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엄마의 그 딸'이 되고 싶어서
이국땅에 와서 산지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엄마가 떠나는 날까지 얻어먹는다. 얼린 돼지고기에 새로 담근 김치까지. 떠나기 전날 밤늦게까지 아들내미 챙겨준다고 만든 돈가스 몇 쪽을 가방에 담아 건네주는 엄마. 그리고 그걸 받아먹는 나, 엄마의 딸내미.
공항으로 가는 차 안. 캐나다 심카드를 빼낸 엄마의 갤럭시 노트는 번호도 데이터도 없다. 이동 중이라 와이파이도 없다. 아직 우리 옆에 있는데, 밴쿠버에 발 붙이고 서있는데, 엄마는 벌써 떠난 사람처럼, 전화나 카톡으로는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서 거칠게 운전하는 큰 딸내미에게 단 한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는 사람. 1년 반 전에 한 파마가 많이 풀렸다며 어깨 넘게 기른 나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최근까지 다니던 미용실에서는 고객 서비스가 영 엉터리였다. 9월 내내 파마 행사를 했으면서, 길이에 상관없이 디지털 파마를 80불에 뿌렸으면서, 나에게는 연락하나 없었다. 그래, 다시 할머니 미용실로 돌아가자. 길이에 상관없이 60불이면 1년 넘게 짱짱하게 가는, 본인 집 1층 구석에서 몰래 시술을 하시는 (법 없이도 사시는) 할머니를 찾아가자. 그리고 할머니와 나의 연결고리, 울 엄마 핸드폰.
'권사님미용실' 이라고 저장돼있던 10자리 숫자를 내 핸드폰에 옮겨 누르고 '할머니미용실' 이라고 저장한다. 롤 다 말고, 파마약 다 뿌리고, 머리칼을 뒤적이는 그 손길이 좀 거칠더라도 싸니까 좀 참지 뭐. 엄마가 가고, 뿌리 염색이 1센티 정도 더 빠지면 파마하러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몇 시간 지난 후에 다시 떠올려보니 참 거지 같다. 음식을 받아먹는 것도 부족해서 정보까지 쏙쏙 빼간다. 고맙다는 말 하나 없이. 당연한 듯. 그냥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엄마는 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동생과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본 옥주현과 자이언티의 듀엣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 시작한다. 동생은 제법 옥주현의 창법을 엇비슷하게 따라 한다. 자지러지게 웃는 나. 엄마는 창밖을 보다 말고 나의 웃음소리를 따라 웃는다. 엄마가 웃기에 나도 더 웃는다. 동생도 웃는다. 숨을 쉬기가 어려울 만큼 웃었다. 마치 며칠 전, 하와이에서 우리 셋, 함께 웃던 것처럼. 별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장소마다 같은 웃음소리를 뿌리고 다녔던지.
엄마의 출국 2일 전, 그러니까 바로 엊그제, 동생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티비쇼를 보다가 나 혼자 울었다. 엄마가 잠깐, 뭐 그래 봤자 6개월에서 1년 정도 혼자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던 모양이다. 엄마, 잘 갔다 와. 진짜 잘됐다. 아빠랑 남동생 나무라기는 개고생 좀 해봐야 돼. 28년을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있을 때 잘하라지. 이제 와서 왠 앓는 소리래? 없어봐야 돼.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야지. 블라 블라 블랄라. 남의 이야기처럼, 소설 속 주인공 이야기처럼 뒷짐 지고 저 멀리 서서 이 소리 저 소리 개소리 막 하다가 출국날을 2일 앞둔 늦은 저녁, 눈물이 흘렀다. 원래 물어보는 것 많은 사람인데, 혼자 가져가기엔 짐도 많은데, 괜찮을까. 그것보다 엄마 요리가 그립고, 엄마 소리가 그립고, 엄마 얼굴이 그리울 나, 정말 괜찮을까 싶어서.
글을 쓰고 싶은 이유야 많다. 나만의 소리를 갖고 싶은 것, 나의 의견을 외치고 싶은 것, 나의 생각을, 감정을, 잡다한 소식을 어떤 형식으로든 남기고 싶은 것. 그중 요즘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엄마다. 엄마의 남편인 아빠이기도 하고, 엄마의 시어머니인 할머니이기도 하고, 엄마의 딸인 여동생이기도 하고, 엄마라는 여자이기도 하고, 엄마가 자라온 한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엄마로 연결되어있다. 한국 여자들의 헌신, 한국 여자들의 살림이라는 일, 한국 여자들의 결혼, 한국 여자들의 직업 외에도 수만 가지 글의 주제들이 다 엄마라는 중심주제로 돌아온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다 자신이 없고, 어쩌면 그냥 글 쓰면서 여행하면서 연애하면서 늙어가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나불 거리는 딸내미. 엄마의 역사와 선택과 인생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건 아닌데, 난 그럴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왠지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뒤늦게 내 주둥이를 원망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기에, 엄마의 주권과 결정으로 앞으로 엄마가 해야 할 모험을 시작한 것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지지한다.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자신이 없는 못난 나보다 모든 두려움과 인생의 옥에 티들을 밟고 일어서서 앞으로 한걸음 전진한 엄마가 훨씬 멋있으니까.
