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모스를 향한
나의 <작은 철학시 88수>

검은 안식의 시학에 근거하여

by 푸른킴

계절의 비켜섬

바람은 여즉 차갑다. 겨울은 느리게 물러가고 봄은 서두르지 않는다. 입춘, 우수, 경칩 절기가 모두 지났지만, 봄은 아직 느긋하다. 뒷짐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겨울은 그 틈에 있던 이삿짐을 서두르지 않는다. 어느 해나 계절은 서로를 매몰차게 내몰지 않는다. 끌멍밀멍 줄다리기 같이 시간을 함께 즐기다 어느 새벽이 오기 전 조용히 이별한다. 겨울과 봄이 자리를 바꾸는 사이, 꽃망울이 그 틈을 비집는다. 계절이 오가는 그 사이 꽃들이 기지개를 켜고 따스한 바람이 살갑게 다가와 손 닿을 자리를 휘감는다.


작은 철학시. 짧은 형식과 존재의 심연이 만나는 자리

작년부터 시작된 나의 새로운 연구 주제는 ‘검은 안식의 철학’이다. 올해도 이 생각을 좀 더 이어가는 중이다. 검은 안식이란 광야가 곧 안식의 자리이고, 고통이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안식하는 삶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넘어 고진고래(苦津苦來) 자체로 안식의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것이 ‘철학’이라면, 그것은 자체로 삶의 사유하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된다는 것을 함의한다.(신학은 철학을 가볍게 여길 때가 많지만, 인간이 뻗어갈 수 있는 사유의 한계는 결국 ‘철학’ 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철학’을 ‘시학’으로 길을 달리 해 본다면 ‘시(詩)’야말로 말로 이뤄진(言) 철학의 집(寺)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검은 안식의 시학은 곧 ‘시철학’ 또는 ‘철학시’를 추구하는 철학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이러한 시철학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 시 역사를 뒤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형식 면에서 짧은 문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의 변형이며, 내용 면에서 세계의 불확정적 질서에 대해 미시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자기’(自己)를 중심에 두며 세계를 사유하는 현상학과 인식론을 반영한 철학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시들은 단시의 외형을 취하면서도 내 몸이 이 세계 속에서 직접 겪는 찰나의 이미지와 음향,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통과하여 존재와 시간, 상실과 생성, 고요와 회복의 문제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결국, 나의 단시의 핵심은 곧 내가 이 세계와 관계된 사유를 나를 집중하면서 나를 성찰한다는 보편적인 형이상학을 구체화한 문학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이다.


검은 안식의 시학

‘검은 안식’은 어둠과 휴식의 기계적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과 피로, 균열과 종말감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사유의 평형 상태를 찾아가는 사유의 역동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나의 단시 「안식 한 잔」은 검은 안식의 시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단시라 할 수 있다.


검은 호수 빚은 커피 한 모금
깊고 푸른 따뜻한 풍미―
검푸른 안식, 찰랑


모두 스물여덟 자로 구성한 이 단시에서 나는 내 앞에 놓인 드립 커피 한 잔을 ‘안식’의 형상으로 그려내려 했다. 호수를 표현한 ‘검다’는 안식의 깊이를 상징한다. ‘검은색’은 단순히 부정이나 어둠, 심지어 공허함이나 허무의 색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끝없이 이어지는 사유의 넓이를 표현한다. 또한 ‘안식’은 쉼이나 멈춤이 아니다. 정지가 아니라 오히려 멈춘 듯 전진하는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움직임 없는 것의 움직임’의 상태다. 고요한 역동이다. 이른바 역동에 관한 ‘미학적 무의식’이다. 단순히 물러남이 아니다. 미미하게 출렁이는 내면의 리듬을 따라 물러남과 나아감을 반복하는 전진이다.


