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에이징을 넘어 코에이징으로
다시 자리에 눕게 된 할머니 소식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슬금슬금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광주에 내려가줄 수 있겠니?
엄마의 곤란함이 문장에 묻어 있었다.
나는 따릉이를 빌려 타고 잠실 새내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마지막 학기가 얼마 남지 않았고, 언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게 될지 알 수 없어서, 틈만 나면 소장하고 싶은 신학 서적을 찾아다녔다. 그날도 어김없이 장바구니 하나 챙겨서 알라딘에 도착했고, 이 책 저 책을 들여다보는 중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밴쿠버는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광주에 내려갈 수 있겠냐는 물음. 엄마의 곤란함이 문장 끝 물음표에 묻어 있었다.
아, 안타까움에 몸이 굳어짐을 느꼈지만 곧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엄마에게는 우선 집으로 가서 해야 할 일, 정리해야 할 것들을 처리하고 광주로 가겠다고 했다. 서점을 나와 다시 따릉이 위에 올라타면서도 신기한 마음에 계속 웃음이 났다. 할머니가 아프신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미소를 지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던 때는 정확히 내가 섬김과 봉사를 합친 단어, 한마디로는 '서비스 service'라는 부분을 묵상하고 있던 시기였다. 하나님의 디테일한 인도하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짐을 챙기면서 빨래를 돌렸다. 다음날 오전,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인 정도의 허리 통증을 호소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도 무릎이 편치 않아 두 분 다 불편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정해준 시술 날짜까지 곁을 지키면서 장도 보고 반찬도 사 왔다. 차리고 치우고, 차리고 치우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남는 시간에는 작은 방 하나를 차지해 과제를 하거나 논문을 썼다. 병원에서는 시술 후 하루만 입원하면 된다고 해서 '간이침대' 위에서 잠도 자봤다. 입원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 바로 앞자리. 새벽 내내 깨고 다시 잠들고를 반복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고, 컨디션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예민했다.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다가 울고, 할머니에게는 짜증을 냈다. 내가 광주에 내려간 것을 알고 있었던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하나님이 네게 '서비스'를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는 시기 같다고. 맞다. 뭔가를 새로 배우는 건 늘 신나지만 자주 불편하고, 때때로 포기하고 싶기도 하니까.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병간호라는 걸 해봤다. 사람이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잠드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밥을 먹고 이를 닦고 변을 처리한다. 병듦과 나이듦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일이라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살면서 이만큼 심각하게 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싶었다. 시편 90편 12절을 찾아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해본 적은 있어도,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에 가까이 다가온 적은 없었다. 게다가 하루하루를 습관처럼 그저 살아가는 인간에게 날을 계수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삶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내자면, 그래도 한번 사는 인생,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면서 살아가고 싶어졌다.
사람이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잠드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밥을 먹고 이를 닦고 변을 처리한다.
병듦과 나이듦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일이라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18년 전 한국을 떠나면서,
18년 후 노인이 되어있을 자기 엄마와
그녀의 병시중을 들고 있을 중년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도착하던 즈음엔 할머니 방에 병원 침대 하나가 배달되었다. 간병을 오시는 분께 문의를 드려 요양 등급을 조절했고, 센터의 배려로 빠른 시간 내에 침대를 받을 수 있었다.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침대였는데, 할머니는 몇 차례 써보더니 다시 자신에게 익숙한 돌침대로 돌아갔다. 80년을 자신의 방법과 취향대로 살아온 분이 낯선 물건들로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병원 침대는 엄마 차지가 되었고, 엄마는 침대에 달린 식사 테이블을 독서와 글쓰기용 책상으로 사용했다. 센터에서 알아차리면 금방이라도 침대를 다시 회수할까 봐 나 혼자 살짝 긴장했었다.
간호사였던 엄마는 외갓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삼시 세끼를 챙기고, 점심 식사나 저녁 식사 후에 오랜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했다. 큰 이모에게 부탁해서 한 주말에는 나와 함께 제주에 다녀오는 보너스도 얻었다. 그 외에는 주로 외갓집에서 병간호를 했다. 할머니가 다시 걸을 수 있게 재활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었다. 큰 딸로서 큰 딸인 엄마를 바라보던 내 마음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고맙고 미안하고, 존경스럽다가도 애잔했다. 18년 전 한국을 떠나면서, 18년 후 노인이 되어있을 자기 엄마와 그녀의 병시중을 들고 있을 중년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세상모르고 떠드는, 급작스럽게 우울해지는, 사춘기에 접어든 세 아이를 챙기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테다.
하루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간병인 아주머니가 오실 시간에 엄마와 나는 근처 호수를 운동 삼아 걷자며 집을 나섰다. 아픈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는 엄마,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손녀이자 큰 딸로 살아가는 나, 이렇게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내게 새롭게 떠오른 '숙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새로 생긴 나의 숙제는 코에이징, "함께 나이듦"이었다.
코에이징 (co-aging), 함께 나이듦.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토록 미뤄온 금기어,
'요양원'이 화두에 올랐다고 했다.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기 수업이 끝나면서 엄마와 함께 밴쿠버로 돌아왔다. 나에게는 3년 반만의 컴백이었다. 두 달간의 간병을 마무리한 엄마와 시기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와, 같은 방에서 같은 2주 격리를 마쳤다. 눈이 많이 내리고, 여기도 겨울이 있긴 하구나, 하는 찰나에 한국에서 아쉬운 소식이 건너왔다. 할머니가 무리하여 떡국을 끓이시다가 다시 허리를 다치셨다는 소식. 할머니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토록 미뤄온 금기어, '요양원'이 화두에 올랐다고 했다.
