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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a Kim Sep 02. 2023

크루즈에서는 시간이 그 속도대로 가더라

30대 신혼부부가 휴가를 보내는 방법

직장에서 주는 휴가가 1주일 남았을 때, 또 그 휴가를 써야 하는 기한이 한 달 남짓 남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었다.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은데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서 편안하고 재미있는 휴가를 즐길 수 있을까. 정해둔 예산, 정해져 있는 시간이라는 조건 아래,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런 내게 남편이 물었다.


크루즈 어때?


출처: pixabay


엥? 웬 크루즈? 나의 마음은 온통 물음표로 뒤덮였다. 예전에 엄마가 크루즈 얘기를 꺼냈던 적이 있다.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여행하고 싶다고. 나는 그저 “그래, 언젠간 가겠지, 가자, 엄마-“ 하고 말았다.


주변에 크루즈로 여행한 사람도 없었고, 더군다나 내게는 “크루즈=중년 or/and 노년”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빨리 사용해야 하는 휴가 1주일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남편은 크루즈 여행을 발견하고 나서 좀 더 적극적으로 휴가 계획을 짜려는 자세를 취했다.


여행에 있어서 전형적인 J인 나. 그러나 이번은 여행 계획을 해낼 에너지가 부족했다. 남편이 다 알아서 한다면야 한번 믿고 맡겨보는 건 어떨까? 그래, 어차피 아이디어도 없는데 크루즈 그거 한번 가보지 뭐.


우리의 크루즈 여행은 기대감 제로로 시작되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호텔


처음 크루즈에 올랐는데 여행을 떠난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호텔 건물 한 채가 바다에 동동 떠있는 듯한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배 내부에 오르자 이건 배가 아니라 건물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으니 뭘 기대하고 상상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배지 뭐,라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이래서 아무리 누군가가 올려놓은 사진이나 영상을 봐도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안다,’라고 할 수가 없는 거구나.



방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바로 밖으로 나와 배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식당은 어디에 있는지, 앉아서 쉴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소파는 어디에 있는지, 야외 수영장은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와야 하는지, 운동장과 산책로까지 찾아내었다. 이곳에서 보낼 6일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마음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상에서 당연하게 하던 일들


삼시세끼 밥을 먹고, 보이는 지저분함은 그때그때 정리 정돈해야 하는 우리의 일상. 집안의 많은 부분들이 이미 많이 익숙해져서 새로운 영감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 낯섦을 만난다. 루틴처럼 하던 것들이 더 이상 루틴이 아닌 시간,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마주하는 공간 속에서 신선함과 동시에 감사함을 느낀다.



하루 중 어떤 시간에 가도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뷔페가 있으니 요리와 설거지에 할애하던 시간이 줄어들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준비해 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고맙고, 반대로, 집에서 내가 고른 재료로 내가 원하는 메뉴를 요리할 수 있다는 점이 소중히 느껴졌다.  


프린세스 크루즈는 침구류가 편안하기로 유명한데, 포근한 침대, 폭식한 이불이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휴가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덮고 자는 내 이불과 낮아질 대로 낮아진 (목의 피로도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만든) 나의 베개가 그리웠다.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특권. 그리고, 익숙한 것을 감사한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는 낮아진 마음. 여행은 늘 이런 선물까지 우리에게 건네준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또 따로



크루즈는 건물 한 채의 크기이기 때문에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로비와 식당부터 우리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수영장 옆 라운지 공간과 휴식공간들. 나의 기분에 따라,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따라 장소를 옮겨가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배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인데 매 순간 복잡하고 시끄럽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예상보다 고요하게 휴식했다. 나와 신랑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라도 생긴 걸까. 사람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의 장난치는 소리,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음식기구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휴식하는 나의 몸과 마음에는 그저 화이트 노이즈로 들릴 뿐이었다. 오히려 계속 흐르는 자연소음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휴식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심지어,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나는 책을 7권이나 읽었다. 스릴러 소설이라 스피드를 낼 수 있었던 점도 빼놓을 순 없지만.)


크루즈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크루즈는 오직 나이 드신 어른분들만 즐기는 여행 스타일일거란 나의 선입견이 깨지게 된 건, 많은 가족들과 학생들을 만나면서였다.


어린아이들부터 젊은 청년들까지, 크루즈는 모두를 위한 여행 방식이었다. 여행지에서의 매 순간을 계획하고 그대로 움직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체방법. 배에 몸을 맡긴 채 누워서 책을 읽고 머리를 노닐게 할 수 있는 여행이다.


물론, 크루즈로 여행하는 다수는 역시나 거동이 불편하거나 많은 시간을 걸을 수 없는 어르신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크루즈는 쾌적하다. 과하게 시끄럽거나, 파티 분위기로 떠드는 사람들이 적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좋은 휴식 공간을 유지하게 위해 신경 쓰는 듯하다.


크루즈로 하는 도시여행의 장점



캘리포니아 크루즈를 통해서 산타바바라,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엘에이를 여행할 수 있었다. 배는 선착장에 아침 일찍 도착해, 저녁 늦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마지막 선착지 엘에이를 제외하고는) 짐을 들고 내리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게 도시를 둘러보았다. 크루즈로 도시를 방문하는 것이 내 예상보다 훨씬 편리해서 다음번에도 크루즈로 가보지 않은 나라를 여행해보고 싶다는 계획이 생겼다.



크루즈가 남긴 선물: 쉼


첫 크루즈가 나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 때문이었다. 나는 여행지에서 계획을 짜고 그 계획대로 움직이는 완전한 J형의 사람인데, 크루즈에서는 내가 세워야 할 계획이 적어서 그저 먹고 자고 쉬는데 시간을 썼더니, 어느 순간 나의 뇌가 ‘너무 편안한’ 상태인 걸 깨달았다.


머리가 개운하고, 머릿속이 말끔했다. 아, 이런게 정말 쉰다는 거구나. 걱정이나 염려, 계획이나 목적, 이런 것은 필요 없구나. 그냥 쉬는 게 이렇게나 좋구나.


내게 이런 의미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내게 이런 의미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회사에서 휴가 시간을 주니까 휴가를 떠나고, 일하지 않을 때에는 할 게 없으니 여행을 가고. 주말은 어딘가로 나가서 걷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게 이곳 밴쿠버의 생활이니까, 당연히 나도 그렇게 하면서 살았다. 그런 식으로 쉼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크루즈 여행을 통해 의도적인 쉼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Intentional Living. 내가 하는 일도 마음을 다하여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지역 공동체에 우리들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인 것처럼, 나의 몸과 마음에도 온전한 쉼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쉼의 여정이 나의 창조주 아버지께서 만드신 바다 위여서, 물 위를 떠다니는 호텔, 크루즈 배여서 더 감사한 여행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알래스카 크루즈


캘리포니아 크루즈를 시작으로 그다음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다시 떠나게 된 알래스카 크루즈.


알래스카에서는 또 다른 감상이 생겼기 때문에 따로 포스팅을 하려고 한다. 알래스카 크루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기다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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