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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a Kim Oct 31. 2017

앎의 욕구와 목적

자꾸만 더 찾고 싶고, 읽고 싶고, 알고 싶은 당신에게


만국사랑편지 뉴스레터한글영문, 두 종류의 읽을거리와 볼거리를 보냅니다. 

주로 한 주간 제가 흥미롭게 읽은 에세이, 아티클, 리뷰, 영상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여름 동안 <효리네 민박>을 즐겨 보았다. 화면에 민박집 손님들을 위한 조식 메뉴를 고민하던 이상순과 이지은 (아이유)의 모습이 나타났다. 북엇국을 제안한 직원에게 사장이 묻는다. 


“너, 북엇국 할 줄 알아?”


직원은 당당하게 말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된다고.



아냐고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시대


우리는 이제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 알고 있냐는 질문이 만들어지자 마자 스마트폰을 켜고 단지 몇 초면 얼추 모양을 갖춘 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네이버 지식iN의 등장과 함께 방학 숙제까지 인터넷으로 해결하는 초등학생들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보는 쌓였고, 게시판에서는 직접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었던 전문가들의 체계적인 답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찾고 읽고 배운다. 


정보 검색 엔진의 왕중왕 격인 구글의 작은 네모 창에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단어, 표현, 문장을 입력한다. 더 찾고, 더 읽고, 더 배우기 위해서다.


미리 고생하며 찾지 않아도 언제든 가까이에서 항시 대기 중인 지식. 지식은 우리가 느끼고 인식하는 “앎”의 가시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터넷이 이미 다 가지고 있는, 만져지지는 않지만 마치 소유할 수 있는 유형의 것으로 느껴지는 정보들을 우리는 왜 찾고, 읽고, 배우려 하는 것일까?


*아래는 Jake Wilder의 <When Google Has the Answers, Why Bother Knowing?>을 번역한 글입니다. 






역사 교사들은 자신들의 직업이 죽어간다고 생각할까? 음악 산업의 길을 따라갈 다음 분야로 여길까? 1분 이내로 어떤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 혹은 Google로 대체된다고 볼까?


“앎”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제 온라인 상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데, 앞서 배워서 뭐하나? 다른 일에 우리의 시간을 쓰는 것이 낫지 않은가?


우리의 대답은 “예”이다. 그러나 또한, “아니오”이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가 역사를 비롯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현재의 방법은 쓸모 없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방법으로 현재의 방법을 대체해야지, 가르치고 배우는 걸 몽땅 없애 버려야 하는 건 아니다. 



Google은 놀랍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Google에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지미 웨일스


나는 현재 구글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 마음을 감쌀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페타바이트일 것이다. 1과 0의 수량을 보관하고 즉시 검색할 수 있는 지점까지 구성한 공학 기술은 경이롭다.


구글은 절대 보통이 아니다. 43만 2천 개의 결과를 0.49초 만에 보여주는 것을 보아라. 좋다 구글, 넌 나에게 줄 많은 답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보지 않기로 결정한 43만 1천990개의 검색 결과들은 분명 대단할 것이라 믿어.


구글의 강력한 힘은 거의 무제한적이다. 인터넷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로 가득 차 있다면, 구글은 무한한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글은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배우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도움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만약 도움이 되어주었다면, 우리는 매번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교훈 속의 역경


“성공은 실수를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는 것이다.” - 조지 버나드 샤


거의 모든 회사는 “학습 교훈”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독창성이 없는 기본 전략뿐이다. 


누군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어떤 일을 망쳤다.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본인이 어쩜 이리도 미련했었는지 설명하는 리포트를 만든다. 이런 기록들은 데이터베이스로 저장되어 영원히 보관되고, 검색해서 읽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식으로 전파될 준비를 갖춘다.


거의 모든 회사가 이러한 보물 정보를 관리한다. 회사 내에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정보들을 살펴보면, 놀라운 양의 정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한 정보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회사는 큰 문제를 일으킬 때까지 사소한 문제들을 반복하고, 어떤 때에는 최고 담당자를 해고시켜야 하는 경우에도 이른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끝없는 반복의 순환 속에서 비슷한 문제를 공통으로 가진다.


왜일까? 몇 번의 클릭 만으로도 이전의 실수를 알 수 있는데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유일한 진실의 지혜는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앎이다.” - 소크라테스


이 모든 부품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자동차 엔진과 남아있는 부품 더미 사이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모자란 사람일지 모른다고. 더닝 크루거 효과가 또 다른 피해자를 낳은 거다.


