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더 좋은 때라는 건 없으니까
주로 한국시간으로 늦은 저녁, 엄마에게는 이른 아침에 우린 영상통화를 한다. 엄마는 아침 기도시간 이후 아침식사 직전, 나에게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최근 몇 년 사이로 부쩍 엄마의 얼굴에서 나를 본다.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엄마의 분위기, 엄마의 표정, 엄마의 느낌을 더 갖게 되겠지. 그래서 더 집중하게 된다. 엄마가 하는 고민, 엄마가 하는 생각, 엄마가 하는 기도가 마치 나의 것처럼 느껴져서.
연금 이야기가 나왔다. 사회 구성원으로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정부로부터 받는 생활비 개념이라 늘 좋은 시스템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엄마가 이런 말을 한다. 연금을 받기까지 남은 몇 년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고. 그러고 보니 연금은 한 개인에게 ‘생산적인 경제활동은 여기까지’라고 외치면서 그의 인생에 긋는 선과 같다. 연금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와 아빠의 일생을 바라보는 조금 다른 관점이 생겼다.
내가 아직 삼십대라서, 내가 살아갈 날이 아직 많-이 남은 것만 같아서 부모님이 인생의 어디쯤에 서 계신지 자주 생각해보지 못했다. 특히나 물리적으로 8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축구 경기를 보는 아빠의 뒷모습을, 책을 읽는 엄마의 옆모습을 본지가 오래되어 그렇다고 핑계를 대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강하게 든다.
엄마는 아빠와 엄마가 함께 무엇을 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야 할는지 대화하고 싶어 했다. 나에게도 딱히 정답이랄 게 없어서 우리는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마는 자신의 남편이자, 세 남매의 아빠인 제임스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던, 믿음의 성장을 방해했던 것들에 대해 요즘 묵상하고 있다며 깊은 마음을 나와 공유해 주었다.
엄마와 전화를 마치고 난 다음 며칠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특히나 한강을 따라 따릉이를 타면서 산책하는 중년 부부를 마주칠 때마다 엄마의 질문과 마음을 생각했다.
마침 나는 <일기 여행>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부제는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신비한 여정’이다. 책을 막 시작해서 서론을 읽던 중이었는데 책을 다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제안할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다.
‘기록’이었다.
어디 아직 젊은 게 시간 타령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이야기하곤 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지 않냐고,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건 나뿐이냐고. 2년 반 전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는 더더욱 시간이 물 흐르듯, 바람 불듯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일까. 엄마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남은 몇 년에 대해 언급했을 때 마음의 문을 붙들고 있는 나사가 덜컹거렸다. 내가 입학한 신학대학원이 3년 과정이라는 걸 사람들이 처음 들었을 때, '그렇게 길어? 3년이나?’라고 말하면서 짓는 그들의 표정을 기억한다. 나도 조금은 동의했다. 2년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3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서울을 새로운 고향으로 품을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었다. 하지만, 3년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을는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나는 4학기를 마칠 때쯤 나의 멘토를 만났고, 좋은 동기들을 얻었다. 앞으로도 한 학기 남은 대학원 생활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른다. 이토록 빨리 지나가버린 3년의 대학원 생활이 매일 피부로 와 닿기 때문에 더욱 엄마가 말한 '남은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결코 늦지 않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란 건 없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지속해 볼 시간은 지금부터라도 충분하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지만,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기회가 되어준다.
나는 곧 엄마에게 제안했다.
기록을 시작해보자. 블로그를 시작해보자,라고.
매일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기도하는 엄마에게,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하던 일을 멈추고 시간이 많아져 독서를 재개한 엄마에게
나에게 추천하는 책과 나에게 공유하는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기록할 것을 제안했더니
엄마는 흔쾌히, 그래 볼까?라고 대답했다.
엄마에게 네이버 계정이 없어서 엄마의 네이버 아이디와 블로그를 만드는 일은 내 몫이었다. 나는 블로그 이름을 두고 잠시 고민했는데, 머리에 떠오르는 문구로 바로 정해버렸다.
새로운 시작.
엄마가 기록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내 소원을 담았다.
<일기 여행>에서 저자 말린 쉬위는 이렇게 말한다.
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변화한다.
삶의 여정과 일기 쓰기 여행이 서로 뒤섞이면서, 삶과 일기는 풍요롭고 서로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진다.
<일기 여행> p16
기록이 가진 가능성 중에는 삶의 ‘변화’와 ‘풍요로운 관계’가 있다.
블로그를 개설했더니 엄마는 바로 내게 책 읽는 공간과 기록을 사진으로 찍어 내게 보내왔다. 기록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의 하루는 기록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기록을 통해 엄마는 엄마의 일상과 더욱 풍요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엄마가 오롯이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블로그 포스팅은 당분간 내가 맡기로 했다.)
