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식의 심연, 가속의 시대에 피어난 관조의 정원

-나의 사순절 묵상 에세이에 대한 철학적 자기 비평(1)-

by 푸른킴

서론: 성과사회의 소음 속에서 걷는 ‘사순로(四旬路)’

현대 철학자 한병철은 오늘날을 끊임없는 생산과 활동의 강박에 매몰된 ‘성과사회’로 규정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전시되고 가속되어야 하는 ‘긍정성의 독재’ 아래서, 멈춤은 낙오가 되고 고통은 제거해야 할 질병으로 간주된다. 올해 나의 사순절 묵상 기록인 『원시 정원, 에덴을 산책하다』는 이러한 가속화된 일상에 제동을 거는 철학적 저항이자 신학적 성찰의 산물이다.


성과사회는 모든 것을 표면 위로 끌어올려 데이터화하고 수치화한다. 그러나 사순절은 수치 너머로 흐르는 날것의 감각, 꾸며지지 않은 기억, 그리고 생생한 관계에 다시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사순절의 속성은 삶의 표층이 아닌 ‘깊음’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깊음’이란 표층을 뚫고 흐르는 ‘존재의 후면’을 가리키는 나의 용어다.

이 깊음에 이르면 존재의 전면뿐 아니라 후면까지 아우르는 시선이 열린다. 진실은 꽃이 피어나는 화려함보다 꽃이 지는 ‘낙화’의 순간에, 쩌렁쩌렁한 울림보다 세미한 음성 뒤에 남는 ‘잔향(殘響)’ 속에 숨어 있다. 무엇보다 침묵은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고백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관조하는 삶’ 역시 대상의 외면을 훑는 데 머물지 않고 존재의 심층까지 내려가는 행위다. 우리가 사순로를 걸으며 예수가 머물렀던 ‘깊음’의 자리에 동참할 때, 파편화되었던 일상은 비로소 하나의 서사적 무게를 지니게 된다.

디지털 정보 사회는 ‘보이는 것’만을 실재로 믿게 만든다. 하지만 사순절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층위를 주목하게 하며, ‘비가시성(Invisibility)’의 길을 걷는 용기를 일깨운다. 이 용기는 현상 너머를 지탱하는 내적 구조를 가리킨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은 시각에만 의존하는 일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열어 세계를 ‘청취’하는 일에 가깝다.


비가시성은 신비의 영역이자 신뢰의 영역이다. 새벽의 희끄무레한 공기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길을 예비하는 일은, 가시적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을 전제로 한다.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 혹은 『신에 대하여』에서 암시하듯, 성스러운 것은 결코 가시적인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는 물처럼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이다. 우리는 이 비가시적인 실재를 긍정함으로써 눈앞의 상실 너머에 있는 ‘원시 정원’의 평화를 미리 맛볼 수 있다.

내가 제시하는 47일간의 ‘사순로’는 단순한 종교적 절기를 넘어, 한병철이 말하는 ‘무위(無爲)’의 가치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사순절을 ‘피할 수 없는 약속’이자 ‘기쁜 노동’으로 받아들이며, 십자가 위의 예수와 함께 시간을 잊고 머무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응시한다. 이는 소진되어 가는 나 자신에게 찍는 깊은 존재론적 쉼표이자, 자본주의적 가치에 작은 날갯짓으로 저항하는 ‘대항 절기’라는 자기 선언이다.


성과사회가 강요하는 투명한 조명은 영혼을 소진시킨다. 모든 것이 노출되어 그림자를 잃어버린 시대에, 나는 역설적으로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는 ‘검은 안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빛의 기만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자궁 안에서 존재의 뿌리를 다시 내리는 적극적인 멈춤이다.




1. 존재의 심연: 검은 안식과 비가시성의 미학

나의 철학적 토대는 ‘검은 안식(Black Sabbath)’이라는 역설적 개념에 놓여 있다. 전통적인 안식이 밝은 빛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면, 내가 말하는 검은 안식은 죽음과 고통의 어둠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존재론적 숨 고르기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따스한 빛의 이미지로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검은 안식은 존재가 빛의 기만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서 비로소 제 숨을 고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한병철이 비판한 ‘성과사회의 피로’를 넘어서는 하나의 길이다.