코넬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는 총기 안전, 운전 기술, 그리고 대학 시험 결과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불만족스러울 때, 자신의 능력에 비현실적 확신을 갖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한 예로, 총기 안전 지식을 높은 것으로 평가한 한 NRA 회원은 실제로 해당 주제에 대해 테스트했을 때 점수가 매우 낮았다.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훨씬 더 현실적 평가를 내렸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동차의 엔진을 다시 설치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 또한 해낼 수 있는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추가 부품들이 남아 있고, 이들은 모두 최종 제품에서 제외되기엔 꽤 중요해 보인다.


우리가 한 주제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정보들을 갖고 있는지 실제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박식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분야의 실제 지식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멍청하게 만든다. 

이러한 장애물에 대해서 구글은 무력하다.



마커스 누구?


마커스 오렐리우스를 떠올려보자. 그가 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소평가다. 로마 황제로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중, 이타심, 평온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는 훈련과 자제를 매일 실천했다. 그는 공공 기금을 낭비하지 않았고, 돈을 쓰기 전에 상원의원과 상의했다.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그는 세금을 인상하기보다 개인 재산을 경매에 부치기도 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븐은 마커스의 통치가 로마 황제 시대 중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대"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마커스의 시대를 “아마 역사 중 유일하게 사람들의 행복이 정부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마커스 오렐리우스의 저서 <명상록>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그의 반성과 제국을 운영하고 가족을 이끄는 일상의 압력에 어떻게 대응하기로 결정했는지 볼 수 있다. 그의 스토아 철학과 평온을 추구했음이 우리 모두에게 교훈으로 작용한다. 우리 가운데 누가 그러한 권력을 가졌을 때 동일한 통제를 보여주지 않고자 하겠는가? 누가 일상의 고투 속에서 이타적 마음가짐의 혜택을 받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마커스 오렐리우스의 삶과 철학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넬슨 만델라, 알렉산더 해밀턴, 조지 마샬 장군에게서 배운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정보는 온라인이나 공공 도서관 출입카드를 가지고 얻을 수 있다. 누구든지 원하는 시간에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왜 찾아보아야 하는 것일까?


마커스의 성취와 투쟁, 그의 갈등과 성격에 대해 결코 들은 적이 없다면, 우리가 왜 그에 대해 알아보는 수고를 겪어야 하나? 아니면, 우리는 그가 121년에 태어나, 안토니우스 삼촌 아래 중위로 복무했고, 161년부터 180년의 죽음 이전까지 로마의 황제로 일했음을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정보를 미리 갖고 있었던 경우, 우리는 마커스 오렐리우스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주제에 더 깊이 파고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주제에 대해 잘 모를 때, 우리는 자신의 무지에 편안함을 느낀다.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다. 구글은 정보를 우리의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다. 교훈이 없는 데이터 베이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의 실수를 검토하고 이해하도록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구글을 통해 식견에 이를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 전후 사정이라는 맥락이나 초기 이해가 없으면 더 많은 지식을 원하는 동기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건 무엇인가?


“교육의 목적은 사실의 지식이 아니라 가치의 지식이다.” - 윌리암 버로스


제임스 알투쳐는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샤를마뉴 대제가 언제 태어났는지 사람들에게 물었던 이야기를 한다. 그의 질문에 누구도 정확한 날짜를 말하지 못하고, 그는 이 모습을 실패한 학교의 시스템의 표식으로 사용한다. 이 문제의 진실은 샤를마뉴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혹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글의 빵과 버터가 되어준다. 몇 번의 클릭과 함께, 샤를마뉴가 742년 4월 2일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역사 교사와 롬바드 역사가들을 빼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정보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Jeopardy! 쇼를 보는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기려는 게 아니라면. (게임 쇼 응답을 출연자들보다 먼저 외치는 것이 실제로 좋아 보이나 아니면 그저 성가신가? 슬프게도 나는 이미 내 아내의 입장을 알고 있지만…)


사실을 암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보를 배우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종종 간과되는 이 정보의 출처는 저평가된 역사 교사들에게 있다.



