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 리뷰
사람과 사람 간의 마주침이 눈에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난다. 부직포 원단의 조직 사이로 인사말이 새어 나오고, 감정을 실은 눈빛으로 위로의 안부를 전한다. 악수보다는 주먹을 맞닿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현하고, 때때로 팔꿈치를 부딪히며 포옹을 생략한다. 코로나 19가 시작된 이래, 우리네 소통은 생각보다 많이 달라졌다.
이번 학기 기말시험이 끝나면 집에 갈 예정이었다. 나란히 마주 앉아 밥 먹은 지도 오래된 (그래서, 식구食口라고 부르기에도 뻘쭘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여름을 보내겠다는 다짐은 다짐으로만 머무르게 생겼다. 모든 계획을 무산시킨 것 또한 코로나19이다. 나뿐만 이겠는가. 누군가의 방학, 휴가, 취업, 이민의 계획들이 무기한 연장되었다. 바이러스의 힘은 우리 모두의 예상을 꺾을 만큼 셌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소모임과 다른 문화권을 탐험하는 여행은 줄줄이 취소되거나 적당한 시간 이후로 재조정되고 있다. 아쉽게도, 코로나 이전과 이후, 대조되는 소통과 여행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자리는 마땅치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반가운 공지를 받았다. 카페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지역혁신에 대한 리소스를 제공하고 계시는 강남서초이장님의 새로운 인문학 모임 소식이었다.
(*강남구청의 관리감독 하에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따르고, 개인위생과 마스크 쓰기가 철저히 실천되며 진행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한 모임은 청담의 한 루프탑 공간에서였다. 열 명의 지역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주로 가까운 지역에서 크리에이터나 창업가로 일하면서 본인들이 소속된 커뮤니티에서 혁신적 활동들을 구상하고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이 날의 책은 내가 이장님께 추천했던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이었다.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그리고 파리를 방문하고 각 도시가 가진 히스토리를 소개하는 방식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여행과 기록이라는 관점으로 유럽 네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앞으로 다가올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여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리소스를 제공해주었다.
도시는 한마디로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을 뜻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 서울에는 970만 명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중 약 10분의 1이 강남과 서초에 있다. 이번 모임이 특별히 도시공동체와 여행에 대한 주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임을 이끄는 이장님의 소속 카페 커뮤니티의 특성상, 강남과 서초 지역을 강남 공동체라는 하나의 큰 틀로 칭했다.
강남은 많은 이들에게 편리한 집합지로 여겨지고 있다.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교통편이 제공되고, 공간 선택이 많아 다양한 종류의 모임을 가질 수 있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많은 사무실과 코워킹 회사들이 있어서 창업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열정을 불태우는 지역이기도 하다. 독서 후기를 서로 나누면서, 어떤 이는 강남을 젊음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또 다른 이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면서 잔재를 남기는 은빛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책 한 권 속에 선명한 이미저리Imagery로 남겨진 네 도시를 눈과 손 끝으로 따라 읽어 내려갔다. 분명 작가는 도시를 여행하면서, 도시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긴 게 맞는데, 독자인 나는 그가 ‘사람'을 여행하고 있다는 기분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인간의 미의식이 수천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하긴 미의식만 그런가. 도끼와 창으로 거대 포유류를 사냥했던 수렵 채집인과 스마트폰을 들고 포켓몬스터를 잡으러 다니는 21세기 ‘스몸비’는 행동 양식도 무척이나 비슷하다. … “시간여행을 해본 사람은 알지.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P.46-9
작가가 유럽의 길을 걷다가 만난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강남’의 길을 거닐며 매일 보고 있다. 다른 스토리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걷고 있지만, 인간은 역사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동일한 미의식과 행동 양식, 그리고 본성까지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생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본성에 따른 감정들을 겪는다. 아테네의 성벽은 그러한 공통적인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은 아테네에서 피레우스까지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두려움의 건축적 표현이다. P.54
두려움이든, 도전의식이든, 흥에 겨운 기쁨이든,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여 정치체제를 변화시킨다. 이 변화에 기초하여 우리의 일상생활도 많은 수정을 거듭한다.
