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꿈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몇 안 되는 일탈 중 하나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 버스로 30여분이 걸리는 곳에 자리한 작고 허름한 영화관에서의 시간이었다. 분주한 금요일 저녁이나 한가한 토요일 낮, 운전도 할 줄 몰랐고 술을 마시는 것도 허락되지 않던 고등학생이었지만,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때만큼은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의 내가 영화관에 간다는 건, 나도 다른 이들처럼 곧 어른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같았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2016년의 12월, 같은 영화관을 다시 찾았다. 운전대를 잡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것도 완전한 자유가 되어버린 어른의 모습으로. 모양은 다르지만, 어릴 적 나처럼 꿈을 가진 두 청춘을 만났다. 라라랜드 La La Land의 첫 주제가 Another Day of Sun을 배경으로.
LA의 한 고가 고속도로 위, 지루한 교통체증에 시달리던 스크린 속 배우들은 원색의 화려한 원피스와 셔츠들을 걸치고 탭댄스, 힙합, 스포츠댄스 등 온갖 춤사위를 선사한다. 길게 늘어진 자동차 양 옆, 앞 뒤, 위아래에서 리듬에 몸을 맡긴 댄서들은 첫 노래가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각 자동차 안으로 사라진다. 데미언 샤젤 Damien Chazelle 감독은 영화 시작부터 우리에게 미리 알려준다:
라라랜드는 ‘교통체증'이라는 실체를,
뮤지컬이라는 ‘가면'을 씌워,
동화라는 ‘이데아’로 선사할 것이라는 걸.
미아는 할리우드의 (최고) 여배우를 꿈꾸는 배우 지망생, 세바스찬은 신세대들에게 괄시받는 재즈 음악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재즈바 운영을 꿈꾸는 재즈 피아니스트다. 고속도로에서 처음 서로를 지나치는 둘. 크리스마스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던 세바스찬이 주인에게 해고당하는 순간, 둘은 다시 마주친다. 시작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았던 첫 마주침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 가는 둘의 애정이 훨씬 더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미아는 영화 촬영장 내에 있는 커피숍 아르바이트생이기도 하다. 얼굴을 다 가릴 만큼 큰 선글라스를 쓰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커피숍에 도착한 어느 여배우는 도도한 말투와 손짓으로 커피를 사 간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아. 미아가 그 여배우와 같은 모습으로, 그녀의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한다는 걸 영화를 보는 모두가 다 눈치챌 수 있다.
세바스찬과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때, 미아에게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남자 친구가 있었다. 세바스찬과 영화를 보기로 한 밤, 외출 준비를 하던 미아의 방으로 남자 친구가 들어온다. 알고 보니 이미 남자 친구와의 저녁식사가 약속되어 있었던 것. 미아는 남자 친구와 친구 커플과 식사를 하던 중,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대화 속에서 망상에 빠져있다가, 문득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홀로 영화를 보던 세바스찬을 찾아가 그의 옆에 앉고,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춘다.
그렇게 세바스찬과 미아는 연애를 시작한다.
둘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꿈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눈다. 하루는 세바스찬과 함께 있던 미아가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방 안에 남아있는 세바스찬은 미아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된다. 재즈 클럽을 열 사람이다, 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미아. 그리고 변변한 직업 없이 재즈에만 미쳐있던 세바스찬은 그렇게 취직(!)을 결심한다. 마음이 내키진 않지만, 미아와 함께하기 위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캐스팅이 안되면 너의 이야기를 직접 써서, 네가 직접 연기까지 하는 공연을 올려보면 어떻겠냐는 세바스찬의 제안에 미아는 카페까지 그만두고 작업에 몰두한다. 하지만, 공연이라는 방향을 제시한 세바스찬은 곁에 없다. 밴드와 투어를 다니느라 어쩌다 한 번씩 얼굴만 내비칠뿐이다. 단 한 번의 공연. 거의 다 비다시피 한 공연장. 그곳에 세바스찬은 없었다.