일처리가 확실하신 할아버지는 바로 다음날 한 요양원에 다녀오셨다. 두 분 다 몸이 약해졌을 뿐, 기억해내고 생각하고 교류하는 방식은 이전의 모습과 같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속도만 현저히 늦춰졌다. 걷는 속도, 이해하는 속도, 적용하는 속도. 요양원에서 두 분이 살아가시는 그림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도 같은 의견이었다. 지금도 아침 일찍 증권회사에 가셨다가 밭에 들러 풀 좀 뽑으시고,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광주 근처로 하루치기 여행을 다녀오시는 분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요양원에 계신다는 건 어째 앞뒤가 좀 맞지 않아 보였다. 할머니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간병인 할머니의 방문 시간을 늘리는 것으로 조절을 해보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엄마에게는 부모님의 노후함이 마치 자기 자신의 불편함인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온 소식은 엄마를 통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엄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할머니 나이 80에 엄마 나이는 이제 60. 큰 딸(바로 나)은 이제 만 32살에 막내아들은 며칠 전에 23살이 되었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간다는 전제하에) 하나 둘 가정이 생기기 시작하면 큰 일들을 치르느라 엄마는 곧 70이 될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어가는 동안, 나는 아줌마가 돼가겠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나이 들어간다. 세계 어디를 들여다봐도, 어떤 세대를 콕 집어봐도, 모두가 다 똑같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는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어가는 동안, 나는 아줌마가 되겠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나이 들어간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는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최대한 오랫동안 건강하게 일하고 다가오는 노후를 잘 준비할까 고민했던 건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갑작스러운 실직, 갑작스러운 질병,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최대치로 태연하기 위해서.
이제 나는 당황하지 않기 위함을 넘어서,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더는 안타까워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최대한 끝까지 지키기 위해,
이들과 함께 나이 들기로 마음먹는다.
한국에는 마음 챙김이라고 알려져 있는 Mindfulness는 주로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영성(Spirituality)과 명상(Meditation), 자기 계발(Self-help)과 관련하여 자주 듣게 되는 용어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Mindfulness은 '인식'에 가깝다. Awareness라고도 하는 '깨어있음'과 뜻을 나누어 갖는다.
코에이징, 즉 함께 나이듦의 시작은 '인식'이다. 나와 여러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 나의 시선이 남을 향해 있어서 나를 놓친다거나, 나만을 집중하다가 남을 보지 못하는 인식의 불균형으로는 함께 나이들 수 없다. 몇 해 빠르거나 몇 해 늦을 뿐, 할머니와 엄마와 나는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코에이징, 즉 함께 나이듦의 시작은 '인식'이다.
최근 엄마와 늦은 저녁 통화를 했다. 엄마는 요즘 한창 메타버스, 암호화폐, 토큰 이코노미를 공부하고 있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고 덕분에 할머니 간호까지 할 수 있는 휴가를 누렸지만, 지금까지 복직을 못하고 계속 집에 있게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미래 공부를 당겨서 하는 중이다. 나는 오히려 엄마가 너무 영상과 책에만 빠져서 건강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에 잔소리를 했다. 계란은 어디 마켓에서 사 먹고, 우유도 잘 알아보고 먹고, 영양제도 빼놓지 말고 챙기라고. 걷고는 있냐고. 비나 눈이 멈추고 조금이라도 해가 뜨기만 하면 핸드폰 놓고 밖에 나가서 좀 걸으라고. 나이 먹으면서 근육량이 점점 낮아지니까 걷는 건 필수라고.
한참 잔소리를 하다 보니 내 잔소리에 내가 찔리는 기분이었다. 너나 잘 챙겨 먹고, 너나 영양제 잔뜩 사놓은 거 빼먹지 말고, 너나 걸으라고. ㅎㅎㅎ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살림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엄마의 근육량이 내 것보다 훨씬 많을게 분명하니까.
엄마는 2020년 7월에 블로그를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앞으로의 인생을 기록으로 미리 준비하길 원했다. 나도 기록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같이 하다 보면 둘 다 성장하겠다 싶었다. 한동안 나는 취업하랴 새로운 기관에 적응하랴 글을 놓고 살았지만 엄마는 계속 읽었고 꾸준히 기록을 남겼다. 엄마의 처연한 지속을 보면서 나도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폭발 직전의 내 에버노트, 칭찬해.)
최근에는 엄마와 동네 공원에 걸으러 갔다. 걸으면서 그동안 못한 블로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엄마의 블로그를 재정비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올해 60을 맞이한 엄마의 미래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숙제가 많다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그새 도서관에 가서 카드를 만들고 책을 빌려왔다고, 어제 내게 전했다. 알고 보면 우리 집 실행력은 이 여자한테서 온 게 분명하다.
작년에 결혼을 하고 새댁이 되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서일까. 시간이 더욱 빠르게 지나간다. 함께 살아가기에도 바쁜 요즘, 나는 함께 나이듦을 생각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어느 날 당황하고 싶지 않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나라고 다를까. 어차피 가는 시간을 지혜롭게 보내면서 더 만족스러운 내일을 준비하고 싶다.
함께 운동하고, 건강히 챙겨 먹고, 매일 기록하자, 라는 잔소리로 나는 엄마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걷고, 먹고, 쓰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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