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르게 적힌 희망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바람이 분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언제 들어도 마음에 드는 가사입니다.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뭔가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여종 로데가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 가끔 부르는 것을 들을 때면, 노래가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에서 이름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지만, 데오빌로는 그의 시종들에게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늘 목격했습니다. 남을 섬기는 일만 하면서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아트리움 한편에서 장미꽃을 조심스럽게 다듬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데오빌로는 이름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귀족의 명예를 추락시킨다는 손가락질이 있었지만, 데오빌로는 자기 소유에 대한 권리를 강조하며 일축했습니다. 시종들도 데오빌로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그것의 ‘명예를 존중한다.’라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에 주인 데오빌로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이름이 불릴 대 비로소 그것의 가치는 살아납니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대부분의 주인들은 시종에게만 그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버리고 살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오빌로는 이런 행태에 조용히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모두에게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섬김이 빛나는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주고 싶은 데오빌로의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름을 부여받은 그 날 밤, 집을 떠난 시종이 있었습니다. 그날 바로 자유인 행세로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야반도주는 하룻밤 춘몽으로 끝났습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데오빌로는 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자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후회되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면, 그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희망에 아주 조금만 공감해주었어도 충분했을 것을.’ 결국, 데오빌로는 서로에게 몸을 기울여주는 희망이 어쩔 수 없이 다르게 적힌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경중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희망을 쟁취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자보다는 희망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희망이란, 수렁에 빠진 자에게는 기적일 수 있지만, 건져질 수 있는 자에게는 일상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데오빌로는 그 시종의 도주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디스마스나 여종 로데는 자기 이름을 갖고나서 더욱 최선을 다해 자기 자리를 잘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가진 여종이라는 특권을 자신과 친구들을 위한 도구로만 쓰고 있습니다. 대견하고 고마운 친구입니다.


노래를 듣고, 바람을 좀 쐬었더니 온몸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다시 편지로 눈을 돌렸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어색하고 난감했을 제자들의 심정이 아주 많이 이해되었습니다. 시대를 거스르는 선생을 뒤따라다니며 이유없이 삼켰을 모든 고생에 조금 공감되기도 했습니다. 도데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 이름의 무게를 그들이 받아들여야만 했다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다음 구절로 눈을 옮겼습니다. 그때 곧바로 본문이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 L이 말한 것이 이런 것인가? 그렇다면 읽지 말고 들어보자.’ 낯선 경험입니다. 어색했지만 한번 그대로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보다도 예수의 어투에 뭔가 가락이 얹혀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난감한 상황인데 선생 예수의 말에서 곡조가 느껴진 것입니다.

“여전히 힘들었구나. 나의 느닷없는 죽음, 아니 운명이었지만 날벼락 같은 상황,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다. 어쩌면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십자가 앞에서 등을 돌린 것, 이해한다. 나라도 그럴 텐데 뭐. 나 몰라라 옷을 내던지고 도망하던 것, 그럴 수 있다. 죽음은 희망의 블랙홀이라는 것, 누구나 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다시 나타났으니, 기적이라 여길 것이다. 희망은 죽지 않는다는 것, 아니 희망의 불씨를 끝내 간직했던 이가 나타났다는 것, 그것은 나의 옛 희망의 부활이라고 여길 수 있다. 너희가 ‘때와 기한’을 묻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더 그 희망을 희망으로 되돌려 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한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그것이 더는 불행의 블랙홀은 아니라는 것 말이다.

요즘도 널리 알려진 코헬렛의 지혜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가 말하길,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때와 기한이 있다’라는 말은 아직도 옳다. 그의 말은 절망과 희망이 반복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기도 하지. 그런데 그가 그 말을 할 때, 그 초점은, 하나님의 자유에 있었다. 때와 기한이 있지만, 그때와 기한을 조율하는 것은 우리 권한이 아니라는 거였어. 아예 감춰져 있다는 말이었지. 그러니 사람은 ‘기다리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좋은 때와 나쁠 때가 어느 쪽으로도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지혜라는 것이었지.”