아직은 시작단계이므로 소통하는 블로그 이웃도 없고, 포스팅의 스타일도 정해지지 않았다. 일상이 아주 다이내믹하게 변했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네이버 블로그(지금은 간간이 신앙 관련 리소스를 공유)나 영문 블로그(현재는 운영 중지), 브런치와 이메일 뉴스레터(새롭게 단장 후 8월 발송 예정)를 시작했을 때 그랬듯, 혼자인 것만 같았던 그 처음의 순간이 지나면 엄마는 기록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이고, 주변엔 소통할 수 있는 동지들이 서서히 모여들 거란 것을.
이 일기 쓰기 여행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엄밀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자신의 의지인데, 그런 마음으로 수면 아래의 그 풍요롭고 신비하고 소란하면서 언제나 비옥한 지하 동굴의 층으로 내려가 보자. 우리 삶의 활기가 끓어오르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일기 여행> p21
작가가 말한 것처럼 혼자이든 혼자이지 않든 기록 자체가 삶의 활기를 끓어 올려준다고 나는 믿는다. 기록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엄마가 지금부터 누리게 되었음을 함께 더없이 기뻐하는 바이다.
유학시절 기억에 남는 기록이 몇 있다. 처음 뉴욕으로 떠나는 날, 나와 가족들은 짐을 아빠 차에 싣고 있었다. 여동생은 울면서 집에서 뛰쳐나와 봉투를 하나 쥐어주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공항에서 열어본 그 봉투 안에는 편지와 돈이 들어있었다. 방학 때마다 집에 갔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때면 동생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엄마는 처음 내가 동생과 캐나다로 떠날 때 아주 작은 메모장 앞뒤로 편지를 적어 주었다. 엄마의 기도와 바람과 믿음이 적혀 있었다. 지갑에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 읽곤 했다. 부모님이 1년 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전부 이사했기 때문에 특히나 이민 첫 일 년 차에 많이 읽어보았다. (기록들은 모두 부모님 집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으로 찍어서 이 곳에 함께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
아빠는 이메일을 자주 보냈다. 하루는 맨해튼 빌딩 숲을 헤치고 걷는 나를 떠올려 보았다면서 시와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실제로 만났을 때보다 글을 교환하는데에서 느끼는 그리움과 애정이 짙었다. 기록에 익숙한 가족 분위기 덕분에 나도 글을 쓰고 보내고 나누는 데에 거리낌이 적었던 것 같다.
혼자 묵상한 내용이거나 일상적인 하루의 일기일지라도 기록에는 사랑이 남는다. 내가 엄마의 블로그를 열면서 품었던 마음속 뜨거운 고마움, 엄마가 보내오는 기록을 컴퓨터로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감격스러움. 할머니에 대한 몇 해 전 기록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그녀의 유쾌함과 아빠에게 보냈었던 이메일을 열어볼 때마다 피식하고 웃음 짓게 되는 따스함. 이러한 감정 모두가 기록이 지니는 영원한 사랑이다.
나는 포스팅을 마치면 엄마에게 링크를 보낸다. 엄마는 블로그에서 자신의 기록을 다시 한번 읽는다. 이런 프로세스가 우리 둘에게 낯설지만 어렵지는 않다. 엄마는 ‘재밌다’라는 피드백을 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이 무겁고 난해한 것이 아닌 가볍고 재밌는 것이라는 데에 나 자신을 칭찬해준다.
어차피 한 번이고, 어차피 잠시인데 뭘 또 그렇게까지 기록을 남기고 블로그를 하고, 게다가 기록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지 모르겠다,라고 피드백을 줄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졸업 논문을 준비하면서 16세기 이후 프랑스 개신교도 즉 위그노 Huguenot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 기록물을 뒤지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후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하다. 이전 글에도 나누었듯, 작가 치마만다가 설파한 하나의 이야기가 지닌 위험성은 모두에게, 모든 장르에, 모든 시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추천한다.
나나 여동생 같은 30대 여성에게,
엄마와 같은 50대 여성에게,
아빠와 같은 60대 남성에게,
동생과 같은 20대 남성에게.
지금의 기록, 모두가 할 수 있을 때, 또 하고 싶을 때 언제든 시작하면 된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면 더더욱 좋을 테다.
지금보다 더 좋은 때라는 건 애초에 없으니까.
네이버 블로그를 하시는 분들 중에서
엄마의 기록의 여정을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블로그 새로운 시작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신앙서적 리뷰와 밴쿠버 생활에 대한 생각들이 공유되는 곳입니다. :)
Source:
Images by Yoona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