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선생님. 동네 소아과를 갔더니 귤을 많이 먹어 그런 거라고 해요. 조금 더 지켜볼게요.”
전화를 끊고 정신없이 일에 빠졌다.
퇴근 후 아이 얼굴을 제대로 볼 여유도 없었다. 아이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고 후회스럽다. 하지만 그땐 그랬다. 내 눈앞에 놓인 일의 책임감에 사로잡혀있었다.
아이는 며칠이 지나도 호전이 없었다.
“내가 오전에 휴가 쓰고 다른 병원에 데리고 가볼게.”
남편은 아이와 함께 병원으로 가고, 나는 출근했다. 오후에 있을 행사 준비에 바쁘게 일을 처리하고 점심을 먹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의사가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지금 가는 길이야.”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상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응급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미안함에 눈물이 났다.
“혈액 검사 결과 헤모글로빈 수치가 굉장히 낮아요. 이 정도면 걷지도 못할 만큼 어지러웠을 거예요. 지금 당장 중환자실로 입원해야 합니다.”
출처 pixabay
중환자실 입원 후 적혈구 수혈을 얼마나 했을까. 아이 컨디션이 조금 돌아온 날 아침이었다. 주사약이 투여된 직후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고, 혈압이 낮아지며 아이 몸에 연결된 기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의료진들의 손이 빨라졌다.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의료진의 실수로 용법, 용량이 잘 못 투여되는 의료사고였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의료진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으로 더 이상 이 병원에서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전원한 병원에서 절차를 밟아 입원 후 아이 증상의 원인을 찾기 위한 골수검사를 실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사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어머니,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입니다.”
내가 잘 못 들은 걸까? 꿈인가? TV에서 보던‘백혈병’이라는 단어를 내가 지금 듣고 있었다.
“오늘부터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첫 항암 치료는 한 달 걸리고, 검사 결과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멍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병실에서 엄마인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