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글쓰기(註釋)의
'공공적 번역' 가능성

by 푸른킴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복있는 사람, 2017. 1448쪽.-


“이 글은 ‘공공적 번역’에 대한 작은 사유다.
오늘날 자동화된 데이터의 가속을 조용히 저항하고,
느릿하게 문장의 여백을 되살려,
고대 경전의 숨결을 현대의 언어에 불어넣어
세계 속의 고통과 연대하도록 돕는다.”



1. 서론: 정보의 지배와 서사의 위기-AI 시대의 신학적 글쓰기

오늘날 종교적 글쓰기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정보의 지배’와 그로 인한 ‘서사의 위기’에 있다. 한병철의 지적처럼 디지털 정보는 즉각적이고 파편적이며 가시적이지만, 삶을 오래 관통하며 의미를 빚어내는 서사의 힘은 점차 쇠퇴하고 있다.[전대호 역, 『정보의 지배-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서울: 김영사, 2023); 전병호 역, 『서사의 위기』 (서울: 다산초당, 2023)] AI 역시 방대한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재조합해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내지만, 그 문장 안에는 고통을 견디며 진리를 길어 올리는 인간의 서사, 곧 현대적 서기관이 감당해야 할 ‘서사적 사유의 시간’이 부재한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함축과 은유의 상징인 시를 즐기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시마저도 종종 말끔한 거울 같은 이미지에 머물거나 난해한 언어의 밀도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경전을 주석하는 글쓰기 역시 여전히 자기 내부의 언어 주위를 맴도는 듯하다. 간단히 말해, ‘공공적 번역’의 과업으로 나아가기보다 종교 정보의 소비나 개인 묵상, 혹은 대중적 인문학의 외피를 두른 채 충분히 읽히지 않는 학술적 주장에 머무르기 쉽다. AI의 도움을 받아 교정한 듯한 문장이 논리적으로 정교할 수는 있어도, 독자의 삶을 근본에서 흔드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는 쉽지 않다는 비판은 그래서 설득력을 지닌다. 더욱이 정보의 과잉은,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듯, 오히려 의미의 빈곤을 초래한다. 쏟아지는 책과 글들 사이에서 텍스트의 심연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여유는 이제 언감생심이 되어 간다.


나의 글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종교적 글쓰기의 위기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더 나아가 이 위기 속에서 신학적 글쓰기가 나아갈 길을 조심스럽게 탐색해 보려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구약성서학자 김회권의 글쓰기에 주목한다. 그의 글쓰기 안에서, 오늘의 이 곤란한 상황을 통과할 하나의 해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고대 텍스트를 현대적 언어로 다시 직조한 하나의 문학(紋學), 곧 ‘공공적 번역물’이라 부를 만하다. 더 나아가 그의 글쓰기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가 말한 ‘철학시(Philosophy as Poetry)’에 근접하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그의 글이 천착하는 수사학적 전략을 고찰하는 일은, 오늘날 신학적 글쓰기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 갈 하나의 단서를 찾는 작업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그의 주저인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을 단순한 신학 해설서가 아니라, 현대어로 재서술된 하나의 ‘공공적 번역’으로 읽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이 보여 주는 수사학과 문체의 특징을 따라가며, 그것이 향후 더욱 정치한 ‘철학시’의 형식으로 나아갈 가능성까지 가늠해 보고자 한다.


2. 주석, 화석화된 언어를 깨우는 문학적 수행

일반적으로 종교적 글쓰기의 주요 작업인 경전 주석은 고착된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고고학적 작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주석은 단순히 박제된 고어(古語)의 결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정교하게 다듬어 전시하는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대의 언어에 담긴 삶의 자리를 오늘의 실존으로 끌어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가교를 놓는 치열한 번역의 과정이다. 고대의 한 단어는 오랜 세월 의미가 퇴적된 층위를 품고 있기에, 오늘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더 이상 단어 하나로는 감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장이 되고, 때로는 하나의 단락이 되며, 끝내 하나의 세계로까지 열려 간다.


특히 종교 텍스트는 오랫동안 제도와 교리의 울타리를 넘어 독자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삶의 언어로 다시 육화 되어 왔다. 따라서 그 번역의 과정은 더욱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해석학적 전제가 불가피한 공공적 번역을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문체와 논증, 수사와 공공성의 차원을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공공적 번역에서 사유는 언제나 문장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장 안에서 형성되고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적 번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언어의 수행(修行)이다. 김회권의 글쓰기 역시 사유의 외피가 아니라, 사유가 살아 움직이며 독자를 텍스트 앞으로 초대하는 형식으로 읽힌다.