새벽과 밤, 그리고 멈춤의 고요는 단순히 시간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가 발생하기 위한 조건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가 겪은 짙은 어둠 또한 절망의 종결이 아니라, 신조차 개입하지 않는 ‘공백’을 견디며 부활의 씨앗을 품는 생명의 안식이었다. 이 검은 안식을 통해 우리는 생산의 강박을 내려놓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과 정직하게 마주하게 된다.

예컨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예수의 절규는 관계의 파기를 선언한 말이라기보다, 개입 없는 공백을 끝내 견디는 수용의 언어로 읽힐 수 있다. 그는 그 절망의 시간을 통과함으로써 부활의 씨앗을 품었다. 이러한 관점은 한병철이 강조한 ‘부정성의 힘’과도 맞닿아 있다. 나 역시 빛이 사라진 새벽과 밤의 비가시성을 통해 실재의 층위를 확장하고자 한다. 시각이 약해진 어둠의 자리에서 세계의 울림을 듣는 ‘청취(聽取)’는 기술적 정보로 치환할 수 없는 신비와 신뢰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처럼 비가시성은 감각을 결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을 다시 벼리는 계기다. 현대인은 시각 중심의 사회에서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도록 길들여져 있으나, 나는 ‘어둠의 감각’을 통해 감각의 재배열을 시도한다. 이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일을 넘어, 세계의 울림과 비가시적인 존재의 기척을 감지하는 행위다. 한병철이 『신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경청하는 존재’는 바로 이 감각의 변환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시각적 화려함에 가려졌던 진리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소음이 가라앉은 새벽의 고요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래 얼굴을 마주한다.


멈춤과 소멸, 그리고 서사의 지속은 ‘시간의 향기’를 되찾는 기술이기도 하다. 성과사회는 시간의 깊이를 메워버리고 그 위를 단편적 정보로 덮어버리지만,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멈춤’과 ‘느림’의 기술에 천착한다. 걷기 중의 멈칫함이나 문장 사이의 여백은 단순한 동작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존재의 여백’이다.


여기서 ‘소멸’은 허무한 끝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절정의 순간을 뜻한다. 이는 코헬렛의 ‘헤벨(Hebel, 수증기, 안개, 이해불가)’ 개념과 연결된다. 안개처럼 부유하는 삶의 잠정성 자체가 곧 신비이기 때문이다. 낙화는 꽃의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떨어짐으로써 꽃은 완성된다. 이와 같이 예수의 죽음은 존재의 해체를 일으키지만, 그 해체는 새로운 결합을 향해 열려 있다. 예수는 이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했다. 사랑은 인간의 삶이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정점이며, 그 정점에서 사라진 존재는 기억 속 잔향으로 남아 우리의 일상을 끝나지 않는 서사로 이어준다.

한병철은 현대인이 사색의 힘을 잃어버린 이유를 ‘멈출 수 있는 능력’의 결여에서 찾는다. 나는 이 멈춤을 단순한 중단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존재의 틈’으로 받아들인다. 사순로를 걷다 문득 멈칫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관성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신비의 문턱을 넘는다. 여기에 느림이 더해진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되찾으려는 존재의 투쟁이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사회는 시간의 깊이를 지워버리지만, 느린 시선과 청취는 박탈당한 시간의 주권을 회복시킨다. 예수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간 무거운 걸음은 효율성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존재의 무게를 회복하는 시간의 형식이었다.

결국 나의 묵상은 스스로에게 ‘시간을 낭비할 용기’를 제안한다. 멈추고, 느려지며, 소멸하는 것들을 깊이 응시하는 행위는 성과사회의 눈에는 무익한 낭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틈으로 헤벨의 신비가 스며들고, 사라진 줄 알았던 진리의 잔향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때 나는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향기를 향유하는 관조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마침내 ‘원시 정원’의 지속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2. 관계의 얽힘: 타자의 고통에서 피어난 공동체적 윤리

한병철이 타자와의 관계가 소멸한 시대를 ‘지옥’이라 불렀듯, 나의 묵상은 존재가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적 존재론’이 사라지는 시대를 경계한다. 관계는 스쳐 지나가는 접촉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얽히는 구조다. 그것은 서로의 삶과 죽음이 상대의 형식에 깊숙이 개입하여 함께 공명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를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라는 개념과 연결해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 자체가 ‘서로-안에-거함’, 곧 상호 내주의 형식이라면, 인간의 공동체 역시 그러한 존재론적 리듬을 닮아야 한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는 여인들과 강도의 기억 속에 얽힌 예수의 모습은, 각박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자를 내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타인의 눈물과 갈증이 나의 것이 되는 순간, 우리는 비겁한 구경꾼의 자리에서 벗어나 ‘낮은 자리로의 부흥’을 실천하는 공동체적 주체로 거듭난다.


