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TV 프로그램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셨던 꼭 그 맛에 우는 배우를 보고 엄마가 물었다.
<우리 딸은 엄마 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으려나?>
우산을 치고 들어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아 젖은 우산을 멀찍이 띄어놓으니 창문의 서늘함과 비에 젖은 바지 밑단과 에어컨 바람의 콜라보가 오싹하다. 배가 고프다. 문득 격주마다 놀토라는 것이 있었을 시절이 떠올랐다.
걸상을 책상 위에 뒤집어 올리고 교실 뒤쪽으로 모조리 밀어놓는다. 까맣게 굳어 타이어처럼 딱딱해진 껌딱지를 껌 칼로 밀어 떼어내고 거스러미가 많은 갈색 나무 바닥을 왁스 묻힌 걸레로 닦고 나면, 나는 나의 무게와 책가방의 무게와 내가 뗀 껌딱지의 개수와 교실과 복도를 쪼그려 왕복한 거리만큼을 둘러매고 하교를 했다. 현관에 들어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발라당 누워 끌려 올라간 책가방을 베개 삼아 누우면 주방에서 엄마가 손에 물을 뚝뚝 흘리며 나와, 내 위에 멈춰 섰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밥 먹자>
난 그날 메뉴를 알고 있었다.
달걀프라이로 덮은 밥과 숭덩숭덩 썰린 감자와 양파, 돼지고기, 두부가 들어있는 새빨간 찌개.
우리는 "감자랑 돼지고기 넣고 부글부글"이라고 불렀다. 대학생이 되어 학교 근처, 메뉴는 하나뿐이지만 유명하다는 백반집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엄마의 "감자랑 돼지고기 넣고 부글부글"이랑 비슷하게 생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돼지고기 짜글이> 왠지 이것도 이 음식의 진짜 이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하지만 맛은 내가 아는 맛과 달라 한껏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폭폭 끓어 올라 감자 모서리는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혹사당해 으스러져 걸쭉해진 국물을 가진 찌개를 엄마는 전날 밤에 끓여놓았다.
다음날 김이 냄비 뚜껑을 밀어 올릴 때까지만 끓이면 하얀 두부는 원래부터 빨간 두부였던 것 같이 결 따라 양념이 배어있고 감자는 젓가락을 가져다대기만 해도 파스스 무너져 내리게 된다. 새우젓의 작은 새우도 보이는데 엄마는 항상 돼지고기에는 새우젓이 최고라고 했다. 반숙 달걀 비빈 밥을 먼저 입에 넣고 기다린다. 돼지고기와 감자, 두부를 한 숟가락에 쌓아 넣고 그제야 한꺼번에 씹는다. 이때가 바로 아까 둘러매고 온 나의 무게와 책가방의 무게와 내가 뗀 껌딱지의 개수와 교실과 복도를 쪼그려 왕복한 거리만큼을 내려놓을 타이밍이다. 으스러진 감자만큼 나도 노곤해진다.
엄마는 숭덩숭덩 썰은 돼지고기를 사는 날이면 항상 "감자랑 돼지고기 넣고 부글부글"을 만든다.
어느 날은 국물이 좀 많고 어느 날은 짜고 어느 날은 감자 넣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가 해 준 맛이라는 것이 있다. 신기한 노릇이다. 이것은 감칠맛과는 또 다른 맛인데 아무리 여유로운 냄비로 시작해도 끓어 넘치고 마는 그런 맛이랄까. 몇 번을 해봐도 그 맛이 나지 않아 엄마 옆을 서성거렸다.
<엄마, 나는 아무리 해도 그 맛이 나질 않아>
엄마는 귀찮은 척하지만 이내 곧 새침해진다.
<자 잘 봐봐. 일단 넘치지 않게 여유로운 냄비를 꺼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