3. 공공적 번역의 사상적 토대

3.1. 리처드 로티와 ‘번역된 세계’

주석의 공공성을 논할 때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재기술(redescription)’ 개념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로티에게 진리는 어딘가에 고정된 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통해 다시 말해질 때 비로소 새롭게 열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석가는 텍스트의 의미를 수동적으로 전달하는 해설자가 아니라, 고대와 현대라는 두 세계를 잇는 능동적인 번역가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김회권의 글쓰기는 재기술의 실천에 가깝다. 그는 성경의 고대 서사를 전통 교리의 닫힌 문법 속에 가두지 않고,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와 바빌론 포로기의 고통을 오늘의 한국 사회가 겪는 정치·경제적 현실과 과감히 접속시킨다. 그렇게 옛 단어와 문장은 그의 문장 안에서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쓰인다.


예를 들어 김회권은 “모세오경은 압축파일이다”라고 선언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 신학의 틀 안에서 정의와 공의, 자비라는 성서 본문의 어휘를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연결하고, 예언자의 외침을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적 윤리로 치환한다. 이와 같은 재기술을 통해 그의 글쓰기는 단순한 종교 해설을 넘어 공공적 번역의 형식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독자는 더 이상 고대 텍스트를 박물관의 유물처럼 관람하지 않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며 우리 삶을 향해 발화하는 공적 언어로 만나게 된다.


3.2. 폴 리쾨르의 전유(Appropriation)—텍스트의 세계와 자기 이해

공공적 번역의 두 번째 사상적 전제는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말한 ‘전유’이다. 전유란 텍스트가 열어 보이는 가능한 세계를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자기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다. 텍스트 앞에 선 독자는 단순히 의미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그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 안으로 따라 들어가며, 그 세계를 통과하는 동안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조금씩 변형된다. 그 길이 어두운 계곡을 닮았든, 빛이 스미는 광야를 닮았든, 전유는 결국 독자를 이전과 다른 자기 이해로 이끈다.


김회권의 글쓰기는 이러한 전유의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그의 문장은 독자를 텍스트 뒤에 숨은 저자의 의도를 추적하는 자리로만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가 지시하는 새로운 존재 방식 앞에 독자를 세우고, 그 앞에 머물며 참여하도록 이끈다. 이처럼 김회권의 글쓰기는 독자가 그 텍스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자극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을 읽는 독자가 단지 이스라엘의 과거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늘 자신의 안일함과 무감각을 돌아보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김회권의 글쓰기를 떠받치는 중심 논지는 바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것은 하나의 교리를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독자 앞에 대항적이고 대조적이며 대안적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상상력의 형식이다. 그의 모세오경 주석은 이러한 논지를 강화하면서 익숙하고 자동화된 독자의 내면을 흔들어 깨우고, 독자로 하여금 공공의 선을 향해 응답하는 새로운 주체로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김회권의 글쓰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전유가 일어나는 사건의 계기를 마련하는 문장들의 수사학이자 공공적 번역이라 할 수 있다.


4. 신학적 글쓰기의 변화: 엘렌 데이비스(Ellen F. Davis)—시적 상상력과 주석적 정직성

오늘날 신학적 글쓰기는 공공적 번역으로 나아가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 준다. 엘렌 데이비스(Ellen F. Davis) 역시 ‘성경적 상상력(Biblical Imagination)’이라는 이름 아래, 고대 텍스트를 오늘의 삶으로 끌어온다.[노종문 역, 『히브리 성서를 열다—정경ㆍ신학ㆍ문학ㆍ역사로 읽는 구약성서』 (서울: 복있는 사람, 2025)] 그의 책에서 데이비스는 성경 해석이 문자주의나 역사비평, 혹은 고착된 공시적 독해의 습관 속에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 대신 텍스트가 지닌 시적이고 은유적인 본성을 회복시키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데이비스에게 신학적 글쓰기는 텍스트 속의 확정된 사실을 정리하여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창세기 설명에서 ‘느리게 읽어야 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강조한다. 아무리 느리게 읽어도 다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뉘앙스마저 풍긴다. 그의 말은 결국 창세기의 언어를 천천히, 느릿하게 읽어야 한다는 요청으로 들린다. 그래야만 그 언어 속에 담긴 정서와 사건의 깊이, 그리고 인간 경험의 울림이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글쓰기에는 독자에게 느린 읽기를 수련하게 하는 장치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글쓰기에 근거해 그를 ‘느릿한 관찰자’라 부르고 싶다.