얽힘은 신비다. 타자의 고통이 나와 얽혀 새로운 ‘관계의 정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성과사회 속의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내가 천착하는 존재론은 ‘홀로 있음’이 아니라 ‘함께 있음’이다. 나에게 존재란 타자와의 얽힘 속에서만 비로소 형색을 드러내는 역동적 사건이다. 이 얽힘은 무분별한 뒤섞임이 아니다. 서로의 삶과 죽음이 서로의 형식 안으로 스며들어 함께 울리는 구조다.


나의 사순절 에세이가 주목하듯, 십자가 위의 예수는 홀로 죽어가지 않았다. 그는 곁에 있는 강도와 아래에서 우는 여인들, 그리고 그를 버린 제자들의 기억 속에 얽혀 있다. 이러한 관계적 시학은 사순로 걷기를 개인적 수양에 가두지 않고 타자와의 ‘동행’으로 확장한다. 이런 점에서 나의 관계론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의 존재 안에 거하며 춤추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 내주)’와도 연동된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한 원형이다.


한편, 한병철이 말하는 관조적 삶이 도달하는 자리 역시 ‘나’라는 틀을 깨고 타자와 하나 되는 지점을 향한다. 여기서 타자는 타인만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 전체를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검은 안식’조차 고립된 어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서로의 고통 안에 머무는 관계적 공간으로 다시 정의될 수 있다. 이 ‘서로-안에-거함’의 신학은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타자를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윤리적 요청을 던진다.


그렇기에 타자의 음성을 듣는 일은 고통의 연대를 통한 감각의 확장을 의미한다. 나의 에세이가 도달하는 한 정점은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타자의 얼굴과 고통이 나의 존재를 규정하고 책임지게 만드는 사건과 통한다. 에세이 속 조문의 장면이나 걷기 중에 만나는 타인의 기척은 감각을 더 정교하게 재구성한다. 타인의 눈물과 갈증이 나의 것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원시 정원’의 친밀함을 회복한다.

예수의 “목마르다”라는 외침은 한 개인의 생리적 갈증을 넘어 세상 모든 타자의 고통을 대변하는 음성으로 들린다. 이 음성을 청취하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안락에 머물 수 없다. 그는 타자의 고통 곁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관조는 윤리로, 묵상은 동행으로 번져간다.

결국 검은 안식에서 출발하여 시간의 소멸을 견디고 감각의 재배열을 거쳐 도달한 곳은 ‘관계의 얽힘’이 가득한 정원이다. 나의 묵상은 끊임없이 묻는다. 나의 걷기는 타자의 발소리를 포함하고 있는가. 나의 고요는 타자의 울음을 품고 있는가. 한병철이 꿈꾼 ‘관조하는 삶’과 내가 사유하는 ‘사순로의 묵상’은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한다. 그것은 성과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타자와 신비롭게 결합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십자가의 잔향 속에, 타자의 숨결 속에, 그리고 원시 정원의 흙냄새 속에 얽혀 있는 한, 나는 부활의 아침을 향해 함께 걸어갈 용기를 얻는다.


이러한 타자와의 얽힘은 머릿속 관념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계적 존재론의 신비는 순례자의 걸음을 통해 비로소 대지 위에 구현된다. 사순로 위에서 내딛는 한 걸음은 내 존재의 무게를 타자의 고통과 겹쳐보는 행위이며, 발바닥에 닿는 흙의 질감은 멀리 있는 신의 음성을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번역하는 도석(道釋)의 과정이다.


3. 어둠이 잉태한 빛: 검은 안식의 존재론과 부활의 시학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밝게 조명하고 가시화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검은 안식 존재론’은 존재가 빛의 소란 속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역설 위에 서 있다. 이는 한병철이 말한 ‘비가시적인 것의 힘’과도 궤를 같이한다. 빛은 우리를 외부의 성과에 집중하게 만들지만, 어둠은 우리를 내면의 기억과 관계, 그리고 신비로운 연결망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검은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의 뿌리가 신의 심연과 맞닿는 근원적 상태다.

