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누군가 소셜미디어에 좋은 사람을 만나면 하루하루가 꿈결 같다, 고 써놓은 글을 보면서 문득 꿈결, 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이 궁금해졌다.
꿈결 같다는 건 아름답고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라는 거겠지. 현실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흠이 없고 다툼이 없는, 잔잔하고 안전한 상태라는 거겠지. 분명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최근에 연애를 시작한 게 틀림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결의 정의는 나의 이러한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꿈결 (명사)
1. 꿈을 꾸는 어렴풋한 동안.
2. 덧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동안.
어감 때문이었을까. 꿈이 가지고 있는 몽환적인 느낌과 결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느낌만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사전을 뒤적여보기 전까지는 이 단어가 어렴풋하다거나 빠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젯밤 꾼 꿈을 기억하는가. 꿈 하나 안 꾸고 개운하게 자다가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의 수많은 과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인간은 매일 꿈을 꾼다.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왜일까? 여러 과학적인 이유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다르게 꿈은 어렴풋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렴풋하다 (형용사)
1.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뚜렷하지 아니하고 흐릿하다.
2. 물체가 뚜렷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흐릿하다.
3. 소리가 뚜렷하게 들리지 아니하고 희미하다.
4. 잠이 깊이 들지 아니하고 의식이 있는 듯 만 듯하다.
5. 빛이 환하지 아니하고 희미하다.
어렴풋하다, 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흐릿하고 희미하다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것도 뚜렷하거나 선명하지 않고 흐리고 희미하다는 말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하루하루가 꿈결 같은 사람. 이 사람은 아마도 이전의 자신이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온갖 긍정적인 감정의 풍요로움을 맛보고 있을 것이고, 이전의 자신은 절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레벨의 행복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연애의 시작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판타지는 일상이 되고, 일상 속에서는 오늘이 곧바로 어제가 된다. 어제가 되는 순간, 기억은 흐려지고 희미해진다.
하루하루가 꿈결 같았던 만남이, 관계에 돋보기를 가져다 들이댄 것처럼 선명해지고 뚜렷해지면 더 이상 꿈결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연애의 시작은 꿈을 꾸는 어렴풋한 동안과 같다. 꿈을 꾸는 누구나 언젠가는 그 꿈에서 깨어나게 되어 있고, 사람에 따라 꿈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혹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게 될 수도 있다.
꿈의 경우, 우리가 기억하는 정도의 차이는 뇌의 두 영역, 뇌에서 감각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신피질과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의 연결에 의해 결정된다. 꿈을 꾸는 동안 신피질과 해마는 활성화되지만 서로 간의 소통이 없기 때문에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데, 평범한 내용보다는 강렬한 내용의 꿈일 경우에 신피질에서 해마로 보내는 신호가 강해져서 기억에 더 남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난 이 기적과도 같은 연애의 시작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뇌에 인이 배겨서 우리의 일생을 위협하는 내용들은 심장을 도려낸듯한 가슴 아팠던 이별의 추억이나 전재산을 걸만큼 믿었던 사람에게서 맞은 언짢은 뒤통수일 경우가 더 많다.
꿈결 같은 연애의 아름다운 시작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판타지인지 일상인지 헷갈리는 바로 그 시작점에서부터 말보다는 행동과 노력으로 꿈결 같은 하루하루를 선물해준 그 사람을 지키면 된다.
편안한 음악이든, 빽빽하게 채운 일기장과 함께든 하루를 마무리한 후에는 어두운 방안에 놓인 침대 위로 몸을 뉘인다. 몇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감은 두 눈 위로 잠과 꿈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왔고, 이제는 겨울도 발 앞에 놓인 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꿈도 빠르게 왔다 빠르게 간다.
꿈결 같은 사랑. 이 사랑도 빠르게 왔다 빠르게 간다.
덧없이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덧없다 (형용사)
1.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시간이 매우 빠르다.
2. 보람이나 쓸모가 없어 헛되고 허전하다.