데이비스의 이러한 서술은 김회권이 보여주는 공공적 번역의 수사학과도 그 결을 공유한다. 두 사람 모두 성경의 언어를 현대 사회의 상처와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문제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해석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텍스트의 의미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고, 그 언어가 오늘의 삶을 다시 쓰게 하는 실천의 장이 되도록 이끈다. 차이라면, 김회권이 모세오경의 율법과 제의 속에서 자비의 경제와 공의의 윤리를 길어 올린다면, 데이비스는 구약의 시적 언어 속에서 생태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의 감각을 발견한다.


이처럼 두 학자에게 신학적 글쓰기는 텍스트를 설명하는 작업을 넘어, 그 언어를 오늘의 삶으로 번역하고 그 안의 진리를 시처럼 들리게 하여 독자의 행동을 일깨우려는 공공적 번역이다. 고착된 옛 텍스트는 이 과정을 통해 현재의 공적인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런 점에서 공공적 번역은 데이비스의 말처럼 하나의 예술(art)이다.


5. 공공적 번역의 문학적 장르—철학시(Philosophy as Poetry), 시적 산문(Poetic prose)

그렇다면 공공적 번역은 어떤 장르로 구현될 수 있는가. 이 글쓰기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해설적 산문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리처드 로티가 말한 ‘철학시(Philosophy as Poetry)’에 가까운 문학적 형식을 요구한다.[박병기·김은미 역, 『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 (서울: 씨아이알, 2023)] 로티에게 철학시는 고정된 개념의 언어가 삶의 자리로 내려오기 위해 빌려오는 문학 형식이며, 그 형식이 바로 시(詩)다. 일반적으로 시는 여백과 은유의 장르다. 그 안에서 의미는 단일하게 고정되지 않는다. 해석의 여백이 살아 있고, 때로는 하나의 문장이 독자의 삶을 조용히 흔들며 오래된 세계의 질서를 낯설게 해체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종교적 글쓰기, 특히 신학에 기반한 주석이 공공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고대 텍스트가 과거의 삶에 깊이 묶여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옮겨오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낯선 언어를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매끈해진 언어를 다시 낯설게 하여, 그 안에 스며 있는 고통과 삶의 결을 오늘의 언어 속에서 새롭게 드러내는 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공공적 번역은 마치 시를 쓰는 일과도 닮아 있다. 공공적 번역이 철학시라는 형식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은유와 리듬을 통해 독자의 감각을 재구성하고, 텍스트를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적 글쓰기는 고대 텍스트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해설이 아니라, 현대적 은유를 통해 독자의 실존을 흔들고 새로운 삶의 문턱으로 이끄는 작업에 가깝다. 김회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거대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의 ‘압축파일’에 담아 둔 것처럼 작동한다. 낯선 세계의 의미를 응축한 채 독자의 삶 속에서 해제되기를 기다리며, 해제되는 순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공공적 번역이 철학시로 나아가야 한다는 요청은 바로 이러한 문학적 사건성을 가리킨다.


6. 수사학적 전략: 치환, 확장, 그리고 심화

김회권의 글쓰기에서 두드러지는 수사학적 전략은 세 가지다. 곧 치환, 확장, 심화라는 세 층위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전략은 그의 글이 지닌 공공적 호소력의 강도를 형성한다.


첫째, 치환이다. 이는 성경의 고어(古語)를 현대의 문장과 은유로 다시 옮겨 놓는 작업이다. 김회권은 성경적 개념을 설명할 때 ‘압축파일’과 같은 현대 사회의 어휘를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이것은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고대 서사가 품고 있는 의미의 총체를 오늘의 독자가 즉각적으로 감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번역의 전략이다. 다시 말해, 치환은 고대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현대인의 인지 구조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둘째, 확장이다. 이는 텍스트의 지평을 신앙 공동체 내부에 머무는 언어에서 공공의 세계로 넓혀 가는 작업이다. 그의 글에서 ‘우리’라는 주어는 종종 텍스트를 읽는 신앙 공동체를 넘어 오늘의 시민 전체를 가리킨다. 예컨대 출애굽의 해방 서사는 특정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넘어, 자유와 인권을 향한 보편적 열망의 언어로 다시 읽힌다. 이 과정을 통해 고대의 텍스트는 더 이상 닫힌 공동체의 자산이 아니라, 공공의 사유를 자극하는 언어가 된다.