나는 이를 ‘어둠의 창조성(Dark Creativity)’이라 부른다. 어둠은 파괴나 종말의 이름이 아니라, 생명이 태동하기 직전의 자궁과 같은 잠재성의 공간이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어둠과 밤의 고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움트기 위한 토양이다.

한병철이 『신에 대하여』에서 성스러운 것이 거리 두기와 어둠 속에서 보존된다고 말했듯, 나는 십자가의 칠흑 같은 어둠을 새로운 창조의 조건으로 읽는다.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는 거대한 창조적 에너지가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밤은 끝이 아니다. 밤은 가장 찬란한 새벽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비극적 사건을 넘어 하나의 ‘사건의 이미지(Event-Image)’로 떠오른다. 내가 이 표현을 택한 이유는, 십자가가 죽음이라는 사건의 잔혹성만이 아니라 그 사건이 품은 형식의 정점을 함께 드러내기 때문이다. 낙화가 꽃의 소멸인 동시에 그 형상의 절정이듯, 십자가 역시 죽음의 심연 속에서 가장 응축된 의미를 드러내는 이미지가 된다.


여기서 ‘부활의 시학’이 탄생한다. 부활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소멸과 상실을 통과한 존재가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재구성되는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재구성이 슬픔을 지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활의 시학은 상처를 삭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실의 흔적을 간직한 채 더 깊은 사랑의 형식으로 일어선다. 사라진 것들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지속된다. 이름 없는 소행성의 궤적처럼, 혹은 기도시의 간절한 호흡처럼, 그것들은 우리 삶 속에 영원한 현재로 남는다.


결국 나의 묵상 에세이 『원시 정원, 에덴을 산책하다』는 십자가라는 잔혹한 현실에서 ‘검은 안식’이라는 역설적 희망을 길어 올리는 작업이다. 한병철이 꿈꾸었던 ‘관조하는 삶’과 내가 제시한 ‘사순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과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타자 및 신과 신비롭게 결합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곳이야말로 다시 태어날 정원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여정은 끝날 수 있어도, 검은 안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생명의 감각은 우리를 오래도록 산책자로 남긴다.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시학을 써 내려가는 존재들이다.

4. 신학적 완성: 혼돈에서 피어난 부활의 시학

이제 나는 히브리적 사유를 통해 앞선 논의를 신학적으로 더 또렷이 정리하고자 한다. 앞 장이 어둠의 이미지와 부활의 시학을 존재론적으로 조망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이 어떤 시간 이해와 창조 이해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려 한다. 그 핵심은 ‘혼돈 잔존적 창조론(Creation and persistence of Chaos)’이다.

창조는 매끈한 질서의 도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둠과 혼돈이라는 잠재성의 바다에서 태동한다. 예수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단순한 종결의 문장이 아니라, 태초의 창조 때 남겨진 혼돈을 통과하여 마침내 안식을 완성하는 사건으로 읽힌다. 여기서 부활은 죽음을 굴복시키는 마술이 아니라, 소멸과 상실을 통과한 존재가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재생성되는 사건이다. 그것은 장례식을 찾은 조문객의 따뜻한 손길처럼, 사라진 뒤에도 남아 삶을 지탱하는 ‘생의 잔존’이다.

이 텍스트의 뿌리는 히브리적 사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병철이 『신에 대하여』에서 현대 사회의 ‘성스러운 것의 소멸’을 경고했다면, 나는 히브리 시학의 핵심 개념들을 통해 그 성스러움이 일상의 어둠과 혼돈 속에서 어떻게 다시 움트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예언자적 사건성, 코헬렛적 관찰, 그리고 잔존의 시학이다.

첫째, ‘예언자적 사건성’은 일상의 지루한 연속성을 깨뜨리고 갑작스럽게 개입하는 신의 언어를 가리킨다. 한병철이 말한 ‘사건의 생성’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나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논리가 멈춘 불연속의 자리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심판이자 희망의 사건이다. 그것은 설명 가능한 과정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을 가르는 섬광 같은 개입이다.


