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이었다.
오래전 어느 날 나는 무심(無心)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영화 <밥정>을 결국 끝까지 보게 되었다. 그 영화는 故 임지호 요리사의 이야기였는데, 타인에게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밥과 요리 한 끼 내어주는 그의 겉모습과 세상에 대해 무심(無心)의 속마음으로 깊은 정을 담아 밥상 앞에 마주앉은 그의 속마음이 절묘하게 교차되어있었다.
그날 이후, 그 짧은 경험 때문인지 생면부지 이분 어디선가 나타날 때마다 반가웠다. 길을 걷고, 우연히 재료를 얻어 길에서 즉석으로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를 대접하는 장면이 겹쳐지면서 마치 내가 그 음식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그의 손에서 빚어진 온갖 음식, 그렇게 차려진 한 끼는 상을 받는 이에게는 아름다운 식사로 기억되는 것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 장면 이후, 나는 그의 인생에도 깊은 곡절이 눈물처럼 흘러 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정사와 마음속을 다 알 순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음식을 볼 때면, 알지 못하는 상흔으로 마음에 생채기가 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무심한 듯 재료를 다듬고 차려 낸 음식을 먹는 분들은 울컥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할 때가 있었다. 늘 오가며 무심히 지나쳤던 그 풀과 나무, 열매가 화려하게 변신했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색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덧입고 자기 앞에 추억의 밥상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먹어볼 순 없어 아쉬웠지만, 요리사와 집주인 사이에 놓인 밥상을 화면으로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세상과 무심해지는 나를 경험했다. 내가 보건대 그는 식탁에서 ‘무심’하게 무심과 작별하고, 식탁 건너 한 사람에게 무심으로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그는 길 위에 흩뿌려진 재료를 모아 하늘의 선물 같은 상찬으로 마주 앉은 이를 환대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급히 하늘로 돌아갔다. 땅의 상찬은 더 만들어지지 못했다.
2.
그리고 얼마 뒤 나는 고 천상병 시인의 명시 <귀천>을 읽었는데, 그 때, 그 들길의 요리장을 떠올렸다.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며 노래하면서 새벽, 이슬, 노을, 기슭, 구름 등과 벗하며 놀았을 때를 추억한다. 그리고 끝내 하늘로 돌아가는 날, 전혀 아쉽지 않은 듯 ‘소풍 끝내’면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시인의 모습 중 널리 알려진 사진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이 시어를 읽을 때 시인이 어린아이의 영롱한 눈을 하고 멋쩍게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시인의 시에서 하늘로 돌아간 그 들길 요리장을 다시 생각했다.
나는 이 시를 나의 서재에서 읽었다. 서재로 나온 지는 꽤 오랜만이다. 잊고 산 것이 많지만, 가끔 이 서재도 잊어버리고 지낸다. 일부러 떠돌아다니듯 서재를 멀리 두고 살아가는 날들이 길어지고 있다. ‘책 너머를 읽는 서재(越書閣)’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도 점점 무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종이책을 뒤로하고 숲과 산으로 이어지는 ‘산 책’을 돌아다녔다. 책 너머 펼쳐지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어 마냥 길을 걷고, 오르고 내리는 시간을 계속 즐겼다.
3.
어느 날, 다시 모든 것들로부터 몸을 돌이켜 서재로 돌아왔다. 고요한 공간에서 침잠하는 시간이 밀물처럼 내 삶에 밀려들었다. 평소 서재는 고요하다. 허름한 공간 치고는 꽤 멋든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 봄이 오면 집 밖으로 백매화가 피고, 새들이 울고, 겨울이 완전히 떠나간 바람이 분다. 여름이 가까워져 오면 흰 아카시아가 피고, 새들이 빈번히 날아든다. 가을이 올 즈음에는 바람이 서늘해서 서재 아래보다 1, 2도는 서늘해진다. 겨울이 오면 서재를 채운 책장에 모든 책이 추위를 탄다. 이곳에 오면 나는 아무 일 없어도 저절로 무심해진다.
책상 한편에 R.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인플루엔셜, 2021)을 몇 쪽 남겨둔 채로 덮어두었다. 책의 끝을 선뜻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를 누군들 답할 수 있을까 싶다.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악해졌다’라는 말에 기웃거리다 이내 ‘선하다 악해졌다 다시 선해졌다’라는 말에 조금 몸을 기울여본다. 누군가 ‘사람은 선하고 악한 것이 동전 양면같이 함께 있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답이 있을 리 없다는 말에도 솔깃해진다. 문득, ‘마음을 주면 될 일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이어 ‘무심’ 한 일들이 마구 떠오른다. 선하게 마음을 내어 준다고 해서 모두 만족할까?
4.
이런 일도 떠오른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이천 어느 수양 센터에서 한두 달 머문 적이 있다. 그 공간에 어느 선교사 한 가족이 하루 이틀 머물고 싶다는 연락이 왔었던 모양이다. 매니저는 여유 있는 방이 없었기에 급한 상황이라며 바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머무는 곳을 좀 사용해도 되겠냐는 것이다. 잠도 자고, 몇 식구가 함께 생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능하면 내가 언제쯤 나올 것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집에 나왔다가 주초에 가려던 계획을 주말로 옮기겠다고 했다. 그 사이에 급한 대로 써도 좋다고 했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다급한 사정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며칠 뒤, 약속한 날짜에 그들이 떠나는 시간에 맞춰 일부러 나갔다. 아무래도 미리 청소를 좀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나의 공간에 머물던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나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청소했다. 나와 마주친 그들은 무심하고 당연한 듯한 표정으로 빠르게 문밖으로 사라졌다. 흩어진 실내 곳곳을 내 손에 익숙한 대로 다시 제자리에 두고 나니 창밖에 어느새 목소리 큰 새들이 늦은 오후를 즐기듯 한바탕 울고 간다.
5.
마음을 좀 진정하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그들이 머물고 나갔던 이 공간과 무심해진다. 그사이에 새로운 이사를 며칠 앞둔 동생이 전화했다. 집에 책을 좀 서재로 옮겨 둘 생각이 없는지 물어왔다. 나는 좋다고 답했다. 무심하게 묵혀둔 책들을 꺼내 숨을 쉬게 해 줄 생각이었다.
살다 보면 무심(無心)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마음을 두지 않는다’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잠시 접어두는 멈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만히 창밖을 보다 펜을 꺼내 몇 자 적어둔다.
“무심으로써 삶은 분절하고 무심으로써 안식한다.”
마음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비워지는 것이다. 비워진 무심처럼 어느새 해가 진다. 몸은 가볍다
*무심=마음 없음이며 마음 비우는 도의 상태를 의미하는 장자의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