셋째, 심화이다. 이는 텍스트의 지혜가 독자의 실존 안으로 내려앉도록 하는 전략이다. 김회권은 성경의 인물들을 무대 위의 배우처럼 멀리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그 서사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뇌와 불안, 유혹을 자기 몸의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이끈다. 이때 공공적 번역은 단지 뜻을 이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가 텍스트 앞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해석하도록 만든다. 리쾨르가 말한 전유의 과정 역시 이러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독자의 체험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 김회권의 수사학은 옛 텍스트를 오늘의 언어로 바꾸고, 그 의미를 공공의 삶으로 넓히며, 마침내 그것이 독자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게 한다. 치환, 확장, 심화는 단순한 표현 기법이 아니라, 공공적 번역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7. 문체의 힘: ‘낯설게 하기’와 공동체적 호명

김회권의 글쓰기는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문체는 의미를 쉽게 전달하기보다, 독자가 텍스트 앞에 더 오래 머물도록 만든다. 그의 문장에는 예언자적 상상력, 낯설게 하기, 서사적 자아의 호명, 그리고 묵시적 현재의 감각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낯설게 하기’다. 이는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가 말한 것처럼, 자동화된 인식을 깨뜨려 사물을 다시 보게 만드는 문학적 장치다. 익숙함은 대상을 이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더 이상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게 만든다. 낯설게 하기는 바로 그 인습된 감각의 껍질을 벗겨 내는 일이다.


김회권의 문체에는 이 기법이 두드러진다. 그는 성경의 익숙한 단어들을 관습적으로 반복하지 않고, 고대 텍스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현대적 어휘와 예기치 않은 조합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멈춰 세운다. 이처럼 그의 문체는 독자가 습관처럼 지나치던 의미를 다시 체감하도록 만드는 해석의 도구가 된다. 나아가 그의 문장은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의미를 지연시키고, 독자가 그 앞에서 한 번 더 머물게 한다. 바로 그 머묾 속에서 텍스트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현재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된다.


이처럼 낯설게 하기는 단지 미학적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문장을 통해 독자를 호명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독자는 텍스트를 바깥에서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문장이 부르는 세계에 응답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익숙해진 신앙 언어가 낯설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독자는 자신이 너무 쉽게 믿고, 너무 빨리 이해하고, 너무 무감각하게 지나쳐 온 삶의 자리와 다시 대면한다. 이때 문체는 독자를 수동적 독자에서 응답해야 하는 윤리적 주체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마침내 글쓰기는 하나의 연대의 마당이 된다.


특히 김회권의 문장에는 고대 텍스트에는 없었을 법하지만 현대인의 감각에는 강하게 꽂히는 어휘들도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기묘한 방식으로 20년 체불 임금을 일시불로 받은 야곱은 매우 번창하여…”(『모세오경』, 314)와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이러한 어휘 선택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인습적 독서를 중단시키고 독자를 낯선 세계의 문턱 앞에 다시 세우기 위한 전략이다. 따라서 그의 문체적 실천은 단순한 표현상의 특징이 아니라, 공공적 번역이 독자의 감각과 윤리를 동시에 흔드는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8. 공공적 번역의 복합: “모세오경은 압축파일이다”

김회권의 주석에서 가장 인상적인 수사학적 장치 가운데 하나는, 모세오경을 압축파일로 규정한 것이다. 성경의 고대 사건을 현대 정보 공학의 언어로 명명한 것이다. 이 비유는 단순히 낯설고 기발한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공공적 번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문학적 모델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한 단어 안에는 앞서 살펴본 치환, 확장, 심화의 세 층위가 동시에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먼저 치환의 차원에서, 그는 출애굽 사건과 모세오경 전체를 멀고 낡은 종교적 기록으로 두지 않고, ‘압축파일’이라는 동시대의 기술 언어로 다시 불러낸다. 이 치환은 단순한 흥미 유발이 아니다. 압축파일이라는 말은 많은 내용이 작은 형식 안에 응축되어 있으며, 그것이 해제될 때 비로소 그 안의 구조와 에너지가 드러난다는 감각을 즉각 불러온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는 독자로 하여금 모세오경을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의미의 응집체로 인식하게 만든다. 고대의 서사는 여기서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오늘도 다시 열리고 해제될 수 있는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된다.