둘째, ‘코헬렛적 관찰’은 삶의 무상함과 반복을 느린 시선으로 응시하는 지혜다. 이것은 빠름의 폭력에 저항하는 ‘느린 철학’이다. 예언자적 사건이 섬광처럼 삶의 표층을 찢어놓는다면, 코헬렛적 관찰은 긴 호흡으로 일상과 노동, 감정을 감각화한다. 사순절의 순례자는 바로 이 두 시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한편으로는 돌연한 사건에 흔들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느린 관찰 속에서 삶의 결을 배운다.

셋째, 나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에 주목한다. 전통적 창조론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강조해 왔다면, 여기서 어둠과 혼돈은 제거되어야 할 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잠재성의 원천으로 읽힌다. 한병철이 긍정성의 과잉에 맞서 부정성의 힘을 강조했듯, 나는 십자가의 어둠을 부활의 전제 조건으로 이해한다. 창조는 질서 정연한 설계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텅 비고 혼돈스러운 ‘검은 안식’의 심연에서 태동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고통과 방황의 시간은 무의미한 소모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산고의 시간일 수 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개념이 ‘잔존(Remnant)’이다. 잔존은 소멸 이후에 남겨진 미래의 가능성을 뜻한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자리, 십자가의 처참한 실패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작은 씨앗이다. 그것은 새 창조를 향한 불씨이며, 사건 이후에도 남아 있는 생명의 후발생적 힘이다.

한병철이 『관조하는 삶』에서 ‘지속되는 것’의 소중함을 말했듯, 잔존은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래 남는 생명의 형식이다. 조문객의 따뜻한 눈물, 새벽의 가냘픈 빛, 묵상 후에 남은 고요한 잔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은 씨앗들은 비록 미약해 보일지라도, 성과사회의 거대한 메커니즘이 결코 파괴할 수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따라서 나의 묵상 에세이는 한병철이 우려했던 ‘서사가 거세된 시대’에, 가장 오래된 히브리적 서사에 기대어 다시 한번 서사가 살아나는 길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순절은 이 서사의 생멸을 목격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 길 위에서 멈추고, 느려지며, 타자와 얽히고, 어둠 속에서 청취하는 법을 배운다. 십자가 위에서 들려온 일곱 말씀은 단순히 기록된 문장을 넘어 몸과 감각에 잔향으로 남는다. 그 잔향을 따라 걷는 동안 일상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매 순간 ‘원시 정원’을 거니는 거룩한 산책이 된다.

결론: 몸으로 쓰는 기도 — 감각의 재배열과 고요의 울림

나의 사순절 에세이는 순례자의 걷기다. 걷기는 발바닥으로 세계의 표면을 읽어내는 행위이자 사유의 지도다.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도석(道釋)’이다. 한병철은 걷는 행위가 효율성을 따지는 노동과 달리, 목적지보다 과정의 머무름을 긍정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사순로를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호흡과 리듬, 보폭을 통해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는 감각은 관념 속에 갇혀 있던 신앙을 대지로 끌어내리고, 걷는 자의 몸 자체를 하나의 살아 있는 텍스트로 바꿔놓는다. 걷기의 리듬은 결국 고요로 귀결된다. 그러나 고요는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피상성을 걷어내고, 존재의 근원적 음향이 가장 또렷하게 들리는 충만한 상태다.

한병철은 고요야말로 영혼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기대어 본다면, 십자가 위의 예수가 남긴 침묵과 그 침묵을 묵상하는 독자의 고요는 세계의 소란 속에서 잃어버렸던 ‘나’와 ‘너’, 그리고 ‘신’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이처럼 고요는 시적 감각의 정점이자 삶의 모든 잔향이 모여드는 저수지다.

결국 나의 묵상은 ‘감각의 혁명’을 요청한다. 성과사회의 속도에 맞추느라 무뎌졌던 감각을 걷기와 청취, 고요를 통해 다시 벼리는 과정이다. 이 여정을 마친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멈춤 속에서 움직이는 신비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검은 안식’에서 시작된 여정은 ‘소멸’과 ‘잔향’을 지나 마침내 ‘고요’라는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시 정원’의 풍경이며, 가속의 시대를 살아내는 내가 끝내 붙들어야 할 관조적 삶의 태도다. 부활은 상처 없는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흔적을 서사의 무늬로 간직한 채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피어나는 재구성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소멸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향기가 가장 짙게 남는, 잔향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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