역사는 궁극적 길잡이


“우리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로 만들어진다.” - 마틴 루터 킹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미래 성과에 대한 최선의 예측 인자는 과거의 행동”이라고 말했다. 인사과 면접에서 듣는 만트라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행동이 단기간에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는 우리는 공포, 혼란, 탐욕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계속 반응할 것이다. 역사에 대해 이해하면, 우리가 과거의 교훈을 가지고 미래를 개선해나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피엔스: 인류 역사>에서 유발 노아 하라리는 어떻게 역사 속 문명사회가 계급 구분을 통해 선별된 소수 민족이 인구 대다수를 지배하도록 도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로버트 카로의 <파워 브로커>는 도시 계획가의 영향력이 어떻게 그 분야를 악화시켰는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우리가 여전히 고심하고 있는 분리주의적 태도를 어떻게 촉진시켰는지 보여준다.


역사적 차별의 배경에 있는 신화와 방법론을 이해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부분을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다. 티모시 스나이더의 짧지만 강력한 책 <티라니: 20세기의 20가지 교훈>에서는 지난 세기의 폭군 정권의 확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을 제시한다. 


“20세기 유럽 역사는 사회가 깨지고,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윤리가 붕괴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총을 들고 죽음의 구덩이에 서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를 도울 것이다.”


스나이더는 파시즘 전술에 대한 냉담한 통찰력을 제공하여 가까운 미래에 무엇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현 상황의 유사점과 함께 보여준다. 이러한 교훈 때문이든, 아님 다른 교훈들 때문이든, 역사는 인간이 다양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과거의 사례로 가득하다. 이러한 지식이 없이는 이전 우리의 선조들보다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잃고 만다.


스나이더의 말로 돌아가 보자. “역사는 우리가 패턴을 보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역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시스템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각자가 다르지만 모두가 독특하지는 않은 순간들을 보여준다."



‘안다는 것’은 대화의 선행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학문적’이라는 단어를 경멸한다.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형성하는 명백한 점에 대해 논의하는 트위드 재킷을 입은 남자들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진정한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학습에 대한 성실함이 세계 다른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 


학습이 “학업”을 목적으로 수행될 때, 우리의 초점은 실행 가능한 정보에서 시험 가능한 정보로 이동한다. 학습 가치가 있는 정보들은 아주 많은 경우 시험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날짜 암기로 돌아간다. 왜냐면 날짜는 시험에 아주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암기된 사실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문제와 미래의 문제에 대해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문제에 대응하는 새로운 의견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토론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져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런 대화를 가질 수 있다. 구글은 우리에게 의견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구글에서 관련된 정보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것만 할 수 있다. 


앎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앎은 행동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대화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화는 우리에게 무척 필요한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의 생각을 구글에서 검색해볼 수 없으므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알려주세요.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박수 버튼을 눌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이 나누어지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heers!)






안다는 것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릴 만큼 넘쳐나는 정보. 이 정보가 모두에게 공평하고 저렴하게 (그렇지 못한 세계의 여러 지역도 있지만) 나누어진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찾고, 읽고, 배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비교적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깊게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가 배움을, 앎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실수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쯤이면 되었다,라고 마음을 놓으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터지곤 하는데, 이건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거라 예상한다.


몇 평짜리 집에 사는지, 얼마짜리 차를 모는지, 어떤 경제적 가치를 가진 회사에서 근무하는지 묻고 알고 달달 외우는 것처럼,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는지, 최근에 감동받으며 본 영화가 무엇인지, 하루 중 어떤 시간에 어디로 산책을 가는지 묻고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내 안에 상기시켜 본다. 


알아야 할 것이 아직도 한참 많이 남아 있다는 걸 기억하면, 오랜 친구와의 관계도 따끈따끈한 호빵 같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작업도 갓 인쇄된 새 책 같다. 흥미롭고 신비롭다. 감사가 넘친다.


나는 믿는다. 우리가 더 찾고, 읽고, 배우려고 하는 이유는 무의식적, 그리고 의식적으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소통하고 연결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번 태어나 한번 죽는 이 삶에서 고마운 사람들과 더 많이 나누기 위함이라고.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대화를 시작해보는 연말을 보내려 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모르는 것들은 인정하고, 새로운 지식에 도전장을 내밀어 보겠다. 이래서 어쩔 수 없이 지나간 한 해에 대한 아쉬움보다, 다가올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가 넘치는 연말을 보내게 생겼다.




Source:

Cover image by Agnieszka Boe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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