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여섯 번째 주 첫 번째 묵상
*이 글은 기독교 절기인 사순절을 보내는 개인적/공동체의 묵상을 옮긴 것입니다. 특히 이번 주간은 소위 '고난주간'이어서 부활주일까지 틈나는 대로 저의 묵상글을 연재해보려 합니다. 불편함 없이 읽히기를 바랍니다."
끝은 곧 시작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멈춤의 끝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해 안식으로 들어서는 시작의 문입니다.
<어떤 이의 일기>
1
대조절기 여섯째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며, 고난주간을 여는 날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이 한 주를 붙들고 걷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은 분, 그리고 다시 살아나기까지의 시간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믿음의 일정표 위에 올려두는 절기입니다.
오늘 나는 십자가 위에서 쏟아냈던 말 중 여섯 번째, “다 이루었다”를 생각합니다. 먼저 번역의 결을 조금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한 음절을 “빠짐없이 모든 것”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예수께서 이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해내셨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런 이해를 억지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를 붙잡고만 있으면, 오히려 이 말의 가장 결정적인 진동을 놓치게 됩니다.
이 말은 무엇보다 “이제 끝입니다”라는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왔습니다.” “마침내 완성했습니다.” “결국 끝났습니다. 도달했습니다.”라는 의미의 결이 선명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다 해냈다”라는 말은 살아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의 끝에 닿았다는 고백입니다. 동시에 그 말속에는, 아직 남아 있는 어떤 일이 있음을 은밀히 드러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일이 끝났다면, 이제는 죽음이라는 시간 안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여섯 번째 말은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는 “살아 있는 동안”이며, 다른 하나는 그 생이 끝에 이르는 순간, 곧 “완성에 닿는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죽음 이후의 일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며 오늘 이 말 앞에서 세 가지를 기억하려 합니다.
2
첫째, “다 이루었다”는 창조 완성을 위한 불가피한, 영원한 안식을 의미합니다. 나는 이 말의 뿌리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글, 창세기 1–3장에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말의 배경에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계에 질서가 세워지고, 마침내 인간이 창조되며, 그리고 끝내 안식으로 마감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있습니다. 무질서했던 세계는 하나씩 자리를 잡습니다. 물론 혼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서도 창조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창조입니다. 빛이 드러난 후, 흙가루 속에서 마침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때까지 “보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 대해서는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 창조로 엿새에 걸친 세계 질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일을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보기에” 좋았다는 말속에는 아직 남아 있는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엿새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엿새는 마치 숨을 고르는 지점처럼 잠시 멈춘 것뿐입니다. 진짜 끝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완성”이라기보다 “멈춤”이라고 옮겨두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신호등의 붉은빛이 선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멈춤이야말로 창조의 완성입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남아 있던 창조의 완성, 곧 안식에 마침내 도달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날 잠시 멈추었던 창조 사건이, 예수의 삶을 통과하며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할 과제는, 그 창조를 끝까지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삶을 멈추는 일입니다.
안식은 잠정적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이 창조 행위의 완성입니다. 창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야 합니다. 죽음이 가벼울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던져진 이 여섯 번째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게 맡기신 일을 이제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부탁하는 듯합니다. 언젠가 누군가 이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을 되돌아볼 때, “다 이루었다”는 말이 창조 세계 속 마지막 남은 혼돈을 끝까지 통과해 낸 유일한 사건임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활과 구원은 죽음이 없이는 결코 가볍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곧 삶의 부활이라는 것도 내가 지나온 역사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소환할 수 있습니다.
3
둘째, “다 이루었다”는 죽어가는 과정을 거쳐 살아있음을 말합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내가 일을 마쳤습니다”라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말은 과거형이면서 현재형입니다. “마쳤다”면서도, 동시에 “마쳐지고 있다”는 결을 품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이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 미래보다 과거가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이 말은 인간의 말 치고는 단지 과거 회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회고가 진행형입니다. 언어의 현재형은 아직 진행 중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상태는 완결만이 아닙니다. 완결과 미완결이 겹쳐진 상태입니다.