공연을 마친 미아는 잠시 엘에이를 떠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미아에게 찾아온 또 한 번의 캐스팅 기회. 세바스찬은 직접 그녀를 찾아가 그 뉴스를 전해주고, 그녀를 데려다 캐스팅 장에 내려주고, 캐스팅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려주고, 끝나자마자 함께 공원에 가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은 각자 꼭 이루고자 하는 꿈 안에 서로가 없음을 확인하고,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와 함께이든지)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5년이라는 시간이 한 줄의 문장만으로 관객을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 시간 동안 미아는 여배우가 되었고, 세바스찬은 재즈클럽의 사장이 되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세바스찬과 그의 재즈바에 우연히 들른 미아는 그렇게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물론, 둘은 짧은 인사도 가벼운 포옹도 없이 헤어진다. 라라랜드가 이토록 회자되고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의 엔딩 때문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는 재즈바를 떠나기 전, 무대에 있는 그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 미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바스찬의 표정이 영화가 끝난 후까지 쉽게 사라지지 못했다.
감독은 사랑과 꿈 두 가지를 다 이룰 수는 없으니 어서 마음을 정하라고 어깨를 떠미는 것 같았다. 혹은 네 인생에 사랑도 꿈도 있기는 한 거냐며 되묻는 것 같기도 했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함께 실내에 있다가 실외로 나올 때마다 스크린 위로 보여주는 어떤 공간의 전체적인 모습이, 마치 어릴 적 내 얼굴보다도 큰 동화책 페이지를 가득 매운 그림 같았다.
라라랜드는 어른이 된 나를 위한 동화였다.
현실일 수 없고, 현실이어서는 안 되는 동화.
더러는 사랑과 직업 중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라라랜드는 두 주인공이 꿈을 이루어낸 그들의 성공이야기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공이 물질적인 것 이상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그 이야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미아를 바라보던 세바스찬의 마지막 모습이 성공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절하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속 미아를 만나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다. 정말 너의 꿈이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었던 게 맞냐고.
한결같은 미아의 모습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자신이 쓰고 연기한 공연을 마치고 그녀는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분노했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녀의 공연을 보러 멀리까지 와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공연장을 가득 채운 박수소리와 핏빛보다 붉은 장미 다발을 원했던 것이었다. 또한,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자신이 이전에 일했던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는 모습은 흡사 영화 초반에 등장한 여배우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꿈이라는 게 '연기'였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배우'로 보이는 것이었을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재즈를 싫어한다는 그녀를 데리고 진짜 재즈를 들려주고 보여준 세바스찬. 지겨운 캐스팅은 잠시 제쳐놓고 너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던 세바스찬. 좋은 기회이니 절대 놓치지 말라며 캐스팅 장에 데려다준 세바스찬. 자신 없어 보이는 미아에게 넌 파리에 가게 될 거라고 장담했던 세바스찬. 미아는 세바스찬과 함께일 때 꿈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세바스찬과 함께하는 것이 그녀의 진짜 꿈이었다.
이의 또 다른 증거는 미아가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질 때의 모습이다. 한가한 저녁, 술을 마시고 춤을 추러 나갈 때에도 여자 친구들의 제안이 아니면 움직이질 않는 그녀지만, 그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자의로 일어났고, 자의로 그 자리를 떠났고, 자의로 세바스찬을 찾아갔다.
그녀가 원하는 것,
인생에서 정말 찾았어야 했던 것,
이루었어야 했던 꿈은 바로 세바스찬이었던 것이었다.
꿈처럼 다시 만났지만 현실로 돌아갈 것을 선택한 미아. 세바스찬을 뒤로하고 그의 재즈클럽을 떠나는 그녀를 보면서 그들의 라라랜드가 라라랜드로 끝나버렸음을 실감했다. 각자의 꿈이 서로를 만나 불협화음을 내다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아무리 세바스찬이 라라랜드 안에 남아 예전 모습 그대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해도, 미아가 제안했던 이름과 그녀가 디자인해준 네온사인으로 자신의 클럽을 꾸몄다 해도, 애초에 둘의 꿈은 서로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미아의 꿈 안에는 한품에 가득 담기는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그녀의 공연장을 지켜주는 세바스찬이 있고, 세바스찬의 꿈 안에는 그의 음악에 맞춰 행복하게 춤을 추는 미아가 있다. 하지만 꿈속의 그들은 진짜 그들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이전의 약속만이 그들의 진짜 모습과 함께 남았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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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ver Image by The Vanguard Site
Caption Images by La La Land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