3. 갈피를 잡을 수 없거나 근거가 없다.
일을 하는 8시간이 잠을 자는 8시간보다 훨씬 길게만 느껴진다. 그만큼 알고 있을 때보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가는 시간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때에 빠르게 간 시간이기에, 지난 후에 더욱 헛되고 허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가는 시간 잡을 수 없고, 그 이유도 알 길이 없다.
더 오래오래, 꿈결 같은 하루하루가 지속되면 좋겠지만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시간의 틈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름다운만큼, 소중한만큼, 행복한만큼 더 허전하고, 이 허전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라고 아무리 질문해봐도 답은 없다. 설령 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릴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우연의 일치, 운명의 장난, 혹은 어쩌다 얻어걸린 운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연애의 시작에는 근거가 없다. 좋은 사람이라서 좋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서 좋고, 함께 있으면 좋아서 좋다.
그러다 덧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따라 우리의 마음도 빠르게 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빠르게 가는 마음. 그 마음이 가고 가다 닿는 곳에 도착해보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좋았고, 근거가 없어도 좋을 만큼 좋았던 그 마음에 자꾸만 이유를 붙이려고 하는 자신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차피 붙잡지도 못할 건 그냥 빠르게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꿈결 같은 연애는 편히 흘러가시도록 두어야 한다. 대신, 출발점에 나와 함께 서있는 사람, 나처럼 허전한 마음을 가누는 방법은 모르지만 그보다 훨씬 강한 사랑을 가지고 나와 함께 시작해준 그 사람을 붙잡아야 한다.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꿈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생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의 빈자리의 크기를 실제로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무지한 인간이란 존재는 지나가기 전보다 지나간 후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우린 그것을 때늦은 후회, 라고 이름 지으며 탓하기도 한다.
이렇고 저런 연애들을 지나 지금의 연인을 만난 걸 보면, 때늦은 후회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한 것이 맞구나 싶지만, 이제야말로 때늦은 후회보다는 때에 맞는 후회들을 해야 할 나이가 아닌가 싶다.
삶은 꿈과는 달라서, 못나고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일 때가 많다. 흠이 있고 다툼이 일어나는, 거세고 불안전한 상태일 때도 있다. 안개가 가득 낀 것과 같은 신비로움이라던가 더 알고만 싶은 묘한 매력이 있기보다는 잔인할만치 선명하고 부끄러울만치 세세한 것도 사실이다. 처음의 모양을 잃어버린, 꿈보다는 삶에 더 가까워진 연애를 보고 나면 마치 처음의 꿈결 같은 하루하루를 몽땅 잃어버린 것 같은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꿈결 같던 아니면 현실 같던, 어떤 모습의 연애던지 그 안에는 같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하루를 꿈으로 만들어주었던 사람들. 그들은 어렴풋하고 어리숙하고 모자람이 많았던 우리를 맑고 선명하고 정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유 없이 그저 좋았던 사람들은, 셀 수 없이 재빠르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버리는 시간을 지나서, 좋은 이유가 수백 가지나 되는 멋진 사람들이 되어주었다.
나라는 사람을 지나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갖게 된 몇 안 되는 나의 옛 연인들에게 한 마디의 말을 전할 수 있다면, 꿈결 같았던 하루하루보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더 소중했던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꿈결 같은 하루가 곧 현실 같은 하루가 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어야만 했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일어났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우리는 꿈과 현재 사이에서 꿈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하루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꿈결 같았던 연애의 시작이 관계라는 현실의 이름을 얻었을 때에 하나도 아쉽지 않고, 꿈이 아닌 바로 오늘이 행복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었다는 사실에 감동하며 나 자신을 칭찬해줄 날이 너무 멀지 않았음도 알고 있다.
꿈결 같은 하루하루도 결국 사람이 내게 준 것이다.
그 사람이 없다면 내게도 없을 하루.
이것을 알아버린 지금, 나는 꿈에서 깨어도 놀라지 않는, 꿈보다 나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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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Zwad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