이 비유는 곧바로 확장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압축파일이 해제될 때 드러나는 것은 단지 한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적 정보가 아니다. 김회권의 해석에서 그 안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환대, 제국적 질서에 대한 저항, 공의와 자비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다. 다시 말해, 모세오경은 교회 안에서만 작동하는 폐쇄적 데이터가 아니라, 오늘의 정치·경제·윤리적 현실을 다시 읽게 하는 공공의 운영체제로 번역된다. 이 지점에서 고대 텍스트는 특정 신앙의 전유물이라는 자리를 벗어나, 공론장에서 함께 사고하고 논쟁할 수 있는 공공의 언어가 된다.


마지막으로 심화의 차원에서, 압축파일이라는 은유는 독자의 실존 안으로 파고든다. 압축파일은 바깥에 저장되어 있을 때는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열리고 실행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김회권의 문장도 이와 같다. 모세오경의 이야기는 독자의 삶 안에서 해제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 순간 독자는 단지 성경의 사건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안일함과 무감각을 해체당하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실천할 가능성 앞에 선 새로운 주체가 된다. 리쾨르가 말한 ‘텍스트 앞에서의 자기 이해’는 이처럼 압축파일의 해제라는 현대적 비유를 통해 독자의 실존적 결단으로 심화된다.


결국 “모세오경은 압축파일이다”라는 말은 하나의 기발한 문장 이상이다. 그것은 고대 정경의 권위를 박제된 성물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오늘의 삶과 정치, 경제가 맞부딪히는 현실의 무대 위에 다시 세우는 번역의 기호다. 이 비유가 강한 이유는 설명을 줄이면서도 의미를 더 많이 열어 놓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압축파일’은 김회권의 공공적 번역이 지닌 문학성과 공공성, 그리고 실존적 호소력을 가장 응축된 형태로 보여주는 핵심 은유라 할 수 있다.


9. 성찰: 공공적 번역의 가능성과 한계

이처럼 김회권의 신학적 글쓰기는 공공적 번역의 한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신학을 교회 내부의 전유물에 머물게 하지 않고, 공론장에서 사회적 정의와 인간 존엄을 말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빚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의 글은 신앙적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독자에게조차, 최소한 윤리적 상상력과 공공적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응답할 수 있는 여지를 연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글쓰기는 종교 텍스트가 섬처럼 동떨어지고 파편화된 현대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연대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성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성취가 큰 만큼, 그 안에 잠복한 한계 역시 더욱 엄밀하게 성찰될 필요가 있다. 공공적 번역은 본질적으로 고대의 텍스트를 오늘의 언어로 끌어오는 작업이지만, 그 과정에서 현재의 문제의식이 텍스트의 복수적 층위를 지나치게 평탄화할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번역이 성공할수록 텍스트가 오늘의 언어에 지나치게 잘 봉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텍스트가 지닌 이질성, 불편함, 시대적 거리감, 심지어 오늘의 감각으로는 쉽게 수용되지 않는 잔여가 사라질 때, 공공적 번역은 해석이 아니라 현재적 욕망의 투사로 변질될 수 있다. 특히 성경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축적된 텍스트의 경우, 역사적 맥락과 종교적 고유성이 충분한 긴장 속에 보존되지 않으면 그 낯섦은 보편성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쉽게 소거될 수 있다.


또한 김회권의 글쓰기처럼 수사적 밀도와 문체적 흡인력이 강한 경우, 독자는 텍스트 자체와 대면하기보다 해석자의 문장을 먼저 신뢰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단지 문체의 힘이 크다는 찬사가 아니라, 해석의 권력이 문체를 통해 은밀하게 강화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은 독자를 설득할 뿐 아니라 압도하기도 한다. 그 결과 독자는 텍스트와의 씨름을 스스로 감당하기보다, 이미 충분히 가공된 의미를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다. 공공적 번역이 독자를 텍스트 앞으로 데려가는 대신, 오히려 번역자의 문장 앞에 머물게 만들 위험이 여기서 발생한다.


