기 초상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을 때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음번에 내 책상 위에 놓일 책은 그 진자 운동의 진폭을 기독교인이라는 성벽 내부를 넘어 이름 모를 일반 독자들의 삶 한복판에까지 가닿는 역동성으로 확장했으면 한다.
요컨대, 나는 이상환의 책이 분명 기독교 서적이 이 세계 속으로 진일보하는 교두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주기도문 해석을 통해 나의 오래된 관습을 다시 갱신한다. 주기도문은 ‘읽고 해석하는 대상’이거나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실천하라는 것에 그치지도 않는다는 점도 상기한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 뜻을 현현하기 위해 ‘오시는’ 일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환대의 노래이며 환대의 방식이다. 그 노래를 통해 1세기 어느 해, 산 위에서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어조로 ‘기도를 가르치는 예수’의 숨결을 상상하는 것은 과장된 태도가 아니다. 이제 나는 이 책을 발판 삼아, 내 방식으로 재각성한 주기도문의 삶을 나의 세계에 펼쳐야겠다.
주기도문을 통째로 온몸에 새기면서 예수의 눈빛과 손짓, 말투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무한히 반복해 암송하고, 다시 상상한다. 이 책의 시도했던 치열한 고민을 딛고서 저 너머로 나아가본다. 오늘 다시 예수가 가르쳐주신 기도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 때까지 ‘도석’을 멈추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