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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Aug 09. 2022

아, 낯선 이여

9월, 입원을 했습니다. 25세 8개월 구오이(여) 이름표가 붙어있는 6인실 가운데 침대가 내 자리입니다. 부모님은 병원 지하에 있는 편의 시설들을 둘려보고 오기로 하고 난 침대 테이블에 바짝 붙어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수술 후 주의사항으로 나눠준 책자를 읽고 있었습니다.


섬유유연제를 전혀 쓰지 않은 것 같은 빳빳하고 건조한 질감의 냉정한 병원복이 문제인 걸까요. 목이 칼칼하고 열도 살짝 나는 것 같았습니다. 요망한 병원복은 입기 전엔 아무렇지 않다가도 입고 나면 나를 이제 막 아프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만들었습니다.

목이 칼칼하고 열이 오르는 것이 병원복 때문인지 아니면 아니면 25세 8개월 이름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침대가 너무 딴딴하다는 겁니다.

부모님과 병원 편의시설에서 사 온 김밥과 과일, 때마침 나온 병원밥까지 나눠먹고 나니 병동은 곧장 잠잘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가야겠다. 내일 아침 일찍 올게.”

나는 엄마 팔짱을 끼고 본관 정문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암병동은 암센터 건물에 있습니다. 암센터는 본관과 긴 통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빠는 차를 빼놓겠다면서 저만치 뛰어갔고 나는 엄마와 털레털레 사람 없는 통로를 걸었습니다. 암센터 로비는 완전히 불이 꺼졌고 통로는 여전히 불이 모두 켜져 있었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북적거리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의자에서 쪽잠 자는 보호자 몇 명, 소리 없이 TV 보는 환자 몇 명만 있었습니다. 괜히 등골이 으슥해, 엄마에게 더 딱 붙어 팔짱을 꼈습니다.


본관 출입구에 다다라 엄마와 깊은 포옹(한쪽 다리만 올려 매달리듯 하는 포옹)을 하고는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왔습니다.

암센터 가까운 통로로 넘어오자 쪽잠 자는 보호자도, TV를 보는 환자마저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다시 등골이 오싹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양쪽 저 멀리까지 텅 빈 통로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게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거나, 세상이 멸망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 세상에 나 혼자 살아남은 것 같이 느껴져 신이 났습니다.


나는 통로 끝에서부터 끝까지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낮에 못 봤던 벽에 걸린 그림도 보고, 작은 소리로 아~ 누구 계십니까~ 요~하고 소리를 울리기도 했습니다. 자판기를 처음 본 사람처럼 과자 구경도 했고, 내용물을 선택하는 버튼의 초록불이 자판기의 처음 과자부터 끝 음료까지 한 번씩 훑고 지나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낮에는 항상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 앉아 보지 못한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 의자 저 의자 앉아보다가 인조 폭포가 보이는 커다란 통창 앞 푹신한 의자에 앉았습니다.


통창 밖은 칠흑 같아 빈 복도가 거울처럼 반사되어 보였습니다. 손으로 쌍안경 만들어 창에 바짝 붙어 밖을 보는데 인조 폭포는 멈췄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통창에 비친 내 모습을 봤습니다. 어제 자른 머리가 어색해 귀 뒤로 꼽아보기도 하고 뒤통수를 쓸어 올렸다 내렸다, 가르마를 이쪽으로 탔다가 저쪽으로 탔다가 했습니다. 긴 머리는 틀어 올리면 되니까 단발보다 낫지 않을까 했었던 것이 생각보다 쾌적하지 않아 이번에는 아주 짧게 잘랐습니다. 지난번에는 긴 머리를 매일같이 다시 묶느라 엄마가 떡진 머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짧은 머리라면 묶을 일이 없으니 떡진 머리를 만지지 않아도 되고 또 가능하면 머리를 감아볼 시도도 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짧은 단발은 중학생 이후로 처음이라 어떻게 하든 낯설었습니다. 거기에 병원복까지 입고 있으니 슬쩍 보면 나도 내가 아닌 줄 알겠습니다.


나를 찾는 안내 방송이 로비를 울렸습니다.

“구오이님 지금 간호사실로 오세요.”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전화가 세 통이나 와있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어딜 앉든 이런 습관이 있습니다) 지나온 통로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안녕히 계세요~요~” 작게 통로를 울리면서요.

이 밤이 지나면 내가 더 낯설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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