나는 이것을 드립 커피 한 잔을 받아 든 어느 날 아침에 우연히 발견했다. 손에 잡히는 커피 잔 속에 검은 호수의 물결 같은 흔들림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파동처럼 움직였다. 그 틈에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했다. ‘검음’은 세계의 폭력이라는 검은 힘을 사유하도록 이끌었고, 동시에 그 속에서 숨죽이며 자기 고요함을 잃지 않는 어둠의 땅 위에 무권력으로 살아내는 미물을 상상하게 이끌었다. 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순간, 커피의 맛도 맛이지만, 마시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세계의 토대를 버텨내는 작은 힘들이 내 몸으로 밀려 들어와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그 파고는 지극히 작은 물결처럼 내 몸 안에서 가볍게 “찰랑”일뿐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거대한 파도를 경험했다. 사실 ‘찰랑’이라 쓴 뒤에 ‘출렁’이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나의 단시에서 의태어는 하이쿠와 같은 단시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계어(季語) 같다. 시의 중추 역할을 한다.


나는 이런 부사어를 계절을 묘사하는 것에만 국한하지 않기에 ‘의어(意語)’라 바꿔 부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시의 의미, 즉 주제를 함축한 용어, 전문 용어(technical term)이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도 ‘찰랑’은 이 시 전체의 동기어(leitwort)이자 검은 안식의 시학에 기반한 이 시의 주제를 견인하는 중요한 ‘미학적 무의식’을 기표한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물이나 이미지 속에 감춰진 '사고하지 않는 것의 사고'이며,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감각을 촉발하는 언어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찰랑’은 ‘고요함’이 완전한 부동(不動)이 아니라, 여전히 운동을 품은 잠재적 멈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어로 충분히 기능한다. 이 부사어로 인해 안식은 행동하지 않는 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한한 떨림을 간직한 미동의 침묵이 된다. 이 침묵은 언제나 포효로 변할 수 있다.


이처럼 검은 안식의 시학을 반영한 이 단시가 추구하는 미적 감각은 뚜렷하다. 검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세계에 대해 미시적 ‘나’의 실존적 가치를 일깨우려는 것이다. 이 검은 안식의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잘 갖춰진 사유를 매끈하게 완성해 내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수 없는 균열과 파열을 감내하며 여진에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쓸려갈 수 있다. 그러나 ‘찰랑’이라는 표현은 그 흔들림이 또 다른 전진의 동력이라는 것을 실감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안식 한 잔」이라는 단시는 이 거대한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앞 뒤로 물결을 따라 흔들리면서 전진하는 역동적 존재인가를 스스로 되묻는 철학의 문학화이다.


창조 세계에서 ‘나’라는 미시적 존재의 가치

나의 단시는 ‘나’라는 존재를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세계로 이끌어오는 작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철학시 「창조」 “고요한 하늘 쩌억, 연못 속으로 풍덩, 빛 보라!”라는 구절은 이런 존재 의의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여기서 창조는 조화로운 출발이 아니라, 찢김과 낙하, 충돌과 개방을 통해 발생하는 생멸의 사건이다. 빛은 어둠의 반대편에 이미 놓인 것이 아니다. 파열의 한가운데 함께 자리하고 있다. 창조 사건은 생성의 조건으로서 부정성과 어둠을 받아들이며, 존재를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열리고 흔들리는 과정을 감수한다.


이러한 시적 관찰은 ‘창조’ 사건에서 여전히 희망이 절망을 선도한다는 것까지 나아간다. 희망은 추상적 관념이나 교훈적 표어에 그치지 않는다. 밤과 종말, 낙하와 상실을 통과한 이후에야 겨우 출현하는, 미세한 살아남이다. 예를 들어 「종말희망」에 그런 사유를 담았다.

잠눈 열려 파란 하늘 이불 걷어내니
후두둑 꽃잎 떨어져-,
아, 심긴 나의 씨앗이여!

꽃잎의 낙하는 끝이다. 동시에 씨앗의 태어남이다. 종말은 소멸의 완성이 아니라 다른 시작의 문턱으로 전환된다. 이런 점에서 내가 바라본 희망은 낙관주의와 다르다. 그것은 무엇보다 어둠을 극복이나 제거의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부정하지 않는다. 상실을 억지로 극복해야 할 감정으로 몰아가지도 않는다. 절망을 생략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부정성과 상실의 감각 속에서 생성의 가능성을 길어 올린다.