더 나아가 공공성의 확보 자체가 때로는 또 다른 축소를 낳을 수도 있다. 공론장에서 통용되기 위해 신학의 언어를 보편 윤리나 시민적 감수성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그 번역이 반복될수록 텍스트가 끝내 붙들고 있는 초월성, 종말론적 긴장, 신학 특유의 불가해성과 현대인에게는 적실하지만 여전히 낯선 사건들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는 순간, 아무도 끝까지 불편해하지 않는 언어가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공공적 번역은 공론장에 진입하는 대가로 텍스트가 지닌 급진성과 타자성을 스스로 희석하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


이와 함께 경계해야 할 것은, 오늘의 정치·경제적 의제를 성경의 언어와 직접 접속시키는 방식이 때로는 지나치게 신속한 등치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접속은 공공적 번역의 핵심 동력이지만, 성급한 현재화는 텍스트의 복합성을 줄이고 해석의 방향을 단선화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텍스트는 독자를 낯선 진실 앞에 세우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 확정된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 자료처럼 사용될 위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공공적 번역이 살아 있으려면, 텍스트를 오늘의 현실에 연결하는 용기만큼이나 그 연결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늦추는 절제 역시 필요하다.


결국 공공적 번역은 텍스트의 뿌리와 오늘의 언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의 긴장을 끝내 해소하지 않은 채 견댜 내는 일에 가깝다. 번역은 다리를 놓는 일이지만, 그 다리가 두 세계를 완전히 하나로 봉합하는 순간 오히려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공적 번역의 성패는 얼마나 잘 옮겨 왔는가에만 있지 않고, 얼마나 끝내 옮겨지지 않는 나머지를 남겨 두었는가에도 달려 있다. 바로 그 잔여와 긴장을 보존할 때에만, 공공적 번역은 단순한 현대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해석으로 남을 수 있다.


10. 검은 안식의 길을 걸어가는 공공의 번역가

결론적으로, 종교적 글쓰기, 특히 신학적 주석이라는 행위는 텍스트의 의미를 독점하거나 보존하는 성벽을 쌓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성벽을 허물고, 의미의 물줄기가 세상이라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하는 ‘길을 내는 작업’이다. 김회권의 글쓰기는 신학적 텍스트가 어떻게 자기만의 방언에서 벗어나 공통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하여 주석이라는 글쓰기가 텍스트의 성벽을 쌓는 수호자의 업무가 아니라, 그 성벽을 허물고 고대의 생명력을 공론장이라는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번역가의 소명임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김회권의 신학적 글쓰기, 곧 공공적 번역의 실천은 성경의 고어를 현대의 ‘압축파일’로 치환하여 독자의 삶 속에 전유시킴으로써, 신학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언을 버리고 공공의 언어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의 문장은 세상의 소란한 중심에서 예언자적 기개로 공공성을 외치는 치열한 투쟁의 장(場)인 동시에, 그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서 ‘검은 안식’의 심연을 품고 있다. 결국 진정한 주석가는 텍스트의 깊은 뿌리에서 길어 올린 침묵의 언어를 오늘의 고통과 연대하는 희망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자다. 이제 신학적 글쓰기는 정교한 이론의 상아탑을 내려와, 문장의 여백마다 시대의 아픔을 녹여 내고 다시금 안식의 자리를 마련하는 시적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번역가는 자기 앞에 놓인 텍스트를 끝내 다 옮겨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옮겨지지 않는 나머지, 끝내 남는 낯섦과 침묵 앞에서 오래 머문다. 바로 그 머묾 속에서 문장은 다시 숨을 얻고, 독자는 자기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뜻밖의 빛을 만난다. 그러므로 오늘 신학적 글쓰기, 곧 공공적 번역이 향해야 할 곳은 분명하다. 고급 이론이 정교하게 적용된 높은 ‘해석의 상아탑’만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이 고여 있는 ‘번역의 평지’, 씨가 뿌려지는 낮은 자리다. 그 자리에서 문장은 단지 주장하지 않고 의미의 결핍을 견딘다. 또한 그 빈자리를 억지로 설명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며, 그에 상응하는 언어로 공감한다. 풀어 헤치기 전에 매여 있는 의미 그대로, 텍스트와 함께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에필로그

우리는 오래된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문장의 말을 듣는다. 옛 돌판에 새겨졌던 말은 종이를 넘어 상처 가득한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나를 다독인다. 번역이란 뜻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숨결이 흐르는 물길을 따라 잃어버린 위로의 자리로 다시 나를 이끄는 일인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해져 더는 보이지 않던 샘의 표지를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촌철 앞에서, 나는 안다. 이해란 멀리서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장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한 줄의 문장을 들여놓는 순례라는 것을.


공공의 언어란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글쓰기가 우연히 만난 단어들로 닫힌 마음들 사이에 조용히 연대의 길을 내고, 정의를 품은 씨앗이 싹트도록 돋우는 사랑이기를 바란다.


검은 안식의 뿌리, 나는 비로소 그것을 문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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