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나의 얼굴이다ㅡ긴 글에 대한 변호 1

by 푸른킴

* 여기서 (1)‘글’은 ‘글자’들의 조합되어 문장, 또는 완성된 단락이 된 것을 말한다. (2)‘글자’는 기본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말한다. 편의상, 문자(文字)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1.

글 하나로 이 나라가 요동했던 시대가 있었다. 세계가 흔들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글이 내 삶에 밀려들어와 삶을 기분 좋게 헤집은 적은 많다. 쓰는 이가 누구인지 중요하진 않았다. 그를 몰랐어도 좋았다. 그가 어떤 위상에 있어도 상관없기까지 했다. 그 글만으로도 내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준 일은 허다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예수의 삶과 그 사상’이 가장 좋은 예다. 기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그런 글은 하나쯤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글 하나로 자기 삶에 대전환이 일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잘 닦인 글이 아니어도 그런 일은 가능했다. 하긴, 글보다도 글을 마주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그 글을 빛나게 했을 것이다. 삶을 격변시키는 것은 글과 그 글을 읽어내는 독자의 조화였다. 글은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자주 절차탁마(切磋琢磨)를 위한 유용한 도구이자 결말이었었다. 하지만, ‘글’의 시대도 그 운명이 달라졌다. 격변을 거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다. 하나는 누가 썼는지가 중요해졌다. 이제 무명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긴 글이 삶에서 밀려나고 있다. 글은 글자그림이 되었다.


2.

대체로, 글*은 사람이다. 요즘 신문 지면 한편에 칼럼을 쓰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글이 무명으로 세계에 등장하는 일은 사라진 것이다. 글은 그 사람이 되었다. 글모음은 이른바 그의 얼굴책이라 할만하다. 글을 쓰면 곧 책으로 만들어 가져다줄 만큼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만약 공신력 있는 자리에 기명칼럼 하나를 확보한 이들이라면, 그는 이 시대에 필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사회공헌도가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자기 이름 걸고 일정한 시간, 공간에 자기 글을 올려두면 누구든 그 글을 가져다 회자시켜 준다. 어떤 면에서 특권이다.(교회 목사가 매주 20분간 공식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마음을 문자에 담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글 내용 진위는 점차 사람 뒤로 숨어버렸다. 그가 썼다면 자칫 거짓도 좋은 글이다. 내가 아는 그가 남긴 글이기 때문이다. 나의 ‘좋아요’라는 표지는 그의 글을 돋을새김해 주는 의미가 있다. 글을 쓰는 이를 안다는 것은 나의 지명도이기도 하다. 얼굴을 본 적 없어도, 글만으로도 그를 아는 시대다. 글 쓰는 이를 아는 것이 글을 받아들이는 첫걸음이다. 특히 그가 짤로 써먹을 수 있게, 나를 유혹할 정도로 짧게 썼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예전, 고대인들의 명언이 무명으로 남겨진 짤이 많았다면, 지금 명언은 유행어처럼 누가 남긴 글인지를 제시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높인다. 이제 글은 그 사람(얼굴)이다.


3.

또한 글은 그림이다. 생각해 보면, 그림은 한눈에 다 들어오는 짧은 글처럼 보인다. 오래전부터 이런 글은 있어왔다. 아마도 그 시대는 글보다는 말이 더 앞서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한 번에 기억할 수 없었다. 들어도 바로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말을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남겼을지 모른다. 눈으로 보고 뇌와 감각으로 이해하기보다, 귀로 듣고 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말도 그림처럼 해야 했다. 글자가 없는 시대는 기억장치가 희박했었다. 그림은 기억에 좋고, 무엇보다도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잊을만하면 꺼내볼 수 있었다. 그 그림은 누구든 그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어울려있는 모습, 새가 앉아있는 모습을 그려 자기 마음을 표현한 적도 있었다. 이제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소 한 마리, 문 한 짝을, 갈고리를 그려놓았다. 불필요한 것은 지워버리고, 꼭 필요한 표식만 남겼다 그것을 절차탁마하듯 다듬었다. 마침내 첫 그림이 사라지고, 약속된 기호만 남았다. 갈수록 그림은 더 단순해졌다. 마침내 기호가 나타났다. 이제 그림마저도 사라졌다. 글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도 짝대기 몇 개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배열하면서 기호를 만들어냈던 이들도 이런 단순함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점차 그림은 기호인 글로 대체되었다. 기호란 약속이다. 무엇보다 일정한 반경 안에, 서로 맞닿을 수 있는 지경에 사는 사람들끼리 설명할 필요 없이 주고받는 약속이다. 그렇게 처음에 사람들은 그림으로 글을 그려 기억에 남기고, 소통했다. 무엇보다도 글은 ‘보이지 않는, 생각하는 것’에 대응하는 실물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이 되었던 말(語)이 신의 선물이라면, 기호, 곧 글은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창작물이라 할만하다. 이제 글은 글자그림으로 생존한다. 기억을 위한 글은 그림처럼 짧으면 좋았기 때문이다.