‘자연’은 자연스러운 존재론적 사유의 도구

나의 단시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 이미지가 단순한 서정적 배경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유의 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비, 하늘, 꽃, 낙엽, 빗방울, 겨울비, 동백, 단풍 같은 자연물들은 감상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시간과 존재의 구조를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예를 들어 「내린 시간」에서 그 점을 잘 볼 수 있다.

하루 종일 긋지 않는 늙은 빗방울
늦은 밤 검푸른 땅바닥
튕겨 오르며 아침 회상, 파르르

마지막 의태어 ‘파르르’는 이 시의 모든 정서를 빨아들인다. 또한, 늦은 밤과 검푸른 땅바닥은 침잠과 쇠잔의 이미지로 읽히지만, 시는 그 바닥에서 다시 “튕겨 오르며” 희망찬 아침을 그려낸다. 이 단시에서 자연은 정적인 풍경이 아니다. 튀어 오르는 시간의 역동성과 생의 지속을 내장한 생명의 장(場)이다. ‘땅바닥’으로 상징된 자연은 어둠의 공간으로서 소멸의 장소인 동시에 기억과 회복을 생성하는 토포스가 된다.


철학시의 인문학적 사유를 견인하는 부사어

앞서 말한 대로 나의 철학시에서 ‘부사어’의 기능은 중요하다. 이를 토대로 철학시의 형식이 완성된다. 동시에 시의 길이가 짧다 해도 선명한 이미지와 뚜렷한 음향을 만들어낸다. 의성어와 의태어로 표현하는 부사어는 시정(詩情)의 압축이다. 그 압축 속에 더 넓은 사유의 파장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쩌억”, “풍덩”, “파르르”, “찰랑”, “사북사북”, “타닥타닥”, “다독다독” 같은 소리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의미 이전의 감각을 보존하는 핵심 시어다. 특히, 「겨울나기」에서 이런 정서가 잘 살아난다.


촉, 촉촉― 촉촉촉, 시나브로
쌔근쌔근 숨소리 쓰윽 쓱, 탁탁
어둔 거리 나무의 어깨, 다독다독, 겨울비


이 철학시는 어느 겨울비가 내리는 날의 풍경을 담았다. 사물과 자연이 내 몸에 닿는 촉감을 살려보고, 그것을 느끼는 나의 정서가 상호 교환되는 순간을 그려냈다. 이로써 이 철학시는 거대한 자연과 나라는 미물이 한 자리에서 만나 서로를 마주 보며 살아 있게 하는 동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담았다.


이처럼 나의 철학시에서 부사어로 표현된 사물의 몸짓과 소리는 시의 배경 효과가 아니다. 존재를 실감각하는 방식이다. 모든 개념은 소리와 떨림이 이끌어온다. 감각이 먼저 오고, 사유는 그 뒤를 따른다. 이 때문에 나의 철학시는 철학적이되 관념적이지 않다. 사유는 굳어진 명제형식으로 제시되기보다, 감각과 이미지 속에 흩어져 있다 함께 어우러져 서서히 떠오른다. 예를 들어 「모순의 시대」를 보자.

책 쏟을수록 불 꺼지는 세계―
그 어둠 아장아장 내딛는 지성,
호모 레겐스여!”

나는 이 철학시에 인문적 감각을 최대한 담으려 했다. 여기서 지성은 세계를 완전히 해명하는 지적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점점 더 어두워지는 세계 속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 연약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 힘의 장점은 지속한다는 것이다. 쉽게 멈추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시에 담은 인문학적 사유란 정답의 체계적 제시, 선언을 넘어 불확실한 현실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지식의 현실 참여 태도다.


단시의 문학관-카오스모스

나의 철학시는 철학적 문학관을 드러난다. 「문학 모테트-글숲세계」가 이를 집약한다.


문학은 글의 숲,

그대 품는 언어로 살고 지는 우주,

카오스모스!”


이 철학시는 나의 시 전체가 구성된 원리를 집약한다. 문학은 정돈된 질서도, 무질서한 혼돈도 아니다. 그것은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동시에 호흡하는 장이며,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생성과 소멸이 서로를 지우지 못한 채 공존하는 세계다. ‘검은 안식의 철학’이 일어난 헤테로토토스이다. 카오스모스라 할 수 있다. 이는 어둠이 곧바로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고, 따뜻함이 곧바로 낙관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 혼돈과 정돈이라는 극단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흔들리는 긴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나의 철학시가 유지하는 윤리적 감각이다. 이 시들은 자아의 폐쇄적 내면에 갇히기보다, 타자와 만물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사유한다. 예를 들어 「공생」의 경우가 그렇다.