죽음을 이해하기 어렵듯, 이 말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분명 죽음 직전에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삶을 마감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도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음 너머의 어떤 일을 예견하는 말입니다. 야훼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마지막 문장”으로 두지 않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현실을 몸으로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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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다 이루었다”는 죽음 속에 ‘살아 있는’ 빛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다 이루었다”는 “완성되고 있습니다”라는 시간과 사건의 움직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예수께서 죽음마저도 자신의 사명의 한 축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지를 표현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는 지금 ‘무엇을’ 완성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수단으로 삼아 대의(大義)를 완수하는 영웅의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는 죽음 그 자체를 완성합니다. 나는 그 단서를 찾으려 애썼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빛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불행한 빛’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빛으로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빛 스스로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이때에도 어둠은 쉽게 자리를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렵게도 예수는 어둠 아래 들어가 아예 어둠을 품어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픈 빛입니다. 땅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 모든 행동은 어둠 속을 거니는 일이었습니다. 병든 자들, 죽음에 직면한 자들, 압제 속에 눌린 자들 가운데 머무셨던 것은, 어둠이 지배하는 땅 어딘가에 빛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는 먼 길을 걸어 십자가의 죽음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합니다.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허공에 던집니다. 어둠이 이긴 것도 아닙니다. 빛은 어둠 속에 남아 살아 있음을 천명합니다. 예수는 “어둠과 함께” 빛으로 살아 있습니다. 역설입니다. 그리고 그 역설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진입하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심화 됩니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죽음 너머를 말합니다. 어둠은 빛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둠을 단숨에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 어둠을 품어줄 때, 어둠은 죽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드러낼 뿐, 생존할 수 있습니다. 어둠은 스스로 살아있는 듯 하지만, 미량의 빛만으로도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것은, 이 어둠의 세계에 태초의 빛이 끝내 남아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는 완결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끝을 통과하여 다시 죽음을 생명으로 시작하려는 우주의 순리를 일깨우는 슬로건입니다.
5
우리 시대, 죽음 못지않은 아픈 이들이 있습니다. 짙은 어둠으로만 가득 찬 전쟁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병들고 아프고, 두렵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제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옵니다. “죽음이 오면 어떡하나”라는 불안의 절망과 “그래도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을 거야”라는 안도의 희망입니다.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말은 하나의 말이 뒤섞인 것입니다. 둘 다 두렵고 불안한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두려움과 병의 완성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죽음 너머를 보여줍니다. 죽음은 ‘죽음 수용’으로만 극복됩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고백처럼 들립니다. “나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려 한다. 곧 죽음의 끝에 다다를 것이다.” 이것은 결단이며 위로입니다.
인간에게서 한치도 떨어진 적 없는 죽음을 묵상하게 만드는 가장 유일한 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불시에 올 때도 있고, 느긋하게 기다려주면서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죽음의 방문은 불행입니다. 하지만, 신앙에 근거한다면 행복일 수 있습니다.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는 미래적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은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너머가 보인다”는 묵시적 현재를 목격한다는 것입니다.
아픈 이를 위한 기도, 죽음의 위협에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는 당연히 “병 낫기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걸음 더 들어가 기도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기도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아물 일어나지 않는 듯이 살아가는 나도 그들처럼 “삶의 끝에 죽음이 와 있다”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그 죽음 앞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할 수 있다면, “죽음 너머 삶이 있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가장 연약한 자가 선택하는 마지막 동아줄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는 스스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 강함이 권력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약함이 강함이라는 역설은 비단 신앙의 어설픈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성찰이며, 나와너, 나와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이해입니다. 나는 이것이 예수께서 남기신 “다 이루었다”의 한 뜻이라고 “믿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끝은 닫힘이 아닙니다.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가장 깊은 어둠의 문입니다.
1. 나는 “다 이루었다”를 주로 “해낼 일을 다 해냈다”로만 이해하면서 그 말속에 전제된 ‘죽음 이후의 시간’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내 삶의 혼돈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나는 그 혼돈을 ‘끝내기 위한 안식’으로 지금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3.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어떤 것이며, 그 두려움 속에서 “끝은 곧 시작”이라는 믿음을 붙들기 위해 오늘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나의 기도
어둠에 거하는 주님,
죽어가면서 남긴
“다 이루었다”는 말 앞에 내 숨이 멈춥니다.
내가 이해하는 ‘끝’은 늘 닫힌 문 같고,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늘 캄캄한 벽 같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그 한마디가,
끝을 끝으로 두지 않으셨음을 내게 들려줍니다.
어둠을 품은 주님,
내가 ‘다’라는 말을 붙들며 성급히 정리하려 했던 마음을 거두겠습니다.
빠짐없이 해냈다는 계산이 아니라,
마침내 도달했다는 깊은 고백을 듣겠습니다.
안식의 문 앞에서 멈춘 그 순간이,
창조의 마지막 완성으로 가는 길임을 믿겠습니다.
어떤 이의 사악한 판단으로 전쟁의 감옥에 갇힌 이들,
느닷없이 아픈 이들의 시간 속에서도 이 말씀을 잃지 않겠습니다.
두려움과 병이 죽음을 가리킬 때,
죽음이 끝이라고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믿음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따라
죽음 너머의 삶을 한번 바라보도록 힘쓰겠습니다.
빛으로 어둠에 거하는 주님,
끝이 시작이 되는 길을 내 안에서도 열어 보겠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빛을 놓치 않아보겠습니다.
어둠을 품고도 사라지지 않는 그 빛이,
내 삶의 마지막에도 살아 있도록
이 전쟁 가득한 세계에서,
오늘 내 마음을
안식으로 이끌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