4.

솔직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도 짧은 글의 시공간, 어딘가에 안전한 거주지를 찾고 있다. 고대 그들처럼 우리도 기억하고, 생존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장문은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억하기 어렵고, 사색해야 하는 긴 글은 생존을 단축시킨다는 위협을 느끼는 것 같다. 하여 그림 같은 글을 찾는다. 긴 글은 압박이다. 이로써 생존위험을 촉발시키는 장문에 대한 퇴거명령을 은근히 전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고지 한 두 장도 길다.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은 버린다.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퇴물이다. 버겁다. 글은 그림으로 회귀되어야야 만 한다. ‘우리 시대 그대의 글이 회자되지 않는 것은 관심유발 정치트위터가 아니든지, 너무 길기 때문이다.‘라는 평가는 이상하지 않다. 실상, 장황한 글을 쓰는 자리는 따로 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변방, 골방이 그 자리다.


하지만, 장문은 꼭 필요하다. 그림 같은 글이 필요한 세상에 긴 글도 적절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짧거나 길거나 글은 어떤 공동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하여 글이 길어야 할 때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있다. 만약 변혁을 촉구하는 이들이라면 긴 글을 써야 한다. 글자그림은 부족한가? 그렇다. 그들은 짧은 글과 더불어 긴 글을 남겨야 한다. 그 글을 읽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렇게 써야 한다. 사라져 가는 긴 글을 삶의 변혁도구로 다시 올라서게 해야 한다. 변혁을 꿈꾸는 이들에게 부과된 책무다. 읽는 이가 없어도 남겨야 한다. 이유가 있다. 글자그림은 심장, 마음의 가장 바깥에서 튀어 오르는 감격을 촉구할 때가 많다. 그것을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긴 글은 어떤가. 그것은 심장의 표면을 뚫고 그 심해(心海) 중심에 다다를 때까지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지루하다. 글의 심장까지 다다를 때를 알지 못한다. 글이 다 끝나고 나서 한참 뒤에 그 감격이 솟을 때도 있다. 그때까지 견디며 읽어가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시대가 모든 것을 가졌으나 잃어버린 것 중 한 가지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긴 시간을 들여 한 사물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시선(視線)의 인내심’이다. 하나를 오래 여러 갈래로 바라보는 힘이 쇠약진 것이다. 눈은 찰나의 그림에 더 고정되어 있다. 사물을 뚫고 들어가 관조하는 시력은 퇴보하고 있다. 누구도 아쉬워하진 않는다. 우리는 찰나마저도 긴 시대를 짧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5.

어떤 글이든, 글은 상상력 결정체다. 나는 이런 글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우선, 우리 시대가 보여주는 것에 동의한다. 누가 썼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시대가 보여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장문, 긴 글이다. 먼저, 우리 시대에 누가 그 글을 썼는지는 중요하다. 우리가 이름 석자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회기여자들이 특히 중요하다. 다음으로 그들이 긴 글을 써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변혁을 위한 사색에 기여하도록 자기 사유를 담아 길게 써 주어야 한다. 사회적 지명도는 사색을 위한 장문을 쓸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짧고,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글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지명도를 가진 이들에게 부과된 고유한 책임은 아니다. 오히려 미미한 책임정도다. 우리 시대 그런 촌철살인 같은 글자그림은 생각보다 보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글쓰기 책임을 시인의 몫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런 시대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세계는 시인들만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 같은 산문가도 필요하다. 자기 생각에 목숨을 거는 철학가도 필요한 이유다. 특히 우리 시대에 신학자에게도 그런 단호한 책임이 요구된다. 그들은 시인이 아닌 듯 시인이며, 문학가라 하기 어렵지만 또 문학가다. 시인인 듯 시인이 아니고, 시인 같은 산문 가라 하면서도 텁텁한 산문가이며, 신에게만 의존한다는 점에서 철학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고대 예언자는 더는 아니지만, 현대의 적응해야 할 선견자여야 한다. 고대 예언자들이 그러했듯, 즉 시인이자 사색하는 산문가였고 시대를 선도한 철학자들이었듯, 현대의 신학자들 또한, 신학 너머 인문의 세계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신의 의지를 해석해내야 한다. 그때야 그의 글이 그의 얼굴이 된다.