아침의 눈물인가, 저녁 이슬
지친 풀잎 로 하롱 하롱

낙하하는 땀방울 씨앗 공생


이 철학시는 생의 고단함과 생성의 가능성을 하나의 장면 안에 겹쳐 놓는다. 무엇보다 ‘위’라는 글자를 행바꿈을 통해 아래에 배치했다. 이로써 ‘위로’는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는 방향을 묘사했고, 동시에 삶에서 끌어올려야 할 ‘위로(慰勞)’의 버거움을 상징했다. 이처럼 이 시집에서 공생-공존, 공감을 포함하여-은 이상적 구호가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상처와 피로를 지닌 채 함께 버티며 자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상보성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나의 철학시에서 그려내는 삶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유기적 결합이다. 안식은 ‘흔들리는 혼돈’인 세계와 예측불가한 타자의 움직임이라는 변수 아래에서도 몸의 질서, 샬롬을 보존하는 내적 시공간이다.


짧음의 미학-여백의 허용

나의 철학시는 나름 일관된 미학도 보여 준다. 우선 짧은 형식은 시어의 부족함이 아니다. 여백의 윤리를 상징한다. 많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오래 울리게 하고, 설명을 줄임으로써 독자가 직접 그 심연을 듣게 한다. 과유불급, ‘Less is More.’라는 건축학의 잠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많은 작품이 마지막 행 또는 마지막 음절에서 의미의 방향을 살짝 틀거나 깊이를 더하는 짧은 문구로 끝난다. 이 종결의 기술은 내가 특히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어느 사이, 사아악 바다세계!(단시17)”, “내 마음 파아악!(단시19)”, “세계 다독이는 오늘, 툭툭(단시27)” 같은 표현들은 시를 닫는 종결어이지만, 오히려 시의 끝을 열어버리는 열린 종결(opened End)로 작동한다. 의미가 완결되는 대신, 감각의 여운이 독자의 내면으로 계속 번져 나가게 한 것이다.


나름 문학적 성취

나의 철학시 여든여덟 편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 나는 다음 몇 가지를 정리해 둔다. 첫째,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존재론적·인문학적 사유를 수행한다는 점. 둘째, 철학시의 형식 안에 감각과 개념, 서정과 철학을 높은 밀도로 공존시킨다는 점. 셋째, 어둠을 부정의 기호가 아니라 깊이와 회복의 조건으로 전유함으로써 독자적인 정조를 형성한다는 점. 넷째, 상실과 종말의 감각을 끝내 희망의 씨앗으로 전환하는 생성의 상상력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이런 성과는 모두 ‘검은 안식의 철학’에 기반한 ‘시학’의 결과다. 여기서 ‘검은 안식’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철학시들이 일관되게 수렴하는 형식이면서 내용이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의 실존적 자리이기도 하다. 나의 철학시는 인간의 궁극적 ‘안식’을 사유한다. 다만, 이 안식은 독보적 밝음만 유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검푸른 심연, 늦은 밤의 바닥, 파열 이후의 침묵, 낙화 이후의 토양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쟁은 예측불가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일어나고, 평안하던 나의 삶은 누군가의 독재적 판단으로 어그러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나와 너, 나와 내 손 닿을 거리에 있는 세계는 질서를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작은 철학시는 어둠을 지워버리려는 문학적 억지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따뜻한 떨림을 ‘함께 듣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짧지만 가볍지 않게, 철학적이되 추상으로 흐르지 않도록, 다정하지만 느끼한 듯 안이한 표현을 경계한다. 이 시편들은, 옛 히브리인의 시편처럼 한 편의 기도가 되면 좋겠다. 오늘날 우리의 시가 어떻게 존재의 심연과 미세한 회복을 동시에 붙들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출발이 되길 바란다. 모든 이들이 시인 아닌 시인의 조용하고도 선명한 무의식의 증거를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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