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내가 6살 때, 동생이 태어나기 바로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 꼭 동생 나이만큼 23년이 지났다. 나는 외할머니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만 허벅지에 있던 큰 반점과 굴곡진 손만은 기억한다. 엄마가 보여준 사진 속 얼굴을 손뿐인 내 기억 속에 대입시켜, 이것들로 엄마와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외할머니는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인절미를 만드셨다. 수확한 찹쌀로 찰밥을 지어 앞마당의 나무 절구통에 옮겨놓으면 외삼촌과 아빠는 절구 방망이를 하나씩 들고 서서, 너 한번 나 한번 절구질을 했다. 꼬마들은 드는 것조차 어려운 방망이가, 박자에 맞춰 찹쌀밥에 쩍 하고 달라붙었다가 짝하고 떼어지는 게 신기했다. 박자 사이마다 외할아버지는 물 묻힌 손으로 폴폴 김 나는 반죽을 어루 잡았다. 할아버지 손을 내리 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해서 꼬마들은 꺄악꺄악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짓이겨진 찹쌀밥은 찹쌀떡이 되었다. 밥알이 완전히 으깨어지지 않아 떡 사이에 군데군데 밥알이 섞여있는.
아빠랑 외삼촌이 읏쌰하고 떡 어디에 놓을까요 하면 외숙모는 여기요 여기 하면서 부엌 옆 작은 방으로 옮기라 손짓했다. 외숙모는 밥상 두 개를 이어 펼쳐 커다란 쟁반을 각각 놓고 한쪽 쟁반에는 기름을 다른 쟁반에는 콩고물을 뿌려놓았다. 우리는 떡보다도 먼저 작은 방에 도착해 콩고물이 뿌려진 밥상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물 섞은 기름을 맨손에 묻혀, 여전히 김이 폴폴 나는 떡을, 손바닥으로 밀어 밥상 끝에서부터 끝까지 기다랗게 만들었다. 나는 그 손을 기억한다. 검게 탄, 단단하고 굴곡진 할머니의 손을 인절미와 함께 기억한다. 외할머니가 우유빛깔의 뽀얀 접시를 오른손에 쥐고 굴려 떡을 숭덩숭덩 썰어 콩고물 뿌려진 옆 밥상으로 도르르 굴려 보냈다. 그러면 떡 굴러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떡을 쟁반 위 콩고물에 꾹꾹 눌러 묻혀 먹었다. 우리는 외할머니댁에 있는 내내 인절미를 먹었다. 화장실을 가는 길에도 먹고, 화장실 갔다 오는 길에도 먹고. 그러면 엄마는 가만히 듣다가, 그랬었나? 하며 킥킥 웃는다. 그러면서, 엄마는 할머니 하면 식혜가 생각나 라며 말을 이어간다.
엄마 말로, 외할머니는 식혜를 자주 만들어주셨는데 어느 날 외할머니가 다 삭힌 엿기름을 솥에 넣고 엄마에게 끓어 넘치지 않도록 잘 지켜보라고 맡긴 뒤 앞마당으로 나가셨다고 한다. 엄마는 자꾸 떠오르는 밥알을 건져서 버렸는데 식혜를 마실 때 밥알이 항상 가라앉아 있어서 떠오르는 건 건져내는 줄 알았다고. 계속 밥알이 떠올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계속 건져서 버렸는데 식혜를 만드는 데에 쌀이 엄청나게 많이 버려지는구나 했다고 한다. 당시 외할머니 부엌에서 쪽문을 열고 나가면 뒷마당이 나왔는데, 부엌 싱크대 물이 뒷마당에 연결된 도랑으로 흘러나갔다. 뒷마당에서 일하고 계시던 외할아버지는 누가 자꾸 밥알을 버려서 소리를 빽 지르셨다고 한다. 누구여, 누가 자꾸 밥알을 버려! 그날 만든 식혜는 밥알이 거의 없는 식혜가 됐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식혜를 끓일 때 솥 앞에서 떠오르는 밥알을 보면서 잠시 골똘한 시간을 가지며 미소를 띠면 또 그 이야기를 하겠구나 한다. 어떤 것이 먼저든, 우리는 밥알 없는 식혜와 인절미를 한 세트처럼 묶어 이야기한다. 훗날 엄마가 외할머니 나이가 되고 내가 엄마 나이가 됐을 때, 솥에서 끓어 떠오르는 밥알을 보며 밥알 없는 식혜 이야기를 하는 엄마와 그 속에서 소리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생각하겠지, 인절미 이야기를 듣는 엄마를 생각하겠지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외할머니는 여전히 사무치는 존재라 툭툭 꺼내지는 못하지만 암묵적으로 허락된 인절미와 밥알 없는 식혜로 그리움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