데오빌로는 이 대목에서 제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것보다 자기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아~’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예 해석의 어두운 동굴에 갇힌 듯했습니다. 빛 속에서도 어둠에 빠진 것만 같았습니다. 분명 방금 전 마음의 매듭이 풀리는 것 같았든데 순식간에 다시 더 강한 매듭이 죄여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히면 열리는 법. 데오빌로의 머리 속이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때와 기한’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그 왕국’의 재건은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다는 이 말에 묘하게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선과악은 서로 붙어있는 것인데 그것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신의 자유에 속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한편으로는 아쉽고, 한편으로는 다행이었습니다. 신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긴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은 오히려 명확한 것입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지금이 그때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슬쩍 들으면 여전히 절망이지만, 천천히 들으면 희망의 빛이 조금 스며나오는 것 같습니다. 데오빌로의 한숨은 그 희망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오빌로는 이 절망, 희망보다 더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침묵했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암묵적 동의인가 싶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자들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왕국’ 재건을 재시도한다는 말인데? 아니지, 아니지, 선생 L이 말한 대로라면(1:3) 그건 분명 물리적 나라가 아니니 국가가 될 수는 없지. 물리적인 나라는 없어. 그냥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야. 그렇다면, 제자들은 분명 ‘왕국’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왜 그것을 바로 고쳐주지 않았을까? 이 침묵은 동의일까, 반대일까?’

데오빌로는 가부보다 침묵이 가끔 더 큰 숨의 의도를 말할 때가 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 앞에서 가만히 상상하며 혼잣말로 허공에 대고 말을 던졌습니다.


“이 침묵은 부정이 맞다. 하지만, 달리보면 부정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냥 침묵이다.’ ‘침묵의 대화법.’ 이 말하지 않음이 노리는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만약 때와 기한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일은 왕국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인간에게 이렇게든 저렇게든 열린 주제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아마도 선생 예수는 이걸 역설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성령세례를 기다리는 것일 뿐….”


이렇게 혼잣말을 던지는데 갑자기 말이 끼어들었습니다.


“아 아주 멋진 생각이십니다. 주인님”

로데였습니다. 어제오늘 데오빌로가 온종일 서재에만 있어서 청소를 못 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몇 번이나 노크했다는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멋쩍은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로데는 그 말을 덥석 받았습니다.


“미안할 때 미안하다 하고, 이해를 잘 못 했으면 다시 묻는 것이 귀족의 예법이죠?”


이 말에 데오빌로도 웃었습니다. 솔직히 이 웃음은 데오빌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이 말투가 무례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것은 데오빌로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을 함께 행복하게 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시종 로데보다 데오빌로가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선택권은 결국 데오빌로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순간, 데오빌로의 마음에 빛이 번쩍였습니다. ‘깨달음의 빛’입니다.


‘그래, 선택이 제자들의 몫으로 주어진 거야. 그들에게는 힘겨운 선택이겠지만, 선택한다면 가능하다는 말 일거야. 선택권은 권한이 더 큰 자에게 있는 법이니까. 아니 권한이 적을 때, 권한이 큰 자가 넘겨주면 가능하잖아. 선생 예수는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일 수도…. 아 그래, 성령 세례가 있었잖아?’


성령세례. 이 어색한 용어가 이제는 점점 입에 착 달라 붙습니다. 그것은 비단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한 힘만은 아니라는 것도 데오빌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일깨워주는 무지의 각성을 일으키는 신이었습니다. 능동적 삶 못지않게 주어지는 삶, 즉 수동과 피동의 삶, 그 시종의 길을 가는 것도 인간의 행복한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신 자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혜와 인식, 철학과 사유의 힘을 일깨우는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세례는 결국, 인식의 힘이 어디서 오는가를 일깨우는 신의 역설적 케노시스(비움)인 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비워 자기 피조물을 충만하게 하는 신의 힘 말입니다.