엄마 말고 딸로 남고 싶다. 엄마를 할머니로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으나, 엄마는 영원히 나의 엄마로만 남겨두고, 나는 죽을 때까지 딸로만 남는 것도 좋겠다. 엄마 같은 딸이 되고도 싶다. 엄마에게 엄마 같은 딸. 실제로도 할머니는 몸이 너무 안 좋으셔서 엄마에게 이젠 딸 같은 엄마가 되어버렸으니까.
엄마에게 딸은 어떤 의미일까.
도대체 어떤 마음이, 가진 것을 다 털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음일까.
재미있게도 엄마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회사에 와서 4시간 정도 일을 한 후에 회사 동료의 아이들을 봐주러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부부만의 시간을 가지러 시내에 나간다는 그녀에게는 세 딸이 있다. 2학년짜리 하나와 유치원생 쌍둥이 딸들. 외출 전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만화 한 편을 시청하려는 아이들을 차례로 안아주고 뽀뽀해주며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를 딱 세 번 반복하고 '고마워, 유나'라는 말로 자리를 뜬 동료.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엄마를 떠올렸다. 우리 엄마에게 나라는 딸내미는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의 의미일까. 외출 전 나누는 포옹과 볼뽀뽀의 의미일까. 외출을 하는 와중에 '잘 자고 있을까, ' 궁금하게 하는 의미일까.
아닐 것 같다. 사랑 고백도, 사랑 표현도, 걱정 섞인 질문도 아닐 것 같다. 동료가 아이들에게 남긴 것은 사랑하고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들이고, 진짜 사랑의 의미는 아니었다. 사랑.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사랑. 그 사랑의 의미는 문장도, 행동도, 생각도 아니고, 그냥 사랑이다. 다 줄 수 있고, 다 줘야만 하고, 다 주게 되는 사랑. 그렇게 다 줘도 부족한 사랑. 다 줘도 줄 것이 또 생기는 사랑. 받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랑.
그래서 난 사랑을 모른다. 평생 알 수나 있을까. 감히 상상이나 해볼 수 있을까 싶다. 어렵고 무겁기도 하다. 받을 때는 좋지, 줘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내 안에 줄 것이 있기나 할까. 없으면 어쩌지? 뭘 어디서 가져다줘야 하나? 안 주고 그냥 뻐튕길수는 없는 건가? 보라, 벌써 난잡해진다. 그냥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예정 착륙시간보다 30분 연착된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도 편의에 따라 미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개가 많이 꼈으니까,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니까, 공중에서 부는 바람이 생각보다 강하니까, 조금 늦게 도착하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지 못하는 것처럼. 좀 늦어져도 아무도 캐묻거나 요상한 눈치로 쳐다보지 않는다면 다들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해질 텐데. 이런 이상적인 상황이 현실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해도 미루면 안 되는, 더 이상 미루면 좀 미안한 것이 하나 있다. 엄마의 딸로, 엄마의 딸답게 살아가는 것.
출국 후 서울에서 지내다 잠깐 엄마의 고향, 보성에 내려왔다,라고 했다. 엄마는 보성이라는 시골, 낮은 돌담길 아래 쪼그려 앉아서 울던 감수성 풍부한 소녀였다. 바다 앞에 서서 거세게 부는 가을바람에 함께 출렁이는 파도를 담아 카카오톡을 보내온 엄마. 영상 안에는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보성의 바다를 잊고 있었노라고, 몇 주 전 다녀온 하와이의 바다보다 더 깊은 멋이 있다고. 진짜 해야 할 싸움을 시작했다는 당당한 그녀의 고백. 그곳에서 엄마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의 50대는 예상하지 못했던 보성의 바다의 찬란함으로 빛나고 있다. 할아버지의 조언으로 간호학과를 선택했고, 할아버지의 제안으로 보건진료소장의 길을 걸어온 엄마. 남편의 고집 하나로 40이 넘은 나이에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한 후, 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을 만큼 가족부양에 힘썼던 엄마에게 남은 것은 노인이 되는 일이 될 뻔했다. 하지만 세상의 예상과 완벽히 반대로, 엄마는 엄마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조금 늦은 결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정확한 때에 일어난 정확한 결단이다.
결혼해라, 손자 좀 보자, 다른 집 애들은 승진도 하고 집도 사는데, 너는 얼마나 모았니, 같은 말들. 엄마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의미 있는 인생.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인생.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인생.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진짜 가치임을 엄마는 알고 있다. 그냥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엄마 또한 그 가치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내가 대학원을 진학하든, 퇴사를 하고 떠돌이로 살아가든 상관없이 글을 쓰기로 작정한 것에는 엄마의 새로운 행보가 함께 녹아들어 가 있다. 한 명이든 백 명이든, 만 명이든 백만 명이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엄마가 발견한 가치를 함께 발견하게 될 것이고, 내가 하는 아주 작고 소소한 실천들을 함께 실천하게 될 것이다. 세상 모두가 알아주는 유명인은 아니지만,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알려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작은 삶일지라도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나는 엄마와의 이별을 통해 배워간다.
언제고 엄마가 다시 캐나다에 오는 날에 나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한국으로 떠나는 날, 나와 포옹을 나눈 후에 눈물을 보였던 엄마는 아마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미소로 나를 다시 한번 안아줄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아마도 그 날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두의 삶 속에 절대 함께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나의 엄마로 만나게 하신 그녀의 삶에 역사하시는 그분을 또 만나게 될 것 같다.
Source:
Cover Image by Freddie Marriage
Images by Yoona Kim
Images (from the video) from M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