정치체제의 변화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것이다. P.110
인문학 모임을 여행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 나의 두 발이 닿을 여행지는 ‘도시’에 국한된 것이 아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본성, 그들의 감정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모여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은 많은 가르침을 준다. 특히나, 특정 작가의 콘텍스트가 어떤 이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로, 이번 책에 대한 참여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접했다. 감사하게도, 이 커뮤니티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타인을 통해 레슨을 얻고 나면, 난 반드시 나 자신에 대해 되돌아본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여행의 시작에 있어서 ‘나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사람은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듣고,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데 여행을 하는 주체에 대해 내가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여행의 깊이도 달라진다. 나를 보는 눈, 나는 그것을 ‘가치를 아는 눈’이라 이름 짓고 싶다.
골목 어딘가에 21세기의 소크라테스가 뛰놀고 있다면, 이 동네가 제2의 케라메이코스가 될지도 모른다. P.63
작가는 하나의 골목을 거닐면서도 골목이 지닌 가치와 가능성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역사의 흐름과 사람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를 여행하든지 남이 쉬이 보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눈을 가졌다. 그 눈으로 본 오모니아 광장은 이름만큼이나 강력한 이미저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곳에서 축하 집회를 열고 광장의 이름을 오모니아라고 지었다. ‘합의’ 또는 ‘만장일치’라는 뜻이다. P.63
오모니아 광장. 광장의 이름을 보며 이 공간이 가진 역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합의’나 ‘만장일치’를 의미하는 이 광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루었을까.
가능성과 가치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떤 평범한 동네길을 걷든, 한평생을 살아온 길 어귀를 돌든, 그 사람이 가는 그곳이 세계 어떤 여행지보다 더 값진 배움을 남길 것이다.
대부분의 모임 참석자들은 강남에 살면서 강남을 하나의 공동체, 가끔씩 ‘도시’로까지 칭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 여러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그중 강남은 모든 생활권과 모임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남을 작업실과 집 삼아 다양한 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곳에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을 쌓아가고 있다.
사람과 그의 공간을 목적지 삼아, 그 공간이 가진 가능성과 가치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여행하는 인문학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앞으로의 여행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갈까, 문득 궁금해졌다.
로마는 확실히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였다. 아무렇게나 다녀도 거리의 향기를 맡고 공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P.156
로마를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로 정의한 작가. 그는 어떤 의도 없이 배회한 로마의 한 구석에서도 로마의 향기를 맡고 로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두 강남만이 가진 향과 강남만이 가진 이야기가 있다는 데에 동의했다.
길 위에 삶이 있다. P.234
우리가 여행하는 바로 그곳에 삶이 있다. 여행을 늘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삶이 여행의 동기가 되어주는 듯하다. 여행이라면 가능할 것만 같은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 새로운 방향. 인문학 모임이 여행처럼 느껴졌던 원인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새로운 만남 속에 숨겨진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공동체가 펼쳐 보일 새로운 기회.
작가 빅토르 위고가 존폐의 기로에 선 노트르담을 구했다. P.251
때로 생각지 못했던 하나의 시도가 무언가를 소생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전에 없던 에너지를 창출해낼 수도 있다. 작가 빅토르 위고가 노트르담 성당에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덧입힌 것처럼, 우리의 모임(여행)은 우리네 공간과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더할 거라 믿는다.
민주주의를 '어떤 제도의 집합'보다도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P.256)으로 표현한 작가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저녁시간을 각각의 개인이 한 자리에 모인 모임이 아닌 각자 어딘가로 향하는 여정의 과정으로 보게 되었다. 하는 일과 이루고자 하는 바는 다르지만, 인생을 여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다 같은 여행자였다.
지난 봄학기 수업이 전부 비대면 강의로 바뀌면서 나의 일상의 루틴 또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이제는 답답하다며 투덜댔던 마스크 없이는 버스에도 오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동 양식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감정도 많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는 만큼 볼 줄 알고, 믿는 만큼 행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생이라는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로 살아간다.
마지막엔, 우리 모두가 각자 그토록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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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images by 네이버 카페 강남서초이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