그렇게 처음엔 다르게 적힌 듯했던 희망이 이제는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습니다. 데오빌로는 땅이 하늘에 다가가는 것보다 하늘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더 빠르고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다르게 적힌 희망이 끝내 다르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데오빌로를 감쌌습니다. 신기하게 예수의 다음 말은 막힘없이 곧바로 몸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보면, 성령은 역동하는 힘인 것은 분명하다고 데오빌로는 생각했습니다. 지역과 경계도 더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길을 걷는 이들의 힘찬 발걸음만 보였습니다. 그들의 걸음은 성령의 출발 신호를 따라 당당히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그 신호는 마치 대항해를 시작하는 배의 고동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는 이미 예수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 행진할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이 길을 제자들도 이미 다 걸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땅끝입니다. 증인이라는 말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증인의 할 일은 데오빌로의 관점에서는 ‘첫 편지가 사실이라’는 것만 말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시대가 달라졌으니 방법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아쉽게도 그때는 선생이 직접 움직였지만, 지금은 선생은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증인의 일은 순전히 제자들의 선택과 몫으로만 남았 있을 뿐입니다. 데오빌로는 이 문장 옆에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그때 사실을 지금 현실로 말하기. 아니 증명하기. 이유는? 그것이 나라이니까? 아니 그것이 하늘의 통치이니까.’


데오빌로는 거침없이 내달리는 자기 사고 흐름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그와는 확연히 다른 사유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적응이 안 되었을텐데 아주 자연스럽게 흘렀습니다. 이제 마직막 질문에 이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땅끝은?’

생각보다 난감한 질문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저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땅끝을 자신의 생애에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들어와”

“지금 바로 읽어보시라고 합니다”


디스마스가 전한 것 작은 파피루스 조각이었습니다. 급하게 보냈는지 묶음도 시원찮았습니다.

“L입니다. 제가 보내드린 편지 여덟 번째 구절을 좀 더 풀었습니다. 미리 보내야 했는데 깜박하고 이제야 생각나서 급히 보내드립니다. 이 글 없어도 제 편지를 잘 읽으시겠지만,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같이 읽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큰 어려움 없이 다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덧붙입니다.”

이 쪽지를 받아든 순간, 데오빌로의 눈이 확 떠졌습니다. 쪽지 아래 부분에 ‘땅의 끝’에 대한 부연 설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주) 8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는 ‘땅의 끝까지’로 알려진 <헤오스 에슥사투 테스 게스>이고 다른 하나는 전치사 <헤오스>였습니다.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하는 단어겠지만, 꼭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첫 구문에 관해서 사람들은 그냥 간단히 ‘끝’과 ‘까지’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선생 예수가 이 단어들을 강조하듯 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잠정적으로 하나의 전제를 일단 표기해 두기로 했습니다. ‘끝’이라는 표현을 지리의 경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를 달아두었습니다. 전치사 ‘헤오스’는 ‘엔’과 같이 ‘~의 영역 안에’라는 말일 수 있다고 표기했습니다. 일단 그렇게 써두고 제가 앞의 대화와 관련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뜻이 보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두지 말고, 다만 성령이 임해주었으니(단순과거 능동분사) 너희들은 용기를 갖게 되어 예루살렘,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아주 하찮게 여기는 땅에서(땅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읽으니 뭔가 막연한 것이 명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데오빌로에게 또 다른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찮게 여기는 땅’이 정확하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가 저 먼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땅이란 어디를 말하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혹시 창조주의 의지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선택대로만 살아가는 땅일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는 땅일까? 이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데오빌로는 한가지 잠정적 의미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데오빌로가 사는 이 땅, 여기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저기, 거기’일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 우주 전체가 ‘그 땅’일지 모릅니다. 동시에 자기 집이 곧 그 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 떠도는 저 상상의 나라도 그 땅일 것입니다. 바로 내 눈 앞의 현실의 땅일 수도 있을 겁니다. 놀라운 해설이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증인이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