하여, 글 하나 남기면 많은 이들이 그를 알아채는 사람들이라면, 그는 이 시대에 생존을 위한 사색을 책임 있게 제공해야만 한다. 그들은 시대에 적합한 선(Good)을 글로 남겨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악을 위협할 힘을 부여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걸고 글을 쓸 수 있는 이들은 강력하다. 한 때 그런 글의 위험을 알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색하도록 촉구하는 시대의 글이 무서웠다. 하여 얄팎한 힘으로,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녹색제복을 즐겨 입고서, 반짝이는 별무늬를 과시하듯 모자에 달고, '명령과 지시의 상징인 가늘고 단단한 지휘봉을 자기 손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검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지우고 바꾸라는 것이다. 사람을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한번 나온 글자를 바꿀 수는 있어도 한번 정의로운 인간의 뇌에 새겨진 정의로운 철학과 사색은 누구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당황했다. 하여 글이 사람에게 전달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으로 방법을 바꿨다. 어리석었다. 사전검열은 그런 우둔한 생각의 결실이었다. 그것이 그들이 패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이유다. 아둔함이며, 미련함이었다. 우리 시대 글들은 그런 암흑의 계곡도 지나왔다.


6.

요즘, '글이 뭐 그런 역할을 할지'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다시 늘고 있다. 말로 정치를 하려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자유로운 한국에서 말로만 자기 먹이를 챙기려고 당을 지어 무리놀이를 하는 우둔인류가 생긴 것이다. 그 말에 자기 사색을 다 털어 넣었다고 자랑하며 깃발은 흔들이는 이들도 있다. 건곤감괘 깃발아래 자기 터를 만들어 둔다. 짧아진 말을 선호하지만, 옹색할 정도다. 신념으로 삶을 영위한다고 하지만,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 신념을 매일 퇴고하지 않는 이들은 신념에 매몰되기 쉽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신앙도 그렇다.) 그것은 뒤틀린 이념을 위한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태양 하나로 세계를 밝게 비추겠다'는 국가의 꿈도 실상은 허상이다. 오히려 나는 겁이 난다. 그런 비슷한 일이 나에게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여 내가 글을 남기는 이유는 명확하다.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갖기 위함이다. 내 이름을 걸고 나는 나의 글을 쓴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이, 나를 안다고 해도 내 글을 읽지 않는 이들은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관심사는 아니다. 독자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먼저 나는 나를 위해 긴 글을 쓴다.


다시 말하지만, 시대를 선도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기 글을 남겨야 한다.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글은 실명제여야 한다. 그 글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겠다. 어떻든, 자기 사유가 흘러가는 길과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비록 글이 삶에 변화를 주는 유일한 도구가 더 이상 아닌 듯해도, 길든, 짧든 좋은 글은 여전히 시대에 영향을 준다는 확신에는 변함없다. (이왕이면 긴 글을 쓰자.) 번뜩이는 지혜를 자극해 주는 글이 변함없이 있기 마련이다. 내 삶에 받아들일 만큼 진지하게 읽어낼 글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신문칼럼하나로 겨우 글을 만나는 통로였던 시대도 지났다. 이제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남길 수 있는 글장은 수없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제 글은 이름으로 가치를 발하는 시대다. 아무나 자기 글로 자기 존재를 세계에 알릴 기회는 더 희박해졌다. 그러니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이 남긴 글은 사색을 촉구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그런 존재라면, 내 이름을 걸고 내 글로 내 삶을 돌아보자. 내 글로 내가 앞으로 나아가 용기를 먼저 얻어보자. 이제 나의 글을 덮고, 아니면 버리고, 몸을 움직여 글밖으로 나가자. 내 글이 어떤 이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면 더욱 그리하자. 사색하는 삶을 담아, 오래 따라가야만 하는 글을 만들어내자. 그 글은 저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사회변혁의 기초라는 것을 잊지 말자.


7.

나는 꿈꾸듯 상상한다. 긴 사색을 운명처럼 글로 남긴다. 마치 사진으로 삶을 붙잡아두는 것과 같다. 사진처럼 글은 그 상상이 정지되면서 동시에 오래 기억되는 사건이다. 이제 글로 상상한 것은 행동해보아야 한다. 그것을 힘쓴다. 단호하면서도 미려하게 '야훼의 나라'를 자기 몸으로 살아냈던 히브리인들의 그 예언자(Nābhî)들처럼 말이다. ‘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깨어 세계로 들어갔던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 내가 긴 글을 쓰는 이유다. 이 긴 글은 나의 시대와 호흡하면서 시대를 비껴가는 ‘줄탁동시(啐啄同時)’다.


덧.

*절차탁마(切磋琢磨)-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다

*호접지몽(胡蝶之夢)-나비의 꿈

*줄탁동시(啐啄同時)-안에서 밖에서 동시에 알을 쪼다.

긴 글:분량과 함께 사색하는 깊이다. 내가